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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답게, 새로운 내가 되는 《남극산책》 [북적북적]

여전히 나답게, 새로운 내가 되는 《남극산책》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92: 여전히 나답게, 새로운 내가 되는 <남극산책>
혹시 너 남극 갈 자신이 없니? 집에 남겨둔 아이들이 마음에 걸려? 파도에 흔들리는 배를 타고 두 달 반을 갈 자신이 점점 없어진다고? 그럼 다시 잘 생각해 봐. 아직 보름간의 시간이 남아 있잖아. 네 계획을 되돌릴 수 있어. 리조트 주차장에 아직 네 자동차도 있잖아. 도망가!

오늘 함께 읽는 책 [남극산책]의 표지에는 제목과 함께 단 한 줄, 이런 구절이 단정하게 실려 있습니다. '너무 멀리 가는 건 여행이 아닐지도 몰라.' 저는 (아마도) 아침놀을 바라보고 있는 빙산 위 펭귄 한 마리의 일러스트와 어우러진 [남극산책]이란 제목과 함께, 이 한 줄에 유독 마음이 끌려 이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집어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여행을 떠난다'는 행위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요. 가다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일정, 뭔가 불편한 일이나 차질이 빚어지면 언제든 경로를 틀 수 있는 여정까지가 여행이라면, '남극'으로 임무를 지고 떠나는 것은 확실히 여행의 범위를 한참 벗어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임기 중엔 되돌아오기 힘든 지구의 끝에 스스로를 몰아넣는 마음과 그 시간은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게 될까요.
"문명의 욕망은 결국 인간을 더욱더 큰 자극에로 휘몰아가며, 인간은 결국 삶의 정로(正路)를 잃게 된다."

이 글은 남극에 가고 있는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경쟁을 통해(어느 때보다 경쟁률이 낮았지만) 선발되어 좋은 시설을 갖춘 장소에서 자가격리를 한 후 배에 올라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 받고, 남극을 향해 가는 길에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는 나 자신 말이다. 밤새 쉬지 않고 달리는 배의 왼쪽 동녘 하늘을 은은한 주홍빛으로 물들이던 아침놀, 산호해의 수평선 구름 사이로 보이던 옅은 분홍빛 석양, 줄을 맞춘 듯 낮게 드리워진 남태평양의 뭉게구름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거친 파도 위를 유유히 날던 갈매기들, 수면 위를 쏜살같이 날아가는 날치 무리, 브릿지에서 처음 마주쳤던 장엄한 남극대륙, 대륙과 해빙이 하나인 듯 온통 하얗게 펼쳐져 있던 설원, 바다의 얼음을 깨고 대륙에 다가가던 쇄빙선의 요란함, 갈라지는 얼음을 피해 도망가던 펭귄들, 장보고기지 앞바다에 출몰한 바다표범, 로스해역 활동 중에 마주친 끝이 보이지 않던 거대한 빙벽 등 이 모든 것들을 과연 누가 경험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의 저자 최영미 님은 여러모로 일반적이지는 않은 경력을 가진 분입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로서, 2014년 세월호 구조현장 바지선에서 잠수부 의료지원에 참여하면서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자고 결심했다는 이야기가 책 표지 안쪽 저자 소개에 실려 있습니다. 의사 최영미는 이후 라오스, 몽골, 필리핀, 캄보디아, 네팔로 의료봉사를 떠났고, 대한민국 긴급구호대의 일원으로 에볼라 바이러스의 진원지인 시에라리온에서 에볼라 양성 환자를 돌본 경험도 있습니다.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이들이 중학교에 다니고 있던 2020년 여름 남극세종과학기지 의료대원에 지원해서 1년간 남극에서 임무를 수행한 뒤 2021년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책은 의사이자 에세이스트로서 최영미 님이 써내려간 그 남극 1년의 기록입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GPS만 들여다보고 있다. 적도를 지나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다시 날이 흐리고 빗방울이 간간이 떨어지는데, 습한 공기가 폐 안으로 깊숙이 밀려들어온다. 선내 방송에서 모두 헬리데크로 모이라고 한다. 이제 적도에 가까워져 통과하는 시간에 기념촬영을 하려는 것이다.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 차림을 하라기에 나는 방으로 들어가 박스 깊숙이 넣어두었던 옷을 꺼내 입은 후 위에 빨간색 단체복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간다. 조금 전까지 "후두둑" 쏟아지던 비는 오지 않는다. 내 옆에 있던 승조원 한 분이 손가락으로 먼 바다를 가리키며 "저기 저쪽에 적도를 표시한 빨간색 깃발이 보인다"고 말한다. 나는 '어디 있지?' 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다 위를 훑다가 '도대체 여기서 보일 게 있을까?' 하며 승조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모였다.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서 말이다. 우리는 '빨간색 깃발'이 아니라 'GPS'가 적도라고 가리키는 지점을 통과하면서 기념촬영을 했다.

