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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히어로 장르의 재해석…'무빙'의 이유있는 신드롬

[빅픽처] 히어로 장르의 재해석…'무빙'의 이유있는 신드롬
역대 최고의 히어로 무비로 꼽히는 '스파이더맨'을 관통하는 하나의 대사가 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삼촌 벤이 해준 이 조언은 훗날 스파이더맨으로 살아가는 피터 파커에게 좌우명과 같은 말이 된다. 이 말은 '특별한 힘을 가졌다면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힘을 쓸 책임을 외면하면 더 큰 재앙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남과 다르다'는 것은 '특이하다' 혹은 '특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와 드라마 등 미디어에서 그린 히어로들의 삶은 대체로 화려했다. 출발-입문-시련-귀환-각성-성장으로 이어지는 영웅 서사의 공식을 따르지만 그 끝은 창대하게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들이 현실 사회에서 평범한 우리들과 섞여있다면?'이라는 가정을 해본다면, 히어로의 그 특별함이 축복만은 아닐 것이다.

'무빙'은 이 점에 주목한다. 히어로라고 해서 모두 멋진 것만은 아니고, 히어로라고 해서 삶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여러 캐릭터와 풍성한 서사를 통해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 속 인물들에게도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 통용될 수 있다. 원하지 않았으나, 그렇게 태어나버린 신체 능력자들에게 현실은 자꾸 태클을 걸고 숙제를 부여한다. 심지어 재능인지 재앙인지도 모를 능력이 자식에게도 유전된다.

그래서 이들에게 '책임'은 조금은 다른 의미다. 남편이자 아내로서의 책임, 아버지이자 어머니로서의 책임이 사회 정의보다 더 우선되게 작용하기도 한다. '내 여자', '내 새끼' 앞에서 거창한 대의는 큰 힘이 없다.

'무빙'은, 아니 강풀 작가는 오늘도 내 사람, 내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응원할게 너."
무빙

◆ 한국형 히어로물 '무빙'…무엇이 달랐나?

'무빙'은 초능력을 숨긴 채 현재를 살아가는 아이들과, 과거의 아픈 비밀을 숨긴 채 살아온 부모들이 시대와 세대를 넘어 닥치는 거대한 위험에 함께 맞서는 초능력 액션 히어로물이다.

강풀 작가의 종전 작품처럼 우리네 평범한 이웃이 주인공이다. "히어로는 있지만 슈퍼 히어로는 없다"는 작가의 말은 캐릭터들의 면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치킨집을 운영하는 장주원(류승룡)은 재생능력, 돈가스 장사를 하는 이미현(한효주)은 반사신경과 오감, 사라진 국정원 요원 김두식(조인성)은 비행능력,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이재만(김성균)은 괴력과 스피드를 가진 초인이다. 남다른 능력은 자식 세대에게까지 대물림되고 이들의 2세인 봉석(이정하)과 희수(고윤정), 강훈(김도훈)이 정원고등학교에서 만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서구에서 흥한 장르물을 국내에서 시도할 때 '한국형 ○○○'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 수식어는 '하위 호환' 버전으로 통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무빙'에는 한국형이라서 감안하고 봐야 하는 아쉬움이 거의 없다. 한국화된 이미지와 구성으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히어물의 비현실성은 탄탄한 서사를 통해 보편성의 날개를 달았고 세대, 국적, 인종에 관계없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히어로물의 클리셰를 깬 역발상이 이야기의 흥미를 높였다. '무빙'에서 초능력은 축복보다는 재앙에 가깝게 묘사된다. 초능력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신분도 처지도 평범 혹은 그 이하다.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에 특출난 능력은 위험요소다. 때문에 몇몇 인물들은 소외의 대상이 되기를 자처한다.

놀라운 재생 능력을 가진 주원은 어둠의 조직에서 빠져나와 자해 교통사고로 생계를 꾸려간다. 모텔에서 달방 살이를 하며 월세 걱정을 한다. 두식과 미현의 아들 봉석은 비행 능력을 숨기기 위해 아령이 등 가방을 메고, 모래주머니를 찬 채 등교한다. 또한 자신의 특별한 능력이 알려질까 자발적 왕따가 된다.

