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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서로의 품에 기댈 수 있도록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북적북적]

그래도, 서로의 품에 기댈 수 있도록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401: 그래도, 서로의 품에 기댈 수 있도록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나는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운 마음으로,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나를 분명히 도와주리라는 믿음을 품고 그녀를 불렀다.​​​
"선생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中)

최은영 작가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지난 여름의 한가운데 나왔습니다. [북적북적]에서도 낭독했던 [내게 무해한 사람] 이후, 5년 만의 최은영 중단편집으로 모두 7편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어쩌면 [북적북적]에서 이제 와서 이 책을 '소개'한다는 게 무색합니다. 출간되자마자 중쇄를 거듭하면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작품들을 소리 내서 읽는 소중한 기쁨을 누려보고 싶어서, 조금 늦은 감이 있다는 점을 무릅쓰고 가져왔습니다.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보았다. 마치 우리가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다는 듯이. 내가 은행에 들어가기 전부터도 알던 사이였다는 듯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中)

이 책을 집어들기 전부터 이미 기대하고 있었으면서도, 새삼 또 한 번 놀라고 말았습니다. 삶에서 대체로 '발견되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섬세한 결들을 벼락처럼 뒤집어 내보이는 최은영의 소설들은 읽는 이의 마음 한가운데로 그야말로 '훅' 들어와 벽을 무너뜨립니다. 저 역시 이 작품들과 제 마음 사이에 적당한 거리 설정을 하기가 힘들어 당황스럽다는 생각을 넘기는 책장마다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작품 속 상황들과 '똑같은 경험'을 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가 이토록 작품과 내 삶 사이에서 무너지는 거리에 당황하게 되는데, 쓰는 본인은 괜찮은 걸까. 얼마나 단단하게 삶을 직시하며 스스로를 다져가면 이렇게 쓸 수 있는 걸까, 괜한 오지랖 같은 감정까지 덮쳐옵니다. 제가 거리 설정에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이 글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다가가는 것일까, 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가늠해 보는 건 살짝 포기했습니다.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최은영의 글들로부터 '나의 이야기가 말해지고 있다'는 동감과 위로를 받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사실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최은영의 소설들을 읽는 행위는 이토록 생살 같은 우리의 이야기들이 실은 어디서도 제대로 말해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통렬한 통증을 동반합니다. 그저 책 표지를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만나지 못한 지 오래된 친구의 손을 슬쩍 쓸어잡는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그런 책입니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노동 유연화 정책, 신자유주의 경제 개편이거든요. 한국이 1997년에…"
"지금 뭐라고 했죠?"
강사가 토론 중간에 끼어든 적이 거의 없었기에 모두가 그녀를 바라봤다.
"노동 유연화 정책이…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아니, 그전에 뭐라고 했죠?"
그는 당황하여 귀가 붉어진 채로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앞서 얘기한 학생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죠. 그것도 말을 끊어가면서."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웃음기가 걷힌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내 수업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앞의 학생에게 사과하세요."
그는 온통 붉어진 얼굴로 내게 사과했다.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가 내 말을 끊었을 때, 그리고 내 발언을 평가절하했을 때 약간 무안했을 뿐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 말을 끊고, 내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상황이 내게는 익숙했다.
그녀는 자신의 얘기를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그에게 말하고 수업을 이어나갔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中)

5년 전 [북적북적]에서 [내게 무해한 사람]을 낭독했을 때 제가 쓴 소갯글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이번엔 그때와 다른 이야기만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일부러 찾아 읽었는데, 막상 도저히 다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일부분을 다시 가져옵니다. [2000년 언저리를 경계로 청소년이 되거나 성인이 된 동시대 한국 여성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아는 바로 그들의 얘기를 하겠다는 자신감 또는 절실함이 이 책의 쉼표와 마침표마다 뿜어져 나옵니다. 그러나, '내가 우리들의 얘기를 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 얘기를 해주지 않을 거야'라는 위기감을 느껴본 적이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 최은영은 그런 위기감을 느껴본 자만이 갖고 있는 주변인의 관찰력으로, 자기 얘기를 확립하기 위해 '우리가 아닌 자'들을 지워버리거나 장치 또는 기능만으로 취급하지 않는 소설을 씁니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상황이나 인물들의 관계는 유독 반전 아닌 반전을 거듭하거나 다층적인 구조로 전개됩니다. 누구도 함부로 지우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 글쟁이로서의 기교가 녹아있을 뿐 아니라, 시선의 깊이와 주제의식이 낳은 필연인 겁니다.]

