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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리포트] 가야 최대 고분 다시 열리나…'환두대도' 품은 금림왕릉

유네스코세계유산 고령 지산동 고분군 맨 꼭대기에 초대형 무덤, 지산동 5호분이 자리했습니다.

구릉 아래로 국내 대표 순장 무덤인 44호와 45호분이 이웃했습니다.

44호와 45호분의 다음 시기인 6세기 전반에 조성된 걸로 추정되는데 한눈에 봐도 두 고분보다 훨씬 큽니다.

봉분 지름은 가야권 고분 최대인 47미터, 경주 천마총과 같지만, 구릉 정상에 버티고 있어 위용이 더합니다.

[정동락/대가야 박물관장 : 대가야 시대에 고분을 만드는 토목 기술의 최정점에 위치하고 있는 무덤으로, 왕릉급의 무덤이라고 하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고령 사람들이 대대로 부른 이름은 금림왕릉, 조선 시대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대가야 대표 무덤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 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고적연구회가 발굴 조사를 벌였는데 기대했던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를 찾지 못해 보고서 한 줄 나오지 않은 도굴 수준 발굴이었습니다.

하지만, 무덤 일부만 발굴했는데도 용 장식의 금동제 화살통과 도깨비 문양 허리띠, 대가야 양식 토기 등 대가야 최전성기 화려한 유물이 쏟아졌고 그 백미는 고리자루 큰 칼, 환두대도였습니다.

둥근 고리, 이른바 환두 안에 들어찬 용의 머리는 입으로 불을 내뿜는 듯 생동감이 넘칩니다.

고리 표면엔 꽃 장식을 둘렀고, 손잡이 양쪽 끝에는 거북 등 모양 육각형들을 만들어 봉황을 새겨 넣었습니다.

같은 시기 유물인 백제 무령왕릉 환두대도와 닮았는데 이 때문에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는 추론이 한동안 제기됐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경남 합천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대가야 칼을 분석한 결과 무령왕릉 칼은 일체형인 반면 옥전과 금림왕릉은 환두와 내부 장식을 따로 만들어 붙이는 대가야 독자 기술을 쓴 걸로 확인됐습니다.

[김도영/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 외환(고리)과 환내 장식을 따로 만들어 결합하는 방식 이런 것들은 합천 옥전고분군이랑 동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역시 대가야의 칼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령왕릉 칼에 비해 환두와 손잡이 양 끝 부분이 두껍고 황금빛도 더 선명합니다.

도금한 무령왕릉 칼과 달리 금판을 두껍게 둘렀기 때문입니다.

분석 결과 금의 순도는 93% 안팎, 신라 금관을 웃도는 사실상 순금 덩어리인 셈입니다.

[전효수/국립청주박물관 학예사 : 도금의 경우 금의 양이 거의 마이크로 단위 0.0mm, 두께가 굉장히 얇다고 보시면 되고요. 도금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금이 들어 갔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진작에 재발굴을 해야 했지만 해방 이후 가야사 연구가 계속 정체돼 관심 밖에 머물렀고 무덤 앞에는 제대로 된 안내판 하나 없는 실정입니다.

[박천수/경북대 박물관장 : 대가야뿐 아니라 가야 전체에서 가야의 위상이 신라라든지 백제에 비해 어떠했는지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여기에 내포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취재 : TBC 박철희 / 영상취재 : TBC 이상호 / 영상편집 : 이승진 / CG : TBC 김유진 / 사진제공 : 대가야박물관 · 경북대 / 화면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 보존과학' 16집 / 제작 : 디지털뉴스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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