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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충고가 두려운 당신에게…"블루 자이언트"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89

"블루 자이언트"의 한 장면 / 판씨네마

이 영화, 지금은 박스오피스 20위권까지 밀렸지만 뒷심이 상당했다. 개봉 2주 차 주말 관객 수보다 3주 차 주말 관객 수가 더 많았다. 개봉 4주 차 주말을 넘긴 지난주에는 관객 10만 명을 돌파했다. 예술영화로서는 상당한 히트다.
 
“블루 자이언트”는 재즈를 소재로 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다. 한국의 재즈 팬 저변이 넓다고는 할 수 없으니 일본 애니메이션의 힘인가? 하고 생각해 보지만 이 영화는 한국에서 히트하는 부류의 저패니메이션 스타일도 아니다.

   유성 영화의 시작을 알린 “재즈 싱어(1927)”이래, 영화사에서는 재즈 영화가 적잖이 나왔다. 기억나는 근래의 재즈 영화만 해도 “라운드 미드나잇(1986)”, “캔사스 시티(1996)”, “마일스(2015)”, “본 투 비 블루(2015)”, “빌리 홀리데이(2021)”등이 있다. “위플래시(2014)”, “라라랜드(2016)”같은 대중적인 재즈 (활용) 영화도 있었고, 티모시 샬라메가 “에브리씽 해픈스 투 미”를 달달하게 부른 “레이니 데이 인 뉴욕(2019)”처럼 재즈의 향기만 살짝 풍기는 영화도 있었다.

재즈를 다룬 애니메이션도 있다. 개성 있는 그림체의 “치코와 리타(2010)”와 픽사의 “소울(2020)”도 재즈 영화의 계보에 넣을 수 있겠다.

그런데 “블루 자이언트”는 이런 영화들과는 좀 다르다. 영화의 약 1/4이 라이브 연주 장면일 정도로 재즈를 매우 진지하고 본격적으로 다룬다. 게다가 주인공들은 불과 18세다. 청소년들이 주인공인 재즈 영화에 10만 명이 들었다고?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다.

강가에서 혼자 색소폰 연습을 하는 다이 / 판씨네마

세계 최고의 재즈 색소포니스트를 목.표.로. 하.며. (꿈꾼다기보다는) 겨울에도 강가에 나와 입술이 터지도록 연습하는 고교생 미야모토 다이는 졸업하자마자 도쿄로 상경한다.

일단 친구인 타마다 슌지의 집에 얹혀사는 다이는 한 재즈 클럽에서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 사와베 유키노리를 우연히 만난다. '나이 든 아저씨들이 낡은 테크닉만 반복하며 “이게 재즈요”하고 있기 때문에 재즈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유키노리는 자신이 도쿄 음악의 선두에 설 거라며 자신만만해한다. 유키노리의 목표는 10대가 가기 전에 일본 최고의 재즈 클럽 ‘쏘 블루’ 무대에 서는 것이다. 유키노리는 멋진 연주보다는 ‘이기는 연주’, 고퀄의 연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심 유키노리의 실력에 감탄한 다이는 유키노리에게 밴드를 결성하자고 제안한다. 세계 최고의 연주자가 되고 싶은 다이에게 ‘세계 최고’란 “기분과 모든 감정을 소리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집이 피아노 학원을 해서 4살부터 피아노를 쳤던 콧대 높은 천재 피아니스트 유키노리와 노력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다이에 초보지만 열정은 최고인 친구 타마다가 드러머로 합류하면서 드디어 십 대 후반의 재즈 트리오 ‘JASS’가 결성된다. 이들은 난다 긴다 하는 재즈 연주자들이 즐비한 도쿄 재즈씬에서 맨땅에 헤딩하며 쏘 블루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간다. 하지만 인생 경험이 일천한 이들에게 열정은 있어도 요령은 부족하다. 
 
작은 클럽 공연에 이어 재즈 페스티벌에도 나가며 이름을 알려가는 JASS, 그러던 어느 날 유키노리는 ‘지인 찬스’를 써서 쏘 블루에 줄을 대본다. 쏘 블루 담당자인 타이라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 JASS의 연주를 보러 와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JASS의 라이브 공연을 지켜본 뒤 공연장 근처에 있는 바(Bar)로 유키노리를 불러낸 중년의 쏘 블루 담당자 타이라는 패기 넘치는 세 젊음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놓는다.

-유키노리: 저희 연주 어떠셨나요?
-타이라: 드럼은 초심자더군요. 솔로도 없고 딱 필요한 것만 치지만 아주 열심히 하더군요. 호감을 주는 연주였어요. 

팀 내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타마다에 대한 평가에 유키노리의 얼굴에 일순 화색이 돈다.

-타이라: 색소폰도 전력으로 전진하려는 파워에 소리도 독특하고 흥미로웠어요. 그 친구의 장래가 궁금합니다. 

