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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술은 우리를 보다 나은 세상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 [SDF다이어리]

새로운 기술은 우리를 보다 나은 세상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 [SDF다이어리]
19세기 말 미국이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넘어가던 시기, 석유는 미국 산업화의 동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석유 정련 기술이 개발되고 석유 매장지가 발견되기 시작하자 부는 모두에게 돌아가기보다는 재빠르게 소수 트러스트 [1]에 독점되고 남용되기 시작했습니다.
[1] 트러스트: 같은 업종의 기업이 경쟁을 피하고 보다 많은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자본에 의하여 결합한 독점 형태

채유탑 오클라호마, 1922, 미국 국립 아카이브
▶ 채유탑, 미국 오클라호마, 1922, 국립아카이브

이러한 움직임에 제동을 건 것은 부당한 실상을 드러낸 저널리스트, 부패를 폭로한 법률가, 그리고 전문성을 바탕으로 정책을 연구하고 제안한 공동체 활동가들이었다고 대런 아세모글루 MIT 인스티튜트 교수와 사이먼 존슨 MIT 슬론 경영대학원 교수는 신작 '권력과 진보'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권력과 진보
▶ 대런 아세모글루, 사이먼 존슨의 신작 '권력과 진보', 출판사: 생각의 힘

탄탄한 정보를 바탕으로 사안에 대한 내러티브와 규범을 바꾸고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조직을 갖춰 전문성을 바탕으로 정책적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결과 미국의 제도는 완전히 재구성되었고 번영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몫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 '권력과 진보'에서 분석한 내용입니다. 새로운 기술이 자동적으로 보다 나은 세상을 담보하지 않으며, 보다 나은 세상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치열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술이 우리를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사이트
윤혜선 교수 섬네일
지난 16일 서울 강남의 한 공유 오피스에서도 신기술의 제도를 어떻게 개선하면 좋을지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전문가들의 열띤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과 SBS문화재단의 공동연구의 일환으로 윤혜선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중심으로 우리나라가 '기술 경쟁력을 넘어 제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해법을 모색하는 자리였습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생화학과 생리학을 공부한 뒤 법학 박사가 된 윤혜선 교수는 과학기술의 전문성을 가지면서도 제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문가입니다.
 

원천기술 있고 한국의 강점인 '디지털'과의 융합 가능한 기술이 핵심 성장 동력!

Q. 제도를 보시는 분의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핵심 성장 동력으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과학기술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 저는 인공지능과 데이터, 바이오와 넓은 의미의 모빌리티, 그리고 민감할 수 있지만 원자력을 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분야가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일부 원천기술을 비롯하여 충분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고, 또한 한국이 강점을 가지고 있는 디지털 기술과의 융합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AI 범용화가 실현되고 적절한 제도적 환경이 뒷받침된다면 이들 분야에서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리더로서 상당한 영향력까지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술력을 기반으로 하는 신규 서비스와 제품은 글로벌 니치 마켓을 파고들어 시장을 선제적으로 확대해 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신기술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가지고 국내에서는 사회적 수용성을, 해외에서는 글로벌 경쟁력을 모두 선취할 수 있도록 새로운 입체적인 룰 세팅이 필요합니다.
 

신기술은 효율성의 잣대로 미래를 담보하기는 어려워!

Q. 우리나라의 규제 방식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방식의 효율적인 규제를 선호해왔습니다. '계획경제'를 지원하기 위한 규제 모델인 거죠. 국가가 민간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발해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형식으로, 시장 진입 단계에서는 굉장히 까다롭게 시장 참가자를 고르지만, 일반 선발 기준을 통과하여 시장에 진입하게 되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가 보장되는 형태입니다. 정부가 앞단에 시장 참가자를 엄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에 사후 규제나 감독에는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갖는 방식입니다. 다만 이런 규제 방식이 유효하려면 정부가 모든 내용을 우월적 지위에서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기술과 기업의 행태 등을 잘 알아야 한다는 조건이 따릅니다.

이에 대조적으로 미국의 규제 모델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일단 누구에게나 시장을 개방합니다. 그리고 국가는 모니터링과 사후 규제에 힘을 더 많이 안배해 시장과 산업을 관리하고,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피해자들이(국민이) 소송을 통해 문제의 행위를 한 기업이 망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규제의 제도적 환경이 형성돼 있습니다.

규제의 설정과 운영, 비용의 관점에서 우리의 규제 모델이 미국의 모델보다 더 효율적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AI나 디지털 융합으로 혁신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분야와 같이 이제 부상하여 불완전하고 누구도 예측하기 쉽지 않은 신기술과 융합산업은 과거의 우리 방식으로 룰 세팅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방식을 차용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기술로 인해 사회적, 문명적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어떠한 규제 모델을 따를 것인가라는 제도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경쟁력 있는 규제 모델을 설계하기 위한 담론을 업그레이드하고, 정책을 수립하여 법제화하는 방식을 달리해야 합니다.
 
