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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어느 루저 이야기: "킴스 비디오"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85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루저(loser)’라는 표현이 곧잘 쓰인다. 과거에는 패자에 대해 지나치게 가혹하게 구는 태도는 오히려 반감을 사거나 인정머리 없는 행위로 여겨졌다. 그런데 영미권에서 온 ‘루저’ 개념이 한국 사회에 슬쩍 퍼지더니 패배자를 깔보고 조롱하는 걸 당연시하는 문화가 일부에 퍼져있는 듯하다.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인 입시 경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한창 친구들과 뛰놀아야 할 유년기부터 인생을 건 입시 경주를 10년 이상 펼친 젊은 세대가 성적과 서열에 민감해지고, 이것이 결국 공정과 차별 이슈를 과거와는 다른 각도에서 인식하게 하는 현상도 어느 정도는 루저 문화와 영향을 주고 받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접하는 ‘루저’는 표현은 단순히 ‘위너’의 반대말이 아니라  (인생의) 패배자, 낙오자, 인간 쓰레기, 잉여 인간 같은 뜻으로 쓰일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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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냥 잊혀지고 싶습니다. 저는 루저입니다." (I just want to be forgotten. I am a loser.)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중간쯤 있는 영화 “킴스 비디오”의 진짜 주인공인 김용만 씨가 십여 년 전 뉴욕타임즈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며 한 말이다. 

영화는 길 가는 뉴요커들에게 “두 유 노 킴스 비디오?(Do you know Kim’s Video)”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모른다는 반응도 있고, 저 길가에 있었는데 언젠가 사라진 것 같다는 대답도 있다. 왜 사라졌을까라고 묻는 질문엔 요즘 세상에 누가 비디오를 빌려 보냐는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온다.

도대체 ‘킴스 비디오’가 뭐길래.


영업 당시의 킴스 비디오 / 오드
‘킴스 비디오’는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영화를 사랑하는 뉴요커들의 성지였다. 짐 자무쉬, 쿠엔틴 타란티노, 이안, 코엔 형제 같은 명감독들도 찾아와 구하기 힘든 비디오를 빌려보던 곳이었고, ‘킴스 비디오에 없으면 다른 어떤 곳에도 없다’고 할 만큼, 5만5천 개의 방대하고 다.양.한. 영화들이 진열대에서 뉴요커들을 기다리고 있는 문화적 명소였다. 

그런 킴스 비디오의 주인이 다름 아닌 한국인이었다. 이십 대에 미국으로 이민 간 군산 출신의 김용만 씨. 뉴욕 이스트빌리지에서 킴스 클리너라는 세탁소를 운영하며 두 동생을 공부시키던 김 씨는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옆집 사는 미 공군 병사의 아내와 친해져 그 집에서 16mm 필름으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수도 없이 봤다. 

미국에 건너와 사업을 하면서도 영화 공부를 계속하던 김 씨는 세탁소가 잘 되자 한켠에 비디오 대여점을 차렸다. 킴스 비디오의 시작이다. 그런데 당시 미국의 대형 비디오 대여점들과는 다르게 킴스 비디오의 정신은 ‘언더그라운드’와 ‘얼터너티브’, ‘인디펜던트’였다.
  
김용만 씨는 각국 대사관과 문화원을 찾아다니며 당시 뉴욕에서도 구하기 힘든 동구권 영화와 중국 등 사회주의권 영화까지 그러 모아 일개 비디오 대여점이 엄두도 못 낼 광범위한 아카이브를 구축해갔다. 이 셀렉션이 소문이 나면서 킴스 비디오는 한때 11개 지점에 30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25만 명의 회원을 거느렸다. 

   킴스 비디오는 보기 힘든 영화를 구해 빌려준다는 미덕을 넘어 영화를 ‘케이터링(catering)’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매장에는 킴스 비디오가 발굴한 새로운 외국 영화를 소개하는 ‘New Acquisition’같은 섹션이 있었다. 심지어 영화에 대해 잘 모르는 손님을 ‘가르치려는’ 문화도 있었다. 

(요즘에는 아주 비싼 돈을 들이지 않으면 이런 식으로 문화 콘텐츠를 ‘오마카세’ 즉 선별, 편집해 주는 곳을 찾기 쉽지 않다. 절대다수의 (서비스) 상품 판매점에서 손님을 응대하는 일선은 대부분 손님이 요청한 상품을 재빠르게 건네주는 단시간 근로자들로 채워져 있고,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자신의 일만 처리하는 것을 최선의 미덕으로 여길 만큼만 보수를 받고 있기 때문에, 전문성이나 편집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다. 대중적 수준에서는 ‘안목’의 가치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안목의 가치가 사라져가기 시작한 시대에, 킴스 비디오도 DVD와 스트리밍 서비스에 밀려 문을 닫는다. 뉴욕타임즈가 김용만 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던 때가 바로 이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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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스 비디오가 문을 닫은 뒤 그 많았던 김 씨의 비디오, 즉 ‘킴스 비디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라는 게 영화 “킴스 비디오” 제작자들의 궁금증이고, 이 영화가 다루는 내용이다. 