-타이라: 그리고 자네. 자네는 글러 먹었어. 손가락 테크닉만 남발하는 피아노, 재미라곤 전혀 없는 연주. 우린 일본 최고의 클럽이라 자부하고 있는데, 자네 혹시 얕보고 있나?
-유키노리: 그럴 리가요, 저는…
-타이라: 자네는 겁쟁이인가? 내장을 까 보일 정도로 전력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게 솔로인데, 자넨 음악을 깔보기 이전에 사람을 깔보고 있어. (...중략) 카와키타 씨에게 부탁해서 우리 쪽에 제안하는 허접함까지. 그.런. 이.유.로. 이번에는 연이 없었던 걸로 하지.
 
* * *

일터가 조용해졌다는 말이 들린지도 꽤 됐다. 메인뉴스 마감이 임박한 저녁이면 시끌벅적하곤 했던 뉴스룸도 요즘엔 조용하니, 보통 직장은 더할 것이다. 그래서 육체노동의 현장은 어떤지 궁금하다. 글자 그대로 손발이 맞아야 하는 노동 현장에서 카톡으로 대화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윗세대와 아랫세대 간 소통이 어려워지거나 많이 줄었다. 하더라도 형식적으로 꼭 필요한 얘기, 즉 얘기를 안 할 경우 내 책임으로 넘어올 경우에만 대화하게 되는 일이 많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암묵지나 조직과 업의 (히)스토리가 전달이 안 된다.
 
윗세대 입장에서는 꼰대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지도든 충고든 조언이든 안 하는 경우가 많다. 마음 한편에서는 ‘내가 뭐라고’, ‘나도 잘 못하는데’라는 자기 객관화의 메아리와 함께 “너나 잘하세요”라는 친절한 금자 씨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코치의 일과 선수의 일은 다른 것이다) 

좀 더 자신에게 솔직해본다. 귀찮아서 안 하는 것이다. 비판은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그 불편함은 고스란히 나의 불편함으로 돌아온다. 해봤자 나한테 도움이 안 된다. 뒤에서 욕이나 먹지, 하는 생각이 앞선다. 그러니 잘못된 걸 알면서도 그냥 넘어간다. 우리 사회처럼 프로페셔널, 장인에 대한 존경과 인정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그러니 결국 모두 정치를 하려는 거 아니겠는가- 윽박지르거나 두루뭉술한 칭찬은 난무하는데 ‘정확한’ 비판과 ‘정확한’ 칭찬 모두 드물다.
 
진정한 프로의 세계는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고, 기는 기라고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세계다. 나를 까 보인다는 것은 나를 걸고 일한다는 것이다. 까보이면 밑천이 바닥난다고 느낄 때, 실력이 아니라 자리로 말하게 하고 싶을 때, 바로 그때, 이건 아닌데 싶어도 말하지 않고 가만있는 것이다. 가마니처럼. 

도쿄 최고의 재즈클럽 '쏘 블루' 앞에 선 세 사람 / 판씨네마

술값을 내고 먼저 떠나버린 쏘 블루 매니저를 보내고 혼자 쓸쓸히 바를 나선 유키노리는 정처 없이 도쿄의 밤거리를 걷는다. 어느덧 불 꺼진 쏘 블루의 문 앞에 당도한 유키노리는 혼잣말로 되뇐다.
 
“대단하셔. 그런 말까지 하다니. 
그런 말까지 해주다니.. 역시 이 클럽은 대단해.”


유키노리의 이 대사는 예상하지 못했다. 반전이었다. 모욕에 가까운 비평을 듣고도 천재 피아니스트 유키노리는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속이 쓰렸겠지만- 오히려 그런 말을 해준 클럽의 수준에 감탄했다.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해서 둘러대지 않고 ‘그.런. 이.유.로.’ 라며 정확히 퇴짜 놓은 이유를 밝힌 쏘 블루 매니저의 태도는 요즘 찾아보기 힘든 직구였고, ‘그.런. 말.까.지. 해.주.다.니.’ 라며 이를 겸허히 받아들인 유키노리 역시 굉장한 포구였다.

그랬기에 유키노리는 충격을 이겨내고 이날 밤 바로 피아노 앞에 앉아 사흘 내리 연습에 매진한다. 

“블루 자이언트”의 타치카와 유즈루 감독은 "한결같이 직진하는 사람을 보면 ‘멋있다’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게 느끼는 것 자체가 지금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원작 만화의 편집자이자 영화의 스토리 디렉터인 넘버8은 “(세 사람이) 무언가를 향해 진지하게 나아가고 있는 그 도중이라는 감각이 굉장히 아름다운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 무언가를 향해 진지하게 나아가고 있는 도중인가. 그렇다면 정확하게 충고할 것이고, 또 그런 충고를 받을 준비가 돼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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