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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뼈가 거친 외교관' -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

[그 사람] "미국이 손 놓아도 혼자 설 수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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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가 거친 외교관

한국은 꽤 오랫동안 핵개발에 관심을 가졌다. 박정희 정권 당시 핵개발을 추진하다 미국의 반대로 좌절된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그 이후에도 한국원자력연구원을 중심으로 핵에 대한 연구는 계속됐다. 1980년대 초반 플루토늄 추출 실험을 했고 2000년에는 0.2g의 고농축 우라늄을 확보했다. 정부 안에서 대통령을 비롯해 몇 사람만이 아는 극비 사항이었는데 2004년 미국이 이 사실을 눈치챘다.

외교부 장관 반기문은 "핵폭탄이 터졌다"고 표현했다. 미국과의 관계 악화는 말할 것도 없고 유엔 차원의 제재로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정부는 연구원들이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벌인 일이라며 그 의미를 축소하려 했지만 연구원 몇 명의 일탈 행위로 볼 사안은 아니었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비밀리에 핵개발에 착수한 것으로 단정짓고 이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겠다고 압박했다. 당시 그 사건이 미친 파장은 알려진 것 이상으로 크고 깊었다. 국제원자력기구, IAEA가 네 차례에 걸쳐 조사단을 파견하고 한국 정부가 관련자 문책, 장비와 시설의 봉인과 폐기 등 미국 정부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고서야 문제는 겨우 가라앉았다. 그때 미국의 철퇴를 맞은 이후 한국은 핵개발 의지를 완전히 접었다.

그 기억은 한국, 특히 외교안보 정책결정 과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트라우마가 됐다. 북한 핵 보유가 기정사실이 되면서 우리 사회 일부에서 자체 핵무장론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미국의 반대를 넘어설 수 있겠느냐, 핵 개발에 대한 국제 사회의 제재를 견딜 수 있겠느냐, 핵무장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있느냐 등등의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때 기억이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핵은 왜 해결되지 않는가, 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한국 외교는 왜 존재감이 약한가, 당신이 말하는 잠재적 핵무장론은 현실성 있는 이야기인가 등의 질문을 안고 지난달 20일 전 외교부 장관 송민순을 만났다. 2004년 그 사건이 벌어진 직후 청와대 안보실장, 외교부 장관 등을 지냈으니 그때 이야기부터 들었다.

- 2004년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핵물질을 개발하려던 사실이 드러나서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그때 경험이 정부의 핵 정책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그건 출발점부터 다른 겁니다. 그땐 비밀리에 하자는 거고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공개적이고 합리적인 절차에 의해 하자는 겁니다. 비밀리에 하는 것은 요즘 세상에 될 수가 없는 겁니다. 미국이 지금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공개적으로 테이블에 올려놓아야 우리가 언제든지 그 불씨를 다시 살릴 수 있는 거지 한번 철퇴를 맞았다고 해서 포기하면 안 되는 거지요… 내가 요새 알아보니까 그 뒤로 원자력 관련 연구원에서 관련 시설이나 장비를 깡그리 치웠다고 하던데 그러면 안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정식으로 해야지요."


스프 그 사람
이름이야 많이 들었지만 얼굴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다. 자신을 '뼈가 거친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말이 절묘하다 싶게 어울렸다. 진지함과 고집스러움이 섞인 얼굴에 웃음이 다소 인색했다. 투박한 표정, 경상도 억양, 말꼬리를 흐리는 어투는 세련된 외교관이라기보다 야전에서 뼈가 굵은 노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5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런 사람이야말로 외교관이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사람을 동맹국 외교관이라고 생각하면 큰코 다친다'

경남 진양에서 태어나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68년 서울대학교 독문과에 입학했다. 시위를 하다 경찰에 붙잡힌 적도 있지만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데모에 앞장서기 힘들었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강원도 춘천에서 탄약병으로 근무하면서 매일 같이 총알 숫자를 세는 게 일이었다. 내가 왜 이런 일로 청춘을 보내고 있나 싶었다. 나라가 분단되지 않았다면 군대에 올 리도, 총알이나 헤아리며 살 리도 없었다.