'초능력은 유전된다'는 설정은 '무빙'의 가장 흥미로운 설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해지려고 애쓰지만 '무빙'의 히어로들은 평범해보이려고 노력한다. 당연하게도 세상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들은 가만두지 않는다. 앞서 두식, 주원, 미현의 쓸모를 확인한 안기부는 이들의 2세들을 대상으로 한 NTDP(국가인재육성사업)를 가동시키려 한다.

히어로물에는 빌런이 있기 마련이다. '무빙'의 빌런은 남북 분단의 현실과 안기부(국정원)라는 조직이다. 이 역시 매우 한국적인 설정이다. '무빙'은 남북 분열, KAL기 폭파 사건, 범죄와의 전쟁, 김일성 사망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서사와 결합해 설득력을 높였다.

◆ '웹툰 시조새' 강풀, 각본가로…20부작에 걸친 빌드업

이 드라마의 성공비결로는 원작의 힘과 연출력 그리고 배우들의 열연이 꼽힌다.

원작자인 강풀은 전체 대본을 직접 집필하며 작품을 성공으로 이끈 일등공신이다.

'순정만화', '바보', '아파트', '26년' 등 강풀의 인기 웹툰은 여러 차례 영화화됐지만 박한 평가를 받았다. 원작의 정수를 살리지 못했던 각본의 실패였다. 강풀은 이번에 직접 펜을 들었다.

이야기를 만들고, 캐릭터와 세계관을 창조한 인물이 각본에 참여한 덕분에 방대한 이야기는 여러 줄기로 뻗어 나갔고, 그 줄기들은 각기 다른 색깔과 모양으로 '재미'라는 열매를 맺었다.

사실상 주인공이 9명인 '무빙'은 어떤 작품보다 '캐릭터 빌드업'이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각 회차마다 주인공이 다른 에피소드 구성을 띠지만 종국에는 한데 어우러질 수밖에 없는 구조의 이야기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을 띠고, 부모세대의 일이 자식세대에도 영향을 끼치는 이야기기에 캐릭터의 개별 서사를 깊이 있게 다루는 게 중요한 작업이다. 이는 강풀 작가와 제작진이 20부작이라는 '마라톤 회차'를 고집한 이유이기도 했다.

강풀은 원작의 정수를 살리면서도 드라마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추가했다. 남북 초능력자들의 대결에 미국이 관여했다는 설정까지 새롭게 추가하며 이야기의 범위도 확장했다. 그러면서 원작에는 없던 프랭크(류승범)와 전계도(차태현)라는 새로운 캐릭터도 만들어냈다.

방대한 이야기와 다양한 인물을 다뤘기에 장르적으로는 혼합 구성이다. 자식 세대인 봉석과 희수가 이끌어가는 1~7화는 청춘 드라마에 가깝고, 부모 세대의 미현과 두식의 만남과 이별을 그린 8~9화는 로맨스물이며, 주원의 전사와 로맨스를 그린 10~13화는 범죄 누아르에 가깝다. 재만의 이야기를 다룬 14화는 가족극, 15화부터 마지막화까지는 부모세대와 자식세대의 초능력자들이 힘을 모아 북한과 결전을 벌이는 히어로물의 클라이맥스였다.

장르가 혼합되면 전체적인 완성도가 흔들리기 마련이지만, '무빙'은 탄탄한 각본과 노련한 연출로 무게 중심을 후반까지도 잘 잡아냈다.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에서는 '지구 수호'와 '우주 평화'같은 거창한 대의가 히어로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그러나 '무빙'에서는 '영웅주의'가 아닌 '가족주의'가 극전반을 관통한다.

7회까지 빌런 역할을 했던 프랭크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식의 존재를 밝히지 않는 국정원 전 요원들을 보며 "당신들은 자식들을 숨기려고 해, 와이(Why)?"라고 궁금해한다. 19화에서 미현은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는 괴물도 될 수 있어"라고 말한다. 이는 프랭크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이 드라마가 선택한 엔딩도 '가족의 완성'이었다.
무빙

◆ 조인성-류승룡의 로맨티시즘…히어로물과 만난 멜로

멀티 캐스팅이 영화계와 방송가에 자리매김한 지 오래지만, '무빙' 만큼 여러 배우를 효율적으로 사용한 경우는 드물다. 신예와 톱배우의 조화가 인상적이다. 여기에 류승범, 양동근 등 (등장만으로도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연기를 한 신스틸러들의 활약도 인상적이었다.

