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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간을 머금은 그들에게 《또 못 버린 물건들》[북적북적]

나의 시간을 머금은 그들에게 《또 못 버린 물건들》[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98: 나의 시간을 머금은 그들에게 《또 못 버린 물건들》

내 물건들이 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서늘해졌습니다. 어느새 가을이 되었어요. 지나고 보면, 늘 시간은 빛보다도 빠르게 가버린 느낌입니다. 항상 느끼게 되는 기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 새삼스러운 충격은 번번이 익숙해지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럴 때 어루만지면서 읽기에 안성맞춤인 책을 오늘의 북적북적에서 함께 읽습니다. 따로 소개가 필요없는 작가가 썼습니다. 은희경 소설가가 여름의 끝, 지난 8월말에 선보인 12년만의 산문집 [또—못 버린 물건들]입니다.
 
빛바랜 틴 케이스에 들어 있던 귀고리를 달아보려다 귓불이 막힌 걸 알았을 때는 멋진 액세서리를 찾아다니던 시절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러갔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을 찾고 원하는지. 어떤 순간에 다정하고 또 즐거운지.

그뿐 아니다. 내 일상 속 물건들에서 새삼 나의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을 발견하고, 게다가 그 물건들이 내가 쓴 소설 곳곳에 등장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뜨끔함이란! 내 물건이 등장하는 소설 속의 문구가 떠오를 때마다 혼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 글을 쓰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사적인 감정이 작용한 셈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볍고 단순해지려는 욕심이 있었다. 무겁고 복잡한 사람이라면 한번쯤 생각해봤을 것이다. 때로 그 가벼움과 단순함이, 마치 어느 잠 안 오는 새벽 창문을 열었을 때의 서늘한 공기처럼, 삶이 우리의 정면에만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는 것을. 신념을 구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일상이 지속된다는 것이야말로 새삼스럽고도 소중한 일임을.


물건을 잘 버리는 편이세요? 저는 전보다는 좀 '잘' 버리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쓰지 않는 물건은 웬만하면 눈을 질끈 감고 바로 처분(하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하지만 도저히 바로 버려지지 않는 물건들은? 저는 '명예의 전당'이라고 부르고 있는 커다란 트렁크에 모아둡니다. 결혼할 때 '함'으로 쓰자고 함께 가서 샀던 트렁크입니다. 함으로 이용했고, 신혼여행에도 들고 갔고, 이후로도 여기저기 많이 들고 다니다가, 지퍼도 한 번 고쳐서 썼습니다. 그 트렁크 자체가 저로서는 버리기 힘든 물건인데, 거기에 차마 버릴 수 없다고 판단한 것들을 일단 쑤셔넣습니다.

거의 해질 때까지 입고 취재현장을 쏘다녔던 옷 몇 벌도 들어갔고, 아빠의 빈소로 허겁지겁 달려갈 때 입었던 누런 패딩도 들어가 있습니다. 검은 옷을 입어야 사흘상을 치르고 장지에 갈 때 검은 옷을 입고 갈 수 있다는 것 같은 건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둘렀다가 그대로 장지까지 입고 가버렸던 누런 패딩. 이후로 왠지 다시 그 옷을 입을 수 없어서 한참을 가지고만 있다가 결국 '명예의 전당'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소중한 여름 휴가 때마다 1순위로 가방에 챙겨 넣었던, 제게는 몇 년 동안 여행의 상징 같았던 티셔츠 같은 것들도 들어 있습니다. 주로 옷 얘기만 했지만, 아무튼 이런저런 물건들을 넣어둔 트렁크입니다. "이건 안 되겠어. 명예의 전당이야."라고 말하면, 이제 가족들도 "좀 버려라." 말리지 않습니다. 말려봤자, 라는 걸 아는 겁니다.

사실 그 트렁크에 한꺼번에 우겨 넣어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물건들은 일종의 단계를 거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버릴 수 있도록, 그들이 제게 가졌던 그토록 특별한 하나하나의 고유한 의미들이 그 안에서 뒤엉켜서 조금쯤 희석되는 느낌입니다. 그런 시기를 일단 함께 해야지만 버릴 수 있는 물건들. 혹은 앞으로도, 또ㅡ 버리지 못할 물건들. 우리 모두 갖고 있을 겁니다.

은희경 작가가 자신의 그런 물건들, '가장 나종 지니일' 물건들을 고백했습니다. 책 디자인이 재밌습니다. '또'라고 써놓고요. 그 옆에 옆줄을 길ㅡ게 그었습니다. 그냥 '또'가 아닌 겁니다. 또, 하고는 말꼬리가 늘어졌다가 돌아와서, 못 버린 물건들.