진한 아카시아 향기가 코를 찌르던 어느 날 외교관이 되어 분단을 극복하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결심했다. 복학 후 외무고시 준비에 매달렸다. 외무고시는 어학에 대한 재능을 살리는 일이기도 했고 타고난 능력 말고는 기댈 곳이 거의 없던 처지에 입신 양명할 수 있는 명분도 갖춘 선택이었다. 1975년 당시 외무부에 26명의 '호랑이 새끼'들이 외무고시라는 관문을 뚫고 들어갔다. 그 가운데 마산 출신의 억센 사투리를 쓰는 이 사람도 있었다.

처음부터 잘 나갔던 것은 아니었다. 분단 도시 서베를린 총영사관이 첫 임지였다. 그다음은 인도 대사관, 그다음은 외교부 서남아과에서 일했으니 외교부에서 말하는 워싱턴 스쿨이나 도쿄 스쿨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교부 서남아과에서 근무하던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이 발생했고 그때 대책반장이었던 이상옥 차관의 눈에 띄어 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그 이후는 승승장구였다. 워싱턴 주미대사관으로 발령받으면서 외교부에 들어온 지 10년 만에 이른바 워싱턴 스쿨의 일원이 되었다. 외교부 핵심 보직으로 꼽히는 북미1과장, 북미2과장(안보과장), 북미국 심의관, 청와대 외교비서관, 북미국장, 폴란드 대사, 6자회담 수석 대표를 역임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청와대에 들어가 김대중 정권으로 권력 교체가 이루어진 직후 외교비서관으로 한미일의 대북 정책 협의체인 소위 '페리 프로세스',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이끌어내는데 일조했으니 외교관으로 주류 중의 주류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폴란드에서 2002년 월드컵 홍보행사 당시
자주 외교를 내세운 노무현 정부 초기 이른바 워싱턴 스쿨은 찬밥 신세였다. 폴란드 대사를 마치고 귀임했지만 외교부 안에 이 사람 자리는 없었다. 한동안 경기도 자문대사로 외곽을 돌았다. 외교부 장관이 윤영관에서 반기문으로 바뀌면서 차관보로 기용됐다.

이후 6자회담 수석대표와 청와대 안보실장, 외교부 장관으로 중용되자 출세를 위해 DNA를 친미에서 반미로 바꿨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자신은 친미도 반미도 아닌 미국통일뿐이라고 했다. 국내의 평가보다 이 사람에 대한 미국의 평가가 더 흥미롭다. 국방부 부차관보로서 이 사람과 SOFA 협상을 벌였던 미국 측 인사는 이런 내용의 송민순 인물파일을 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받았다.

"송민순을 미국 동맹국의 외교관이라고 생각하면 너희는 큰코 다친다. 그는 때로는 당신과 미국에 대해서도 적대적일 수 있다. 그래도 이 사람하고 협상을 해볼 가치가 있다. 이 친구는 자기가 한 말을 꼭 지킨다."

외교부 안보과장으로 주한미군 주둔 협정, SOFA 협상을 벌일 때 지킬 수 있는 것만을 약속하고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켰지만 협상 태도는 거칠었다. 미국 측 협상 파트너들은 군인보다 더 군인 같다는 의미로 커널 송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주한미군하고 미국 고문관들이 그때만 해도 우리 국내 고위직까지 다 연결이 되어 있었어요. 특히 고문관들은 한국에 오래 있어서 한국 사정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하도 세게 미국을 몰아붙이니까 이 사람들이 국방부 장관, 국무총리한테까지 '외교부 안보과장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호소를 하는 겁니다. 한 번은 이종구 당시 국방장관이 외교부장관에게 '안보과장이 운동권 출신이라는데 그런 사람이 주한미군 문제를 다루는 외교부 안보과장 해도 됩니까'라고 한 적도 있어요."