'무빙'의 스토리는 하나의 큰 흐름이지만 에피소드별 구성이라 매회 주인공이 바뀐다고 볼 수 있다.

봉석과 희수의 로맨스를 그린 7화까지의 이야기는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럽다. 8화부터 시작되는 미현과 두식, 주원과 지희의 이른바 '어른 서사'는 그 깊이와 여운이 짙다. 특히 이 에피소드들에서 조인성과 류승룡의 진가가 200% 발휘됐다.

영웅과 괴물 사이에 놓인 이들은 일종의 '경계인'이다. 어디에도 쉽게 뿌리내리지 못하는 '소외인'들이기도 하다. '무빙'은 이들을 사랑의 힘과 가족의 울타리로 따뜻하게 보듬는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기적 같은 순간을 그려낸 낭만적 연출도 인상적이다. 두식과 미현의 로맨스를 다룬 8~9화가 대표적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멜로 배우' 조인성의 힘이 빛을 발한다. 큰 키에 잘생긴 얼굴, 원칙주의 정의의 사도로 요약할 수 있는 캐릭터는 멜로의 클래식이자 클리셰에 가깝다. 그러나 조인성이라는 배우와 결합하자 그 시너지가 폭발했다.

조인성은 데뷔 초부터 여심을 사로잡는 로맨스 장르에서 특출 난 역량을 발휘했던 배우였다. 깊은 눈빛과 따뜻한 목소리, 하늘을 나는 우아한 몸짓까지, 잊고 있었던 조인성의 매력이 제대로 발휘됐다. 18화에서는 근사한 비행 액션을 선보이며 후반부 가장 박력넘치는 액션 장면까지 만들어냈다. 결국 그는 분량을 능가하는 존재감과 매력으로 '무빙'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두식과 미현의 로맨스가 '순정 만화' 속 판타지라면, 주원과 지희의 로맨스는 '조폭물'에서 흔히 등장하는 클리셰로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무협지는 멜로"라고 주장한 주원의 말처럼 투박함 속에서 드러나는 진심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류승룡과 곽선영은 닮은 듯 다른 주원과 지희가 서로를 물들이고, 스며드는 사랑을 노련한 연기로 완성해 냈다.

류승룡의 진가는 13화 엔딩에서 발휘된다. 세상 가장 슬픈 순간을 갓 태어난 아기의 첫 울음처럼 표현해낸 연기는 압권이었다. 남자가 부성(父性)으로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겠다고 각성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류승룡의 진실된 연기로 완성된 명장면이었다.
무빙

◆ 강풀 드라마틱 유니버스 시작…한국판 '어벤져스', 꿈 아니다

'무빙'은 웹툰 작가 강풀이 2015년 발표한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초능력 세계관을 공유하는 '강풀 유니버스' 6개 작품 중 하나다.

한국 드라마 역사상 최고 제작비인 650억 원이 투입됐다. OTT 제작 시스템에서는 이례적으로 긴 분량(20부작)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회차별 공정에 상당한시간과 돈, 노력이 투입됐다. 이 작품의 성공은 단발성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강풀은 '무빙'에 앞서 시간능력자들의 이야기인 '타이밍'을 선보였고, '무빙'의 성공 이후 초능력자와 시간능력자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브릿지'를 연재했다. '무빙'의 속편이 나온다면 프리퀄 격인 '타이밍'과 시퀄격인 '브릿지'가 영상화 될 것으로 예상된다.

16화에는 '타이밍'의 주인공인 김영탁을 등장시켜 속편에 대한 암시를 했다. 비록 얼굴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핑거 스냅으로 시간을 멈추는 그의 특별한 능력을 짧게나마 묘사해 시청자들의 시선을 모았다.

또한 쿠키 영상을 통해 사건의 새로운 서막을 암시했고, 귀환한 인물의 등장을 알렸다.

방대한 세계관과 다양한 캐릭터, 한국적 감성으로 무장한 강풀의 초능력 시리즈는 '한국판 어벤져스'로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

'무빙'이 쏘아 올린 한국형 히어로물의 성공 신화는 이제 시작이다.

김지혜 기자   

(SBS연예뉴스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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