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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는 청진기, 손에는 복싱 글러브…"의사 세계 챔피언이 목표"

여자복싱 세계챔피언 전초전 앞두고 훈련하는 서려경 교수 (사진=연합뉴스)

대한민국 여성 가운데 누가 가장 복싱을 잘하는지는 답하기 어렵지만, 대한민국 여성 의사 가운데 '가장 주먹이 센' 사람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순천향대학교 부속 천안병원 소아청소년과 서려경 교수(31·천안비트복싱)가 그 주인공입니다.

서려경은 지난 7월 열린 여자 라이트 플라이급(48㎏) KBM 타이틀 매치에서 임찬미를 8라운드 38초 만에 TKO로 꺾고 한국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습니다.

한국을 제패한 서려경은 이제 세계로 눈을 돌립니다.

오는 9일 경기도 수원시 인재개발원 체육관에서 쿨라티다 쿠에사놀(태국)과 세계 타이틀 매치 전초전을 치른 뒤, 여기에서 승리하면 내년 2월 일본 선수를 상대로 여성국제복싱협회(WIBA) 세계 타이틀에 도전합니다.

어제(4일) 순천향대학교 천안병원 소아청소년과에서 만난 교수 서려경은 어느 병원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의사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린이 환자를 세심하게 진료하고, 간호사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복싱 챔피언'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진료 보는 서려경 교수

하지만 병원 근처 복싱 체육관에 들어가는 순간 전사의 눈빛으로 변합니다.

계체량 통과를 위해 몸무게를 줄이는 상황에도 손정수 관장의 미트를 치는 소리는 온 체육관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2019년 프로에 데뷔한 서려경의 통산 성적은 7전 6승(4KO) 1무입니다.

그의 상대인 쿨라티다 쿠에사놀은 7전 6승(2KO) 1패입니다.

서려경은 "이번 태국 선수는 자료나 경기 영상이 없어서 파악된 게 없다"며 "경기에서는 훈련한 대로 상대 스타일을 파악해나가면 되지 않을까 한다. 집중하고 경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여자 경량급 경기는 재미없다는 이야기가 많다. 저는 그래도 경량급에서 재미있게 경기한다고 생각한다. 꼭 오셔서 큰 소리로 응원해주시면 힘이 날 것"이라고 당부했습니다.

'현역 의사 복서' 서려경 (사진=KBM 제공, 연합뉴스)

복싱 팬들은 '본업이 의사라 인간의 신체 구조와 급소를 잘 알아서 유리한 점이 있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자 서려경은 웃음과 함께 손사래를 치며 "전혀 그렇지 않다. 의사라서 유리한 점은 하나도 없다"면서 "밤새 당직하고, 논문까지 써서 너무 졸린 데 운동하느라 힘들다는 생각은 했다"고 지난 시간을 돌이켜봤습니다.

서려경의 가장 큰 강점은 강력한 펀치와 리치(팔 길이)입니다.

지난 7월 한국 챔피언에 오를 때에도 가벼운 왼손 훅으로 임찬미로부터 KO를 빼앗을 정도로 주먹에 파괴력이 넘칩니다.

매일 서려경의 펀치를 받아야 하는 손정수 관장은 "처음 복싱을 시작했을 때부터 주먹 힘이 대단했다. 보통 여자 선수한테는 (스파링 하다가) 맞아도 안 아픈데, (서려경) 선생님 주먹은 위협적"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장점을 '펀치'로 꼽은 서려경은 "원래 팔씨름 같은 걸 잘해서 힘이 센 것은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관장님이 잘한다고 하셔서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운동을 즐겼던 서려경이 본격적으로 복싱을 시작한 건 2018년입니다.

순천향대에서 함께 일하는 선배가 술자리에서 '넌 재능이 있습니다.

내가 다니는 복싱 도장에 같이 가보자'고 말한 게 시작이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의사와 프로 복싱 선수를 병행하다 보니 술자리를 가질 기회가 줄었지만, 여전히 가장 생각나는 건 시원한 '소맥' 한 잔입니다.

서려경은 "이번 경기가 끝나고 가장 먹고 싶은 건 '소맥'"이라며 웃었습니다.

병원에서 서려경은 이미 유명 인사가 됐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응원하겠다', '꼭 세계 챔피언이 돼라'고 인사합니다.

원래 나서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그는 복싱 챔피언이 된 덕분에 tvN 예능프로그램 '유퀴즈 온 더 블럭'까지 출연했습니다.

서려경은 "유퀴즈는 워낙 주변에서 '너 정도면 꼭 나가봐야 한다'고 많이 말했던 프로그램이라 나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 그대로 세뇌될 정도였는데, 마침 섭외 전화가 와서 잘 나갔다 왔다"고 했습니다.

서려경이 가장 좋아하는 별명은 '인자강'입니다.

보통 격투기 선수를 호칭하는 '인자강'은 '인간 자체가 강함'이라는 뜻입니다.

서려경은 "인간 자체가 강하게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 같아서 가장 와닿는다"고 했습니다.

옆에서 손정수 관장이 환자와 한국 복싱을 모두 고쳐주는 '국민 힐러'가 어울린다고 해도 서려경은 "'국민'은 부담스럽다. 센 느낌이 드는 별명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복싱은 상대 선수의 주먹이 아니라 '나 자신'과 싸움이 얼마나 무서운지 확인해가는 고독한 종목입니다.

승리의 환희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만, 준비과정은 보통 인간의 인내심이라면 견디기 힘듭니다.

서려경은 "주변에서는 의사에 복싱 챔피언이라는 화려한 것만 보고 내가 행복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정말 너무나도 힘들어서 불행하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고 토로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펠로(전임의)와 복싱을 병행했던 지난해입니다.

야간 근무가 늘어나 몸은 천근만근인데, 복싱까지 해야 해서 '세상이 미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응급실에서 가장 흔히 쓰는 통증 척도로 NRS(Numeral Rating Scale)가 있습니다.

0이 전혀 안 아픈 것, 10이면 '죽을 만큼' 아픈 것입니다.

여자복싱 세계챔피언 전초전 앞두고 훈련하는 서려경 교수 (사진=연합뉴스)

서려경은 "솔직히 말해서 작년에는 NRS로 따지면 9.5 정도였다. 다행히 펠로를 끝내서 올해는 7 정도로 낮아졌다. 올해는 다행히 작년만큼 힘들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서려경은 힘과 지성을 겸비한 보기 드문 재능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삶이 행복하지 않냐고 묻자 "공부도, 운동도 다른 사람보다 몇 배 많이 했다. (재능을) 다 쓰느라 힘들게 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복싱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어떻게든 끝을 보고 마는 근성 때문입니다.

서려경은 "일단 복싱을 좋아하고, 하다 보니까 멈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 같다"며 "어쨌든 시작한 것을 끝까지 해야 하는 성격"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이제까지 해왔던 것보다 해야 할 것이 적게 남았기에 버틴다"고 덧붙였습니다.

목표로 잡았던 '세계 챔피언'이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서려경이 이번 태국 선수와 전초전에서 승리하면 내년 2월 일본 선수와 세계 챔피언 자리를 놓고 맞대결을 벌일 계획입니다.

여기서도 승리한다면, 내년 4월 복싱 4대 기구(WBA, WBO, IBF, WBC) 통합 챔피언에까지 도전합니다.

서려경은 "여기까지 힘들게 왔고, 세계 타이틀까지 도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의사 세계 챔피언이 꼭 되는 게 목표"라며 "의사 중에 세계 챔피언이 된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라고 반문했습니다.

(사진=순천향대 천안병원 제공, KBM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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