미국 측 협상 파트너들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한미 미사일 협상 과정에서 미국 협상단이 청와대와 직거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자 "백악관이 청와대를 설득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청와대가 우리들을 설득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온 이야기는 꽤 유명한 일화다.
 

역사를 우리 손으로 쓴 기억 - 베이징 6자회담

2005년 제4차 6자회담 공동성명 / 출처 : 연합뉴스
2005년 베이징 6자회담은 한국 외교의 존재감이 두드러졌던 드문 장면이다. 그 회담에서 한국 측 수석대표로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체제 논의 등 북핵 문제의 포괄적 해결 방안을 담은 9.19 합의를 이끌어냈다. 자기감정 표현에 능하지 않은 사람이 타결 직후 현장에서 "남이 써주던 역사를 우리 손으로 쓰고 있다"고 소감을 밝히고 회고록에도 쓴 것을 보면 당시 보람과 기쁨이 정말 컸던 모양이다.

6자 대화의 두 축은 북한과 미국이었으니 합의를 만들어 낸 주역을 굳이 꼽자면 크리스토퍼 힐과 김계관이다. 여기에 의장국인 중국의 역할과 실무적 능력도 협상 타결에 일조했다. 국내에서도 통일부 장관 정동영이 북한과 막후 채널을 총 가동했고 외교부 장관 반기문도 미국 설득에 총력을 다했다. 그러나 회담 현장에서 마지막으로 골을 넣은 사람은 이 사람이다.

당시 협상에서 최대 관건은 경수로 문제였다. 미국은 경수로의 'ㄱ'자도 꺼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때 '북한이 경수로를 가질 수 있는 기회의 창은 열어 둔다'는 표현으로 틈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미국 대표단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과 절대로 반대편에 서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늘 미국과 같은 편에 섰던 사람이다. 그런데 미국이 '경수로를 가질 수 있는 기회의 창'이라는 표현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번에는 미국의 반대 편에 설 수밖에 없다."

이 사람이 만들어낸 '기회의 창'이라는 작은 틈으로 빛이 스며들면서 대다수 사람들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6자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9.19 합의는 요리에 필요한 재료들을 열거한 것에 불과할 뿐 요리 자체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어떤 순서로 어떤 절차를 거쳐 요리를 만들어낼지 합의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6자회담이라는 틀 안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성과였고 그 성과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이 사람 역할이 컸던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노무현 정부가 주장하던 한국의 균형외교가 구체적인 결실을 맺은 사례기도 했다.

노무현은 한국대표단에게 베푼 저녁 자리에서 "다른 나라들이 남의 땅에서 다시는 힘겨루기 하지 못하게 하자"며 고양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때부터 노무현은 이 사람을 눈여겨봤고 그다음 해에 외교부 차관보였던 사람을 파격적으로 장관급 청와대 안보실장으로 기용했다.

이 사람 개인적으로는 9.19 합의는 단 1%의 가능성이 있더라도 계속 아이디어를 내고 문을 두드리면 결국 문은 열린다는 '1%의 성공 방정식'을 체감한 경험이기도 했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립형 한미 동맹' '잠재적 핵무장론' 같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워싱턴의 한반도 정책이 서울에서 시작되게 해야 한다" 소신 역시 포함해서 말이다.

6자회담은 합의 직후 미국이 돈세탁 혐의를 이유로 들어 마카오 방코 델타 아시아은행(BDA) 계좌에 있던 북한 자금을 동결하면서 좌초되고 말았다. 9.19 합의는 북한과는 협상을 시작하기도 어렵고, 합의에 이르기는 더 어렵고, 그 합의를 실행하기는 더더욱 어렵다는 교훈만을 남긴 채 사실상 역사의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북핵은 왜 해결되지 않을까

북한은 9.19 합의를 한 지 불과 1년여 만인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청와대 안보실장으로 북한이 레드 라인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이 사람의 가장 큰 책무였지만 북한 핵실험을 막는 일에 실패했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궁금했는데 의외로 담담했단다. 책임을 느끼지 않았을까.