2009년 폐업한 킴스 비디오들은 김용만 씨의 뜻에 따라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살레미라는 작은 도시로 옮겨졌다. 살레미 시에서 김 씨의 컬렉션을 잘 보존, 관리하고 공공에도 개방하며 킴스 비디오 회원들은 언제라도 와서 볼 수 있게 한다는 조건에 응하면서 비디오테이프들은 대서양을 건너 마피아의 섬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김 씨는 속았다. “킴스 비디오” 제작진이 살레미 시를 찾아가 보자 킴스 비디오들은 방치된 채 창고에서 썩고 있었다. 영화는 제작진이 그 비디오들을 되찾아 뉴욕으로 몰래 훔쳐오다시피 갖고 와 뉴욕에서 대중에게 공개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다룬다. “킴스 비디오” 감독들의 킴스 비디오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집착(김용만 씨조차 “언빌리버블”이라고 반복한)은 탄복할 만하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의문이 들었다. 이처럼 방대한 양의 아카이브와 팬층을 갖고 있던 킴스 비디오가 왜 아무런 대비책 없이 속절없이 문을 닫아야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비디오의 시대가 가고 DVD의 시대가 왔으며 이어 스트리밍 서비스로 넘어가는 동안 수완 좋은 사업가 김용만 씨는 왜 적당한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내지 못하고 킴스 비디오를 망하게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 것이다. 똑같이 영화 렌트업으로 시작했던 넷플릭스는 지금 세계적인 기업이 돼있는데. 실제로 킴스 비디오가 폐업할 당시 킴스 비디오의 주요 직원들이 넷플릭스로 이직하기도 했다.

기자간담회에서 김용만 씨에게 직접 물어봤다.

“영화에 넷플릭스의 거리 입간판 장면도 잠깐 나오던데, 킴스 비디오 경영자로서 김용만 선생님도 어쩌면 리드 헤이스팅스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김용만 씨의 답이다. 

“당연히 했지요. 아카이브를 디지털로 구축하는 작업을 삼사 년 동안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돈도 많이 들고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회사도 기울었지요. 내 돈 가지고 사업하는 건 한계가 있더군요. 사업은 퍼블릭 머니(public money)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폐업 이후 김용만 씨는 MBA 과정을 밟았다고 한다)


기자간담회에서 포즈를 취한 김용만 씨 ⓒstorydna
킴스 비디오가 넷플릭스가 되지 못한 데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태생적인 이유였고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킴스 비디오는 개인들은 구하기 힘들고 다른 비디오 사업자들은 -수요가 너무 적어-구태여 힘들게 구해서 갖다 놓을 필요가 없는 비디오를 다량 보유하고 있었다. 유통의 경로를 찾지 못하거나 배급사가 출시를 포기한, 예술성과 독창성은 높은데 상업성은 다소 떨어지는 독특한 작품들이 많았다. 

이런 영화들은 각국의 저작권 소유자를 일일이 확인하고 협상하기가 쉽지 않았고, 배급사를 설득해 비디오 출시를 요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한 타이틀 당 오천 개는 찍어야 수익이 났다고 한다) 그러나 킴스 비디오는 당장 법적으로 완벽하기를 추구하기보다는 일단 고객의 취향과 욕구를 만족시키는 라이브러리의 완결성을 지향했다. 중간에 저작권자가 나타나면 계약을 하고 정식으로 비디오를 가져다 놓았다. 

이렇게 구색을 갖추면서 뉴요커, 시네필, 예술가들에게 문화적 빨대가 돼주었으나 이 때문에 변호사들의 수많은 내용증명을 받고,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고발로 FBI의 압수 수색도 수차례 받았다.

저작권 위반 등 불법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당시처럼 저작권 질서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고, 마이너한 영화의 감독들은 자신의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일 통로가 막혀 있고, 관객들은 좋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봉쇄됐을 때는 일단 뜻이 있는 사업자가 유통으로 끌고 가면서 시장 질서를 만들어가는 것 자체를 무조건 비난할 수 만은 없다고 본다. 

(적절한 사례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참고로 덧붙이자면 1995년 개봉한 “러브레터”는 일본 문화 개방 전에는 해적판 비디오로 나돌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의 문화적 감성을 일깨워 주었다. 해적판 외에는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때였다. 세운상가에서 팔던 이른바 ‘빽판’이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기여한 바도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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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스 비디오”가 시네필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은 김용만 씨만큼이나 정신 나간 이 영화의 제작자들, 그리고 영화든 음반이든 원하는 작품을 다 보고 듣기는 어려웠던, 그래서 어렵게 구한 비디오나 음반 하나하나가 더 소중했던 과거에 대한 향수, 킴스 비디오를 부활시켜 다시 뉴욕에 유치한 드라마틱한 스토리 등이 합쳐져서인 듯하다. 

김용만 씨는 결코 루저가 아니었다. 킴스 비디오만큼이나 괴짜인 영화감독이 “킴스 비디오”라는 영화까지 만들었고, 선댄스 영화제를 비롯한 세계 각국 영화제에서 앞다퉈 이 영화를 초청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내년 1월에야 개봉을 한다고 한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열광적인 반응이 나왔고, 김용만 씨가 전주에 이어 개봉을 앞두고 서울 시사회장에 나타나자 작은 탄성이 터졌다. 넷플릭스의 리드 헤이스팅스가 나타났더라도 이런 호응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생은 길게 봐야 한다. 세상의 어떤 소수자에게도 그들만의 존재 이유가 있다. 그들은 루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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