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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여행하는 삶과 머무는 삶…"여덟 개의 산"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83

동화약품 2021년 4월 신문 광고
  지금도 팔리고 있는 한국 최초의 소화제 ‘활명수’를 만드는 동화약품에서 코로나 기간 동안 여행 관련 광고 캠페인을 펼쳤다. 세계 곳곳의 여행지 사진을 크게 싣고 여행 격언을 적어 놓았는데, 여행은 물론 외출도 조심스럽던 시절, 신문을 보다 이 광고가 나오면 한참을 쳐다보고는 했다. 

격언 중에는 ‘여행과 장소의 변화는 정신에 활력을 준다’는 세네카의 말도 있었고, ‘여러 곳을 여행한 자만이 지혜롭다’는 아이슬란드 속담이 나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칸트같은 천재는 죽을 때까지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고 정주(定住)했다. 그는 여행을 하지 않았지만 철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뤄낸 위대한 지성이다. 나는 종종 여행의 의미를 생각할 때 칸트를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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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영화는 줄거리가 복잡하고 구성도 치밀한데 극장 문을 나설 때 건질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떤 영화는 그 반대다. “여덟 개의 산”이 바로 그런 영화다. 이탈리아 알프스의 고즈넉한 고산(高山)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단순한 줄거리와 구성을 가졌지만 사색의 보고(寶庫)다. 친구, 우정, 아버지, 집, 언어, 산, 인간, 질투 그리고 여행 등등, 이 영화가 다루는 주제의  진폭은 알프스의 봉우리처럼 높고, 계곡처럼 깊다.

  주인공 브루노는 산에서 태어나 산에서 자랐다. 또 한 명의 주인공 피에트로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여름을 보내러 산골 마을에 왔다가 브루노를 만난다. 브루노의 아버지는 떠돌이 벽돌공이고, 피에트로의 아버지는 대기업의 엔지니어. 

극과 극은 통한다고, 11살 동갑내기 소년들은 친구가 된다. 20년 우정의 시작이었다.

자주 보지 못한 채 머리가 굵어지면 서먹해지기 마련, 한동안 소식이 끊긴 뒤 읍내 카페에서 잠깐 조우했지만 서로 어색한 눈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던 두 청소년은 피에트로 아버지의 장례를 계기로 청년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된다. 

영화 "여덟 개의 산"의 주인공 브루노(왼쪽)와 피에트로 / 영화사 진진
이제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산 사나이가 된 브루노는 세상을 떠난 피에트로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레논산 중턱에 돌집을 짓겠다며 피에트로에게 도와 달라고 한다. 함께 집을 지으며 다시 우정을 쌓아가는 두 청년. 

하지만 소 젖을 짜서 치즈를 만들며 산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자칭 ‘일부는 사람, 일부는 동물, 일부는 나무’인 브루노와, 작가를 꿈꾸며 어느 곳에도 머물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피에트로는 서로 다른 인생행로와 가치관 속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며 각자의 인생길을 걸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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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 여행을 다녀온 피에트로가 브루노에 말을 건넨다.

피에트로: 네팔에 갔을 때 누가 날 붙잡고 묻는 거야. “여덟 개의 산을 여행하세요?” 
그리고 종이를 꺼내서 그림을 그리는 거야. 
이게 세상인데 세상엔 여덟 개의 산과 바다가 있대. 
그리고 그 중심엔 커다란 산이 있어. 수미산이지. 

피에트로: 문제는, 누가 더 많이 배울까? 
여덟 개의 산과 바다를 여행한 사람과 수미산에 오른 사람 중에 말이야. 

브루노: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산 정상에 오른 사람이고, 너는 여덟 개를 여행한…누가 이길까?