스프 그 사람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할 것인가, 거기에만 생각이 쏠려서 책임을 져야겠다는 생각이 그때 들지는 않았습니다. 책임질 일이면 언제든 책임져야 되지만 그런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어요. 돈세탁 건은 일단 미뤄두고 북한에게 9.19 합의 이행의 기회를 한번 줘보고 그래도 안되면 한미가 공동으로 세게 치고 나가자고 미국에 그렇게 매달렸는데 미국 사람들이 그렇게 미적 미적댔어요. 그게 미국 국내 정치 때문에 안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미국에 대해서 분통이 터졌어요. 미국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지 않았는데 미국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절실하게 대응하지 않는 것이 열통이 터졌어요. 북한 정권은 어차피 나쁜 집단이에요. 나쁜 놈을 나쁜 놈이라고 하는 것은 해법이 될 수는 없거든요."


그 이후에도 북한은 미국과 국제사회가 그어 놓은 레드 라인을 몇 번이나 넘었다. 핵실험을 6번이나 했고 장거리 미사일 시험을 몇 번이나 했는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와 응징은 백약이 무효다. 한반도의 위기는 일상화되었고 우리는 위기를 일상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북핵 문제는 좌절감을 넘어 체념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천만 민족이 핵전쟁의 위협을 일상으로 여기며 살아야 하는데 누구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렵고 내 책임이라고 손 들고 나서는 사람도 없다.

역대 어느 정권을 콕 찍어서 그 정권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모두의 책임이니 누구의 책임도 아닌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북핵의 현실적 실질적인 당사자는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인데 그 문제 해결의 우선적인 책임과 역할이 한국이 아닌 미국에 있는 모양새도 사실 당혹스러운 일이다. 북핵 문제에 20년 이상 매달려온 이 사람에게 물었다.

스프 그 사람
-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왜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겁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강대국 정치 때문입니다. 미국이나 중국 모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00% 노력을 하지 않아요. 생각을 해보세요. 이 문제 해결한다고 세계 최강대국이 다 모였잖아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도 작은 나라가 아닌데 이런 나라들이 다 모였는데 북한 핵 문제 하나를 해결을 못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안 되는 이유는 그 다섯 나라가 다 뜻이 안 맞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북한 핵이라는 거는 미국과 중국의 힘의 대립 속에서 생기는 독버섯과 같은 거예요. 그 힘의 균형이 깨지지 않는 한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그걸 더 깊이 들어가면 미국은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기 할 수 있는 100%까지 가지 않습니다. 중국도 마찬가지고요."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했을 때 북한은 이 사실을 한 시간 전 중국에 통보했고, 중국 국가주석은 미국 대통령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이 정보를 공유했다. 한국에게는 주중 대사를 통해 실험 직전 알려줬다. 미국 대통령과 대한민국 대통령 통화는 핵실험이 있은 지 거의 11시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북핵 문제가 강대국 사이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2015년 미국과 영, 불, 독, 러, 중 EU외무장관들이 이란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일 동안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머리를 맞댔다. 이란은 페르시아 제국의 유산을 가진 나라이자 석유라는 강력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이란의 라이벌인 이스라엘은 유대인 파워를 통해 미국을 움직인다. 이런 이유로 이란 핵문제는 많은 국가들이 온 힘을 다해서 반드시 해결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매달리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북핵 문제는 미국의 정책 순위에서 밀린다. 우리에게는 생존의 문제이지만 미국에게는 수많은 국제 현안 가운데 하나뿐이다. 북핵은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주로 다룬다. 북한 문제에서 미국 정부 기관이 그렇게 정교하게 손발을 맞추는 것도 아니다. 9.19 합의 좌초의 원인이 된 BDA 북한 계좌 동결 건도 미국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재무부 등이 따로 놀면서 악화된 측면이 있다. 결국 속이 타는 것은 한국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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