남극은 북극과도 다릅니다. 저도 두 곳 모두 가보지 못했지만, 극지방 취재에 나섰던 동료들은 "북극은 남극에 비해서는 '대도시' 수준"이라고까지 표현하더라고요. 남극이야말로 환경, 인적, 접근성, 모든 면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올 수 없는, 이 지구의 진짜 끝입니다. 한 번 발을 내디디면, 마음이 바뀌고 사정이 달라졌다고 중간에 '취소'해 버릴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남극에 가는 것을 부러워하고, 나 또한 그럴 만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는 '누구나 가져볼 수 없는 보화'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지녀야 할까? 정말 나는 그것을 가져도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갖은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며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당연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혹시 내가 보고 경험한 것을 '자랑 삼아' 늘어놓고 있지는 않은가? 내게 제공되는 음식을 접시에 가득 담은 후 다 먹지도 못하고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배를 타고 가는 긴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 천혜의 자연인 남극을 내가 누려야 할 어떤 '대상'으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 (중략)…. 어쩌면 사람의 발걸음이 닿지 않아야 더 아름다울 곳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가야 한다면, 그것이 나라면, 더 큰 책임감과 의무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전문 탐험가나 연구자가 아닌 의사의 남극 경험이라는 흔치 않은 소재에 제일 처음 이끌렸던 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생활인의 눈높이에서 '남극'을 다녀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게 등장합니다. 하지만 책장을 넘겨갈수록, 다른 어떤 것보다도, '떠나며 살아온 자' 최영미의 목소리를 만난 것이 가장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학생이 된 아이 둘을 뒤로 하고 남극 의료대에 지원하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는 이 사람은 그 결정과 따라오는 결과의 한 두 가지 측면에만 매몰되거나 도취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결정과 그 결과의 모든 측면에 대해 솔직하게 고찰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그에 따라오는 책임들을 힘껏 껴안는 부담을 치열하게 직시하려고 노력합니다.
참으로 역사적인 날이다. 엄마는 배에서 내려 자갈을 밟고 비를 맞으며 황량한 세종기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고, 딸은 기차를 타고 낯선 도시에 도착해 콧물을 훌쩍이며 역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의 상황이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전주도, 남극도, 그 어느 곳도 앞으로 맞닥뜨릴 일에 대해 우리에게 명확한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목표도, 안전한 길도 그리고 나를 도와줄 사람도 결국은 내가 찾아야 하는 것이다. 딸과 나는 지금 모험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여행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여행이라는 걸 떠나갔다 와서 '이 여행이 나에게 나만은 느낄 수 있는 깊은 샘물을 남겼다', 또는 '내가 걷는 길의 경로를 새롭게 파는 첫 삽을 뜬 것 같다'고 느낀 적이 제게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시간이 지날수록, '여행'이 점점 그런 느낌을 잃어갑니다. 어디를 갔다 와도 그냥 제자리. 여행 전후에 달라진 게 별로 없다는 느낌이 점점 커지곤 하죠.