'결국 못버린 물건들'이라고 말해 버리면 너무 무겁고 단정적이지만, '또ㅡ' 말꼬리를 늘였다가 '못 버린 물건'이라고 말을 맺으면, 조금은 더 산뜻하고 안심되게 '그래, 이번 한 번만 더 서랍에 집어넣자' 하는 느낌이 됩니다. 이 산뜻하고, 무겁지 않으면서도, 엄연하며 애틋한 말늘임표야말로 은희경 작가가 지금까지 써온 글들과 상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은 노인의 집을 그 상태 그대로 대행회사가 인계받아 누구든 들어가서 집주인이 생전에 쓰던 물건을 헐값에 사가도록 하는 그런 장소에 가보면 약병과 휠체어는 물론 앨범이나 편지뭉치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런 곳에서 나는 나무로 만든 골동품 스키와 유대 촛대와 맞춤양복점의 전화번호가 새겨진 무거운 옷걸이 등을 구경하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곤 했다. 어느 집에서인가 '1946년 사라, 결혼식에서'라고 적힌 빛바랜 흑백사진을 왠지 모르게 주머니에 넣었는데, 몇 년 뒤 그것이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이란 단편소설이 되어주기도 했다.

이 산문집은 제목 그대로, 은희경 작가가 여전히 쓰고 있는, 혹은 버리지 못한…살아오며 접했고 모았고 간직하고 있는 자신의 물건들에 대해서 쓰고 있는 글들을 묶었습니다. (정확히는 '물건'들과 자신의 고양이에게 바치는 사랑의 송가 한 편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모든 에세이에서 그동안 본인이 썼던 작품이나 구절 중의 일부분을 다시 인용하고 되짚어보는 형식적인 통일도 조금 엿보입니다.

이 책을 처음 열어 몇 편을 읽었을 때, 저도 모르게 '아… 참 잘 쓴다.' 혼잣말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건방지죠? 하지만 저 혼자 읽다가 저도 모르게 뱉은 혼잣말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써낸 느낌이 절실한 아마추어 작가들의 글을 [북적북적]에서 읽는 것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다만,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만의 그 (인이 박였다고 할 정도로 몸에 밴) '프로로서의 기준'이 가볍게 써 내려간 듯한 산문 모음에서조차 꽉 찬 한 권의 책으로 뭉쳐져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밑도 끝도 없이 '역시 다르네'라고 중얼거리게 되더라고요.
 
얼마 전 나는 모임에 나가서 술을 많이 마셨다. 팬데믹 이후 오랜만이어서 그랬는지 기분 좋은 모임은 아니었다. 익숙했던 사람들이 낯설고 나 혼자만 그들의 화제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제풀에 외로워져서 과음을 했던 것 같다. 집에 돌아와 혼자 몇 잔을 더 마시고 취한 채 잠들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내 손가락에 엄마의 유품인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술김에 그 반지를 찾아 끼고 잔 모양이었다.

사실 저는 이 책을 통해 은희경 작가의 글을 좀 오랜만에 다시 접한 편입니다. 자신의 소중한 물건들에 대해 쓰고 있는 은희경 작가의 글들이 참으로 여전해서 반가웠습니다. 여전히 날카롭게 솔직하고, 쓸데없이 타협하지 않는다는 느낌. 그러면서도 문득, 읽는 이의 마음 가장 깊숙한 곳을 울리는 애틋한 감정들이 절로 전해져 옵니다. 은 작가 스스로 이 산문집 안에서 자신의 글이 '특유의 냉소'로 알려져 있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저는 사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됐던 적이 없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런 얘길 한 적이 있더라고요. 당신 글은 너무 쿨한 거 아니냐는 말을 듣는데, 쿨한 인간은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하루키의 글에서나, 은희경의 글에서나... 이 서늘한 듯한 표면 온도 밑에 '이 사람은 글로 나아올 수 밖에 없었겠구나' 깨닫게 만드는 무언가가 끓고 있습니다. '당신을 나는 믿고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여전히 끓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 서늘한 표면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군요.'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 '문심'이 이 산문집에서조차 참으로 엄연합니다.
 
그 반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부동반 외국 여행을 갔을 때 아빠가 선물한 것이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된 첫해였으니 얼마나 오래된 물건인지 알 수 있다. 금은방에 가져가 세척을 해봤지만 낡은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만큼 엄마가 많이 끼었던 반지이기도 하다. 링의 절단 부분은 손가락이 잘 붓는 엄마가 크기를 조절하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이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 아끼던 패물을 다 팔아 썼지만 그 반지만은 끝까지 갖고 있어서 유품이 되었다.

손이 예쁘다고 자랑하곤 했던 엄마와 달리 나는 손이 투박한 한편으로 손가락이 잘 붓는 엄마의 체질은 또 물려받은 터라 반지를 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반지는 가끔 낀다. 주로 잠들기 전에. 잠이 안 올 때, 더 강해지고 싶은 때, 외로움 따위는 인간의 천분이라고 나를 설득하면서.


오늘의 낭독에서는 (그저) 오늘의 제 생각에 은희경 작가다운 그 '뜨겁게 서늘한 문심'이 더욱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두 편을 골라봤습니다. 다른 날에 읽으면 다른 편들이 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어루만지며 읽고 싶은 책 '통째'를 [북적북적] 가족 분들도 낭독 들으시고 나서 직접 만나봐 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이 시간에 북적북적과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북적북적도, 또ㅡ 떠날 수 없는 친구로 계속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난다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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