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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서울의 봄', 우리의 봄을 빼앗은 '그 사람들'을 박제하다

서울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다. 그 승자가 희대의 악인이라면 어떨까. 그렇다고 해도 지나온 시간을 거스를 순 없다. 역사 앞에서 후대가 할 수 있는 건 그 기록을 제대로 평가하는 일일 것이다.

'서울의 봄'이라 일컬었던 시기가 있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전두환의 신군부가 1980년 5·17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전까지의 7개월 남짓한 기간이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치솟았던 그 시기를 '봄'에 비유했다.

영화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은 전두환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던 1980년 12월 12일에 현미경을 들어댔다. 김성수 감독은 단 9시간 만에 다시 군인들에게 나라의 운명이 넘어간 거짓말 같은 그날 밤의 이야기를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해 만들어 냈다. 소재와 주제의 의미가 살아있으면서 영화적 재미까지 놓치지 않은 올해 최고의 한국 영화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감독은 그날의 목격자였다. 서울 한남동 일대에 살던 고등학교 3학년 학생 김성수는 그날 밤 7시 30분경 총성을 들었다. 도로를 지나가는 장갑차를 보기도 했다. 동네에서 들려온 총소리, 도로를 가로지르는 탱크는 고교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이날의 진실을 제대로 알게 된 건 1988년 제5공 청문회에 이르러서였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분노했던 김성수는 44년이 흘러 영화감독으로서 그날의 이야기를 조각해 보기로 결심한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계엄법에 따라 육군참모총장 정상호(이성민)는 계엄사령관에, 보안사령관 전두광(황정민)은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된다. 전두광은 육사 출신으로 구성된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나간다. 정상호는 전두광을 견제하기 위해 갑종 출신 군인 이태신(정우성)의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한다. 더불어 정상호는 전두광의 지방 발령을 계획하고, 이 계획을 눈치챈 전두광은 하나회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누구나 알만한 인물이지만 실명 대신 유사한 이름을 내세웠다. 역사적 사실에 가공의 이야기를 더한 팩션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는 장치기도 하다. 영화는 9시간의 타임 라인을 기반으로 이야기의 큰 줄기를 만들었다. 반란을 모의하는 전두광과 하나회 일당, 이를 막으려는 이태신과 진압군의 고군분투가 영화의 중심 축이다.
서울의봄
특정 사건을 영화화하고 있지만 대한민국 사회와 조직에 대한 거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별 개수와 무궁화 개수에 따른 위계, 학벌과 출신에 따른 파벌 그에 따른 끼리끼리 문화 등이 정치 권력과 만나 어떻게 반역의 메커니즘을 형성하고,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 지를 단 9시간의 이야기로 축소해 보여준다. 이건 단순히 개인이 사리사욕을 채우고, 어떤 집단이 호의호식한데 그친 이야기가 아니라 한 나라의 운명까지 바꾼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단면이다.

유독 전화 통화 장면이 많은 이 영화는 상대의 회심을 목적으로 한 명령과 회유, 겁박의 순간을 촌각의 긴장감으로 다뤄낸다. 전두광 패거리들조차도 욕망과 광기에 휩싸인 단순 악으로만 묘사하지 않았다.  작은 분열과 변심이 모여 악인의 지렛대 역할을 하기에 이른 것임을 영화는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1987'이 민중의 뜻이 한데 모여 만든 승리의 드라마였다면, '서울의 봄'은 보이지 않은 조직의 분열과 개인의 사리사욕이 만든 파국의 드라마다.