크게 2가지 이유가 있는 듯 합니다. 첫번째로, 여행을 가도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있습니다. 여행이 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항로에 점점 더 스스로를 선뜻 맡기지 못하도록 나 자신이 변해왔을 뿐입니다. 그냥 시공간을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의 어딘가에는 나침반의 자력 같은 힘이 작용하게 되지만, 그 정도로는 내가 살아온 시간의 하중 밑에 눌려있는 나 자신에게 대단한 변화를 불러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어쩌면 '당연한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면, 점점 더 여행이라는 걸 함부로 떠날 수도 없고 떠나지지도 않는 게 아닐까요. 어디로 가든, 나로부터, 내 인생으로부터 탈피해보는 경험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당연히 어려워지지 않을까요.

[남극산책]은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너머 어딘가, 혹은 바로 여기에, 또다른 지점이 있다는 것을 제게 새삼 넌지시 일깨워줬습니다.
'그래, 죽자. 차라리 죽어버리자. 내가 지은 모든 잘못을 책임지자. 아들을 저렇게 만든 건 나다. 아들을 살맛 안 나게 만들어놓고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 아들을 밤낮으로 게임에만 빠지게 만든 것은 나다. 부여잡을 희망조차 없게 내가 만들었다.'

옷을 마구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갔다. 눈발이 섞인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바람에 등 떠밀리듯 서쪽 세종곶을 향했다. 누군가에서 도망치는 사람처럼 해안 자갈 위를 달렸다. 바람은 더 거세지고 파도는 해안으로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자갈길이 점점 물에 가까워지면서 파도의 거품이 내 발로 튀어 올랐고,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 저려왔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기 시작했다. 왼쪽에 호수가 나타나면서 바다 사이의 길이 더 좁아져 천천히 걷는데, 저 앞 오른쪽 해안에 스쿠아 두세 마리가 머리를 조아린 채 무언가를 먹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을 지나가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스쿠아들이 작은 펭귄 한 마리를 사정없이 뜯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화가 치밀었다. '불쌍한 펭귄을 먹어?' 그놈들의 모습에 질려 얼굴을 돌리고 서둘러 지나쳐 가려는데 스쿠아 두 마리가 길을 막고 서 있었다. 난 화가 나 그놈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이놈들아, 꺼져!" 하지만 그놈들은 내가 던진 돌을 피하더니 하늘로 날아올라 오히려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열 마리가 넘는 스쿠아가 떼거지로 몰려와 아주 낮게 비행을 하며 내 얼굴 가까이까지 접근했다. 나는 돌을 집어 던지고 또 던졌다. 바람은 외투 모자를 뒤집어 벗겨 놓았고, 눈발이 얼굴을 사정없이 치고 지나갔다. 요란한 파도소리가 내 주위를 감쌌다. 나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도는 녀석들은 돌을 한꺼번에 두세 개 던져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돌을 집느라 몸을 접었다 폈다 하니 허리가 아팠고 기운이 빠져 후들거렸다.

"좋아, 계속 덤벼 봐! 내가 여기서 죽으면 네놈들 때문에 뼈밖에 못 추릴 거다. 너희들이 내 몸뚱이를 저 펭귄처럼 게걸스럽게 먹도록 하지는 않을 테다. 그런 즐거움을 너희들에게 주지는 않을 테다!"

남극이기 때문에, 남극 외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예사로 펼쳐집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사실은 어디로 떠나도 나 자신과 나 자신의 관계들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것도 더욱 명확해집니다. 남극에 일단 들어온 이상, 1년의 임기를 끝내기 전에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남극이 아니라 그 어디로 간다 한들, 결국 나는 나이고, 내가 걸어온 나의 생이 버젓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관건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되, 그 사실에 안주하지 않는 것일 텝니다. 계속해서 떠나고자 분투하며 스스로와 생에 새로운 자극을 불러들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생동하는 삶과 관계를 소중하게 이어 나가려고 몸부림치는 것이야말로 남극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통용될 진정한 여행자, 진정한 '떠나는 자'의 자세가 아닐까.