Q. 그렇다면 신산업의 규제 관련해서는 무엇을 고려해야 하나요?

: 신산업의 규제를 논할 때는 국내외적인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우선 국내적으로는 규제를 설계할 때 이제는 규제를 관할하는 정부와 시장 진입을 허가받은 기업 중심의 규제(저는 이것을 '공급자 중심의 규제'라고 표현합니다)를 넘어 규제로 인해 창출되는 시장과 규제의 효과(저는 이것을 '수요자 중심의 규제'라고 표현합니다)를 고려해야 합니다. 또한 시장과 규제 효과의 범위를 국내로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수준의 글로벌 시장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과거처럼 성숙한 산업에 대한 다른 나라의 규제 방식을 무조건 참고하려 하기보다는 적어도 신기술, 신산업 분야에서는 우리 제도도 선진국의 참고사례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K-규제를 개발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규제도 '테스트베드' [2]를 거쳐 수립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도 중요합니다. 제도도 샌드박스 같은 정책 실험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규제관련 전문가 집담회
지난 16일, 서울대 국가미래전락원 규제 관련 전문가 집담회:
윤혜선 한양대 법학대학 교수, 최윤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박상철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송시강 홍익대 법대 교수, 권은정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또 국제적으로는 빠르게 발전하는 글로벌 규제 환경에 대한 대외적 대응이 필요합니다. 현재 신기술을 둘러싸고 주요국들 사이에 경쟁력 있는 규제와 거버넌스 구축 경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특정 국가나 지역의 선제적인 제도 이니셔티브에 종속되지 않으려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국가나 이해관계자들과의 연대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까지 규제 효과를 미치려는 역외적용 [3]을 고려한 다른 국가의 입법적 조치에 대하여 '느슨한' 글로벌 협력 체계를 갖추어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입장을 전략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K-소프트파워를 키워가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2] 테스트베드: 어떤 것을 세상에 내놓기 전에 그것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를 미리 알아보기 위해 시험적으로 적용해보는 소규모 집단·지역· 영역
[3] 역외적용: 한 국가의 영역 외에서 발생한 법률 문제에 대하여 자국의 국내법을 적용하는 것을 일컫는 말.

지난 16일 이뤄진 인공지능의 규제를 둘러싼 전문가 집담회는 현재 한국의 AI 관련 논의되는 법안이 EU AI 법안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현상에 문제는 없는지를 성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발제를 맡은 박상철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EU의 AI 법안은 저인망식 규제로, 고위험 시스템으로 분류되는 모든 AI 시스템에 동일한 리스크가 있다고 보아 모든 항목이 공정하고, 책임성이 있어야 하며, 투명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과도하게 방대하고 엄격한 의무 항목들이 적용되고 합리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박상철 교수는 대안으로 '상황'에 따라 핀포인트해 일관성 있게 적용되는 규제 방식을 강조했습니다.

예를 들면, 채용 과정에서 사용되는 AI는 '할당 AI'(근무 기회의 할당)인데, 이 경우 공정성이나 설명 가능성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안전할 필요까지는 굳이 없으며 '자율주행 엘리베이터'는 '안전성'의 이슈가 매우 중요하지만 투명성이나 공정성 이슈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볼 때 모든 서비스가 모든 리스크에 대응하기보다는 맥락에 맞게 적용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냐는 주장이었습니다.


대안적 규제 모델
▶ 출처: 박상철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Bridging the Global divide in AI Regulation:
A proposal for a Contextual, Coherent, and Commensurable Framework
포드 모터스 어샘블리 라인
그러면서 자동차는 마차에 비하면 교통사고 당시 엄청난 사망자까지 발생할 수 있지만 시속 얼마 이상은 달리면 안 된다는 식의 규제는 없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안전과 관련해서는 안전벨트를 매게 하는 등 실제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안에 대한 대처가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현재 한국은 AI기술 관련 경쟁력이 없지 않은 상황인데 EU는 상대적으로 AI 관련해서는 선도국이 아니다 보니 기술보다는 제도에 관심을 갖는 것이기도 해서 과연 우리가 EU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지금 상황에서 맞는지에 대해서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D
오펜하이머 영화 트레일러 이미지
▶ 오펜하이머 영화 이미지, 워너브라더스

최근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에 보면 미국의 핵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여 원자폭탄을 개발한 이론 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손에 피가 묻은 기분이라고 언급합니다. 그러자 트루먼 대통령은 원폭 투하의 결정은 과학자인 오펜하이머가 아니라 자신이 내린 결정이라고 강조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결국 기술 자체보다는 그 기술이 어떠한 법적, 정치적 타협과 결정에 의해 사용되게 되는지를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법, 제도는 시대의 결과물로 시대정신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지금 같은 불확실성이 큰 시대에는 기술의 설계 단계에서부터 표준을 적용하고 전문성을 가지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할 수 있게 허용하는 정치, 행정의 문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영국에서 실시하고 있다는 '규제기관 개척자 자금'이라고 해서 혁신적인 제도를 제안한 공무원들에게는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이 좋은 예입니다.

혁신 기술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기 위해서라도 입법자, 공무원, 전문가, 언론인 등 다양한 주체들이 전문성을 알아볼 수 있는 학습과 어느 것이 정말 국익에 도움이 될지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대입니다.

(글: 이정애 기자 calee@sbs.co.kr)
* 이 기사는 매주 수요일 아침 발송되는 뉴스레터, 'SDF다이어리'에 먼저 소개됐습니다. 'SDF다이어리'는 SBS D포럼을 준비하는 SBS 보도본부 미래 팀원들이 작성합니다. 우리 사회가 관심 가져야 할 화두를 앞서 들여다보고, 의미 있는 관점이나 시도를 전합니다. 한 발 앞서 새로운 지식과 트렌드를 접하고 싶으신 분들은 SDF다이어리를 구독해주세요. ▶ '구독'을 원하시면 여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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