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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대통령실 "반도체 장비 공급 무기한 허용" 따져보니…

[월드리포트] 대통령실 "반도체 장비 공급 무기한 허용" 따져보니…
남의 나라 일에 빠지는 곳이 없는 게 미국입니다. 최근에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충돌로 한동안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중국 내 우리 반도체 업체들에 대한 무기한 장비 반입 허가가 발표됐습니다. 현지 특파원들이 계속 눈 여겨 보고 있던 사안이었는데 미국 상무부가 아닌 우리나라 대통령실에서 먼저 발표가 나왔습니다. 미국의 공식 발표 전에 관련 내용을 우리가 먼저 브리핑하는 건 상당히 이례적입니다.
 

"우리 반도체 기업 최대 통상 현안 일단락"

반도체 현안 관련 브리핑하는 최상목 경제수석 (사진=연합뉴스)
▲ 반도체 현안 관련 브리핑하는 최상목 경제수석

그만큼 우리 정부가 성과로 알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나 대통령실이 직접 나선 걸 보면 말입니다. 최상목 경제수석은 지난 9일 브리핑을 통해 "미국 정부가 최근 수출통제 당국과 NSC, 국가안전보장회의 경제안보대화 채널을 통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내 반도체공장을 미 수출관리 규정에 따른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 Validated End User)로 지정해 앞으로 별도 허가 절차나 기간 제한 없이 미국산 장비를 공급하겠다는 최종 결정을 전해왔다고 말했습니다.

앞서 미국 상무부는 안보 전략 차원에서 중국 반도체 산업의 부상과 기술 절취 등을 막고자 지난해 10월 7일 미국 기업이 중국 반도체 생산 기업에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는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의 중국 현지 공장에 대해 1년간 미 정부에 건별 허가를 신청하지 않고도 장비 수입을 할 수 있도록 예외를 허용한 바 있습니다.

말이 좀 복잡한 데, 쉽게 말해서 지난해 중국에 대한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 조치를 취하면서 우리 기업은 예외적으로 그런 수출 통제 적용을 1년 간 유예했던 겁니다. 만약 이번 조치가 없었다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는 해마다 유예 조치를 다시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우리로서는 작지 않은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VEU는 사전에 승인된 기업에만 지정된 품목에 대해 수출을 허용하는 일종의 포괄적 허가 방식으로 여기에 포함되면 별도로 건별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어 미국의 수출통제 적용이 사실상 무기한 유예되는 의미가 있습니다.
 

미국산 반도체장비 공급 무기한 허용?

한, 미, 삼성, sk하이닉스 반도체

최 수석은 이날 브리핑에서 "이번 결정은 우리 반도체 기업의 최대 통상 현안이 일단락 됐음을 의미한다"며 "우리 반도체 기업의 중국 내 공장 운영과 투자 관련 불확실성이 크게 완화됐고 장기적으로 차분하게 글로벌 경영 전략을 모색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굳건해진 한미동맹 기반 위에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 대응한 결과"라며 미국의 이번 결정이 새 정부 들어 강화된 한미동맹의 성과물이라는 점을 부각시켰습니다.

대통령실의 설명처럼 이번 조치는 한미 간 신뢰가 없었다면 쉽지 않은 조치였던 게 사실입니다. 중국이 수출 통제 등 미국의 강력한 규제를 뚫고 7나노 칩을 생산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 내에서는 의회를 중심으로 강경론이 거셌습니다. 여기에 중국 화웨이의 최신 스마트폰에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칩이 사용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분위기는 더욱 굳어졌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악재 속에서도 일단 ‘기간 제한’을 없앤 건 작지 않은 성과입니다.

하지만 이번 조치의 의미를 냉철히 따져볼 필요는 있습니다. 대통령실의 설명처럼 정말 앞으로는 별도 허가 절차나 기간 제한 없이 미국산 장비를 무제한으로 들여올 수 있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VEU는 정부가 아닌 개별 기업을 상대로 합니다. 따라서 VEU에 올라 간 업체는 지금 허가 받은 사양의 장비에 한해 기간에 관계없이 반입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은 끊임없는 장비 개선이 필요합니다. 수명 주기에 맞춰 제품의 사양을 계속 높이지 못하면 그 공장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번에 VEU를 받았다 해도 2~3년 혹은 4~5년 뒤에는 보다 높은 사양의 장비 반입 허가를 다시 받아야 합니다. 이번에 VEU에 들어갔다고 해서 ‘일단락’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동맹국 기업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되 궁극적으로는 중국에서 질서 있게 철수하도록 하는 게 미국 정부의 속내라는 현지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 VEU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 때문에 마치 이 VEU명단에 우리가 새롭게 들어간 걸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관련 당국과 업계 이야기입니다. 미국은 지난해 강력한 조치를 발표하기 전에도 수출 통제를 시행 중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기업들은 별도로 VEU를 받아 공장을 운영해왔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강화된 수출통제 조치로 VEU에 1년이란 시한이 부과됐고 연장이나 별다른 추가 조치가 없으면 영업이 어려워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고비는 넘겼지만…


이번 조치는 그런 VEU에 부과됐던 시한을 없애는 것으로 어찌 보면 기업 입장에선 전에 하던 대로 할 수 있게 됐다는 뜻입니다. 강력한 통제가 부과되는 상황에서 우리 기업들만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점은 확실히 한미 간 공고한 상호 이해가 바탕이 됐다고 할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전에 없던 혜택이 부과된 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또 대통령실 설명처럼 우리 기업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생산의 60.5%를 차지하는 핵심 공급자이자 장비 수요자로서 우리 기업들의 안정적 생산은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 안정과 직결돼 있습니다. 미국도 꼭 우리가 예뻐서 그렇게 한 건 아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일단 이번 조치로 고비는 넘긴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타국의 선의에만 기대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습니다. 국민을 안심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의 대비가 더 중요합니다. 미국의 수출 통제가 장기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출구 전략을 마련해야 하고 그게 아니라면 앞으로도 흔들림 없는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튼튼한 안전판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지금 정부와 우리 기업들이 힘 모아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합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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