5년 전 제가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으며 느꼈던, 이 같은 최은영의 독보성은 시간과 함께 더욱 깊어졌습니다. 여기 실린 작품들에서 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만한 일들은 (없지는 않지만) 별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슬비가 지나가는 것처럼 사소한 순간인 것만 같은 일상의 작은 사건들로 이은 플롯으로부터, 읽는 이의 마음을 파헤치듯이 내려 꽂히는 장대빗줄기 같은 문장들이 이어집니다. 스스로 알지 못했던, 외면했던, -이 작품집의 일곱 번째 소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의 핵심어 중 하나로 말하고 있듯이- '부끄러워했던' 우리 삶의 모든 순간들을 샅샅이 파헤쳐서 드러내는 데 가차 없고, 그 순간들에 대한 발견과 오래 곱씹은 긍정으로 완성한 위로를 내미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모의 그런 양육 태도에 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안다. 이모의 태도가 감정적 방임에 가까웠다는 것도. 하지만 나는 이모를 판단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런 판단은 너무 쉬우니까. 나는 그런 쉬운 방식으로 이모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이모에게 中)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 실린 일곱 편의 작품들 가운데 (그 배열 순서를 포함해) 일종의 '변곡점'과 같은 역할을 하는 작품은 딱 한가운데에 실린 '답신'입니다. '스포일'하지 않는 선에서만 한 마디로 소개하자면, [답신]은 언니와 관련된 모종의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게 되는 동생의 이야깁니다. 겉으로 보았을 때 그 자매의 서사는 배신과 균열의 서사입니다. 세상에 서로밖에 기댈 것이 없는 약자인 그들은, 약자들 간에 더욱 치명적으로 서로를 해칠 수밖에 없는 갈등을 거듭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하지만 소설 속 일인칭 화자인 동생 '나'는 자신의 조카(아마도 다시 볼 수 없을 언니의 딸)에게 써내려간 편지 속에서 결국 포기하지 않는 연대와 용서를 보여줍니다. "결국 찢어버릴 편지를 쓰는 마음"(답신 中)으로,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을 구해내기 위한 연대와 용서, 그리고 이해를 길어올립니다. [답신] 앞의 3편이 여성 동료, 사제, 선후배나 친구 간의 이야기라면, [답신] 뒤에 이어지는 3편의 작품은 여성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최은영의 여성들은 보살피고, 사랑하고, 버림받습니다. 그녀들이 바쳐진 삶의 가장 중요한 국면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허공에 흩어지곤 합니다. 작가 최은영은 낯설지 않은 그 같은 여성 서사에서도 가장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을 찾아내, 그녀들에게 응당 돌아가야 할 '의미'를 바칩니다. 이들 중 누구도 나와 같지 않지만, 이들 모두가 나와 닮아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압니다.
밤 비행을 할 때면, 검은 하늘을 날아가고 있을 때면 나는 종종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이모를 느낀다. 이모의 시선은 조종실 너머에, 비행기 너머에, 밤하늘과 대기 너머에 있다. 희박한 공기와 낮은 온도, 여러 층을 올라가면 결국 사라지는 대기와 우주공간의 시작. 내가 아는 하늘은 그런 것이지만, 그런 순간에 나는 문득 옛날 사람들의 믿음을 떠올린다. 환한 낮이 아니라 어두운 밤에만 지상에 닿는 저 너머의 눈빛이 있다는 믿음을 말이다. (이모에게 中)
마이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기남은 그애가 한 계절만 지나도 오늘의 일을 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그애에게 그저 멀고 낯선 혈육이 되리라는 것도. 하지만 그 사실이 자신을 더는 슬프게 하지 않는다고 기남은 생각했다.
"할머니."
자신을 부르는 마이클을 보며 기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中)

나 자신과 우리 엄마와 할머니와 그리고... 이제 연락하지 않거나 소식이 뜸해진 몇몇 친구들을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안에서 모처럼 다시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최은영 작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우리의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듣고 있을 것입니다. 가장 문학적인 문학이란 결국 독자로 하여금 여기서 나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때, 지금 이 땅에서 최은영보다 더한 문학이 있을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문학동네'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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