영화는 후반부에 들어 전두광과 이태신의 대립을 액션 영화의 스케일과 박진감으로 묘사한다. 전방의 공수부대를 서울로 진입시켜 권력을 장악하려는 전두광의 반란군과 남은 병력을 끌어모아 반란군을 막아내려는 이태신의 진압군이 서울 광화문에서 마주하기까지의 스펙터클은 이 영화의 백미다. 빠른 컷편집과 분할화면, 조명의 뚜렷한 명암대비 등을 통해 관객이 사건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게끔 한 영화적 테크닉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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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광'을 연기한 황정민은 이 영화의 정수다. 이미 평가가 끝난 희대의 악인을 연기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출연을 결정한 후 고민 없이 자신을 캐릭터에 투신했음을 알 수 있는 연기였다. 황정민은 매 촬영마다 4시간에 걸쳐 민머리 분장을 하고 '그 사람'으로 빙의했다.

황정민만큼 인간 내면의 탐욕, 비열함, 광기를 표현하는 데 있어 탁월한 배우가 있을까. 희대의 악인을 일말의 동정과 연민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징그럽고 추악하게 연기해 냈다. 영화 말미 화장실 신에서의 연기는 '악의 화신' 그 자체다. '리처드 3세', '오이디푸스' 등 셰익스피어의 정극을 연기하며 발현해 온 압도적 카리스마를 극영화에 접목한 듯한 광기의 열연이었다. 김성수 감독은 이 장면을 두고 "악마의 탄생'이라고 표현했다.

신념에 찬 군인 이태신으로 분한 정우성의 연기도 좋다. 배우의 이미지가 캐릭터에 투영돼 보이지 않은 시너지를 내는 경우가 있다. 정우성은 완벽한 타입 캐스팅이었고, 단단하고 우직한 연기로 이태신의 원칙과 신념을 연기해 냈다.
서울의봄

이밖에 육군참모총장 정상호 역할의 이성민, 제9보병사단장 노태건 역할의 박해준, 육군본부 헌병감 김준엽 역할의 김성균, 국방부 장관 오국상 역할의 김의성,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역할의 유성주, 특전사령관 공수혁 역할의 정만식,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오진호 역할의 정해인의 연기 호흡은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보는 것 같은 완벽한 앙상블을 보여준다. 여기에 수경사 작전참모이자 이태신의 오른팔인 강동찬 역할의 남윤호는 '서울의 봄'의 발견이다.

목격자에서 전지적 시점의 관찰자이자 스토리텔러가 된 김성수 감독은 개인의 기억에 역사의 기록, 창작자의 시선을 더해 '서울의 봄'을 완벽에 가깝게 완성해 냈다. 사건의 충격과 비극에 함몰되지 않고 차가운 시선을 견지하면서 각본의 긴박한 박동을 영화적 리듬으로 업그레이드시켰다.

또한 명배우들이 한 영화에서 호흡할 때 자칫 개인기의 향연이 될 수도 있었지만 액션의 합처럼 한데 어우러지게 만든 김성수 감독의 디렉팅 능력도 돋보인다. 여기에 감독의 든든한 파트너인 이모개 촬영감독과 김상범 편집감독, 이재진 음악감독의 탁월한 조율 역시 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크게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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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20여 분에 이르는 패배의 기록이 마무리되는 찰나 김성수 감독은 엔딩에 방점 하나를 찍는다. 지금도 남아있는 흑백 사진 한 장을 재현한다. 그날의 영웅들이라 자신했던 늑대 무리들의 기념사진이다.

영화는 사진 속 인물의 미래를 일일이 열거한다. 조명이 아닌 박제다. 김성수 감독은 관객이 패배의 좌절감을 안고 극장을 나서길 바라지 않았다. '서울의 봄'은 그날의 사건을, 그 사람들을 다시 평가한다. 한낱 영화에 지나지 않지만, 이렇게 영화는 때론 위대한 기록이자 근사한 대중 예술이 된다. 작품의 압도적 가치는 극장 영화에 등 돌린 관객의 마음까지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제임스 A. 프루드의 명언이 맴돈다.

"역사는 수 세기에 걸쳐 옳고 그름의 법칙을 설파하는 외침이다. 생각도 변하고, 태도도 바뀌고, 교리도 흥망 하지만 도덕률은 영원의 현판에 새겨져 있다."

(SBS연예뉴스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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