최영미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의 중력에 거스르면서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작가의 굳은 의지가 이 책에선 반복적으로 노출됩니다. 비단 '남극 1년'에 도전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쉽지 않은 다이어트를 지속하는 일상의 습관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태도가 곳곳에서 배어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책장을 넘길수록 또 하나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떠나기를 반복해 온 자가 체득한 겸허'입니다. 시간, 여행, 삶의 불확정성과 불확실성이 가리키는 바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는 마음가짐만이 이대로 시간의 더께 밑에 함께 굳어 엉겨붙지 않겠다는 의지와 짝지어 나아갈 수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때 오른쪽에 무언가가 있는 게 느껴졌다. 바다 쪽을 향해 얼굴을 돌리니 자갈 둔덕 위에 펭귄 다섯 마리가 일렬횡대로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몸을 뒤흔들며 마구 돌을 던지던 곳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듯, 나를 응원하듯 자신들의 흰 배를 내 쪽으로 드러내며 말이다. 펭귄들은 호시탐탐 자신들을 잡아먹으려고 낮게 비행하는 스쿠아들에게서 벗어나 잠시 평온한 순간을 맞이한 듯했다. 나는 앞으로 걸어가며 중간중간 녀석들을 돌아보았다. 얼마간은 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흰 배를 드러내던 녀석들이 한참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에는 파도의 흰 거품 속에서 익살스러운 몸짓으로 놀고 있었다. 바람이 세종곶을 돌아 남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나를 바다 쪽으로 거세게 떠민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 멀리 보이는 밝은 갈색의 절벽을 향해 걸어간다.

그리고 남극, 입니다. 모든 걸 다 떠나서, 이 책을 펼침으로써 아무나 쉽게 떠날 수 없는 그 곳에 다녀올 수 있습니다. [남극산책] 속 에세이들 중 한 편의 제목으로도 가져다 쓰인 [남극의 셰프]라는 영화를 이 책을 읽으면서 같이 보시면 어떨까 추천해 봅니다. (넷플릭스에 있습니다.) [남극의 셰프]는 남극의 일본기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영화입니다. 남극에 체류하는 대원들에게 일어나는 '이벤트'라고는 신선한 먹거리로 그때그때 해먹는 맛있는 밥 뿐입니다. 어쩌면 영화치고 너무 잔잔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황량하고 거대한 추위와 대자연 속의 일상이 시종일관 담담하게 펼쳐집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의외로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남극은 압도적으로 아름다우면서 무시무시한 지구의 끝이죠. 그런 곳에서도 결국 마음에 가장 오래 남는 드라마는 막막한 황량함 속에서 순전히 일로 엮여 함께 하게 된 사람들 사이의 온기와 돌아갈 곳에서 기다리는 가족들 뿐이라는 것을 새삼 보는 사람들도 깊이 납득하게 됩니다. 남극기지의 느낌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린 이 영화를 통해 남극의 '진짜' 분위기를 느껴보고 [남극산책]을 함께 읽으시면, 읽는 재미가 배가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루는 니체 전집이 꽂힌 책장 앞에 서서 한 권 한 권 책을 꺼내어 맨 뒤페이지를 펼쳐보았다. '누구의 이름이 적혀 있을까?' 하는 기대에 찬 마음으로 대출 장부를 꺼냈다. 빈 종이도 있지만 이름 적힌 대출 장부도 있었다.

"[비극의 탄생] 89년 3월 12일, 000. 94년 8월 20일, 000."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월 22일, 000.", "[우상의 황혼] 92년 1월 2일, 000.",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5월 1일, 000."

나는 대출 장부를 열어보며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같은 공간과 책 한 권을 공유하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사상을 공유한다는 게 신비로운 일처럼 여겨졌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름을 적은 그 대원들과 왠지 모를 유대가 형성되는 것을 느꼈다.

얼마 전, 니체의 책 한 권을 또 빌렸다. 월동을 끝내고 나갈 때까지 다 읽지 못할 것 같아 '귀국을 하는 길에 들고 갈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장부에 적힌 내 이름 밑에 또 다른 대원이 자신의 이름을 멋지게 적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런 생각은 아예 접기로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이 주말에, 저와 남극에 '잠깐' 다녀오시면 어떨까요. [북적북적]과 이제는 남극까지 함께 여행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레책방'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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