피에트로: 내가 이기지. 항상 내가 이기지.
(웃음)

영화 "화양연화" 중 양조위의 머리 뒤로 수미산을 상징하는 앙코르와트의 중앙 탑이 보인다
'수메루(Sumeru)', 즉 수미산은 힌두교와 불교의 세계관에서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알려져 있는 산이다. “화양연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양조위가 걸어 나오던 앙코르와트의 가장 높은 중앙탑이 바로 수미산을 상징한다. 또 다큐멘터리 영화 “메루(2015)”에 나오는, 셰르파 동반도 불가능하고 험난하기 짝이 없어 에베레스트보다 오르기 어렵다는 히말라야 6000미터 봉우리로, 현지인들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는 산 이름도 메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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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트로와 달리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브루노지만 알건 다 안다. 아니, 어쩌면 브루노가 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진짜 알아야 할 것들일지도 모른다. 그는 손수 소젖을 짜서 치즈를 만들고, 나무와 돌만 있으면 집을 지을 수 있다. 작은 계곡에 조그만 물레방아를 설치해서 전기도 생산한다. 자신만의 수미산에 사는 브루노는 다른 삶은 상상하지 않는다. 산에 정주하는 삶을 고수한다. 

산에 돌집을 짓고 있는 '정주자' 브루노 / 영화사 진진
어느 날 피에트로의 친구들이 산 중턱의 돌집에 놀러와 “도시 친구들을 불러서 이런 대자연에 생태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고 하자 브루노는 이렇게 쏘아붙인다.

- 도시인들만 이걸 자연이라 부르죠. 마음이 추상적이니까 말도 추상적인 거예요. 
- 여기선 뭐라고 부르는데요?
- 우리는 그냥 숲, 방목장, 강, 바위, 오솔길이라고 불러요. 손으로 가리킬 수 있고 쓸 수 있는 것들요.


개념화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우리는 추상이 구체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론은 실천에 비해 성긴 데가 많다. 아니면 너무 완벽해 쓸모없거나. 

  피에트로는 요리사로, 작가로 도시에서 일하다 때때로 네팔에 다녀오는 여행자의 삶을 산다.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면서 겸손해졌을까? 이해심과 배려심이 깊어 보이는 피에트로. 하지만 그에게도 아픔이 있다. 

아버지와 불화로 10년 동안 소통이 단절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는 피에트로에게 다큐멘터리를 찍거나 글 쓰고 여행하는 대신 공부에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평생 일을 쉰 적이 없고 여름에 짧게 그레논산을 찾곤 했던 피에트로의 아버지는 피에트로와 대화가 단절되자 아들 대신 브루노와 산을 오르며 슬픔을 달랬다. 

네팔을 여행하는 피에트로 / 영화사 진진
생전의 아버지가 브루노에게 지어달라고 했던 산 중턱 돌집을 브루노와 함께 쌓아 올리며 피에트로는 생각한다.

‘25살의 브루노가 나 대신 내 아버지와 함께 보낸 밤들을 상상해 봤다. 내가 안 떠났다면 그런 일은 없었겠지. 나도 그 순간을 함께 했거나. 가장 중요한 걸 놓친 기분이었다. 이제 기억도 희미한 시답잖은 일들로 바빠서’

피에트로는 이전의 자신이 싫었다. 그래서 방황하는 여행자의 삶을 살았다.

“난 변하고 진화하고 멀리 떠나서 더 새로운 피에트로가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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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트로는 마침내 책도 한 권 내고 마음에 드는 곳도 발견했다. 네팔에서 여자 친구를 만난 것이다. 

반면, 무학이지만 영리하고 생활력도 강한 브루노는 세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연인’으로서 삶만 고집하다 농장 사업에 실패한다. 아내와 딸은 그를 떠난다. 아내는 피에트로에게 말한다.  브루노는 자신과 딸보다 산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사랑은 천천히 시들지만 단번에 죽기도 한다고. 

누가 이긴 걸까? 여덟 개의 산과 바다를 여행한 사람과 수미산에 오른 사람 중에.

간디가 말했다. “가장 위대한 여행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여행이다.” 

산사람 브루노는 폭설이 내린 어느 겨울날 혼자서 홀연히 하.늘.에. 묻.힌.다. (영화를 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언젠가 네팔에 다녀온 피에트로가 그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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