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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소신 보수' 이균용 "평등 지향 조직은 퇴보"…김명수 6년 되돌리나

[취재파일] '소신 보수' 이균용 "평등 지향 조직은 퇴보"…김명수 6년 되돌리나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는 법원 안에서 완고한 소신 발언으로 유명합니다. 지난해 12월에는 대전지방변호사회지에 "적어도 자유의 수호에 있어서 극단주의는 결코 악이 아니"라는 내용이 포함된 글을 게재하며 거침없이 주관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SBS는 올해 2월, 이 후보자가 대전고등법원장 임기를 마치며 대전고법 구성원들에게 남긴 퇴임사를 입수했습니다. 김명수 대법원장에 대한 날선 비판과 함께, 대법원장이 된다면 사법 행정을 어떻게 이끌어갈지에 대한 후보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사법 신뢰 나락…대전환 앞두고 더 나은 미래 희망"

이 후보자는 올해 2월, 26대 대전고등법원장 임기를 마치면서 취임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 2년 전 이 자리에 법원장으로 부임할 당시 저는 왠지 영영 되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떠나왔다는 희미한 아쉬움의 그림자 속에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과 아울러 재판의 권위가 무너지고 사법에 대한 신뢰가 나락으로 떨어져 조롱거리로 전락한 일그러진 사법부에 대해 안타까움과 참담함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저는 의견이 있음에도 침묵함은 특별한 악이고, 지옥의 가장 고통스러운 장소는 위기의 순간에 중립만을 지킨 사람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는 경구를 되새기며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던 사법부를 위해서 침묵의 악과 중립의 죄를 저지르지 않으려고 오랫동안 법원에 몸담은 한 사람으로서 당시 사법부에 대한 현실 인식을 담아 취임사를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당시에 저는 우리 법원이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보았습니다. (...)"
 
이 후보자의 대전고등법원장 취임일은 2021년 2월 9일. 임성근 전 부장판사가 '김명수 대법원장이 거짓말을 했다'며 녹취를 공개한지 불과 닷새 뒤입니다. 임 전 부장판사는 2014년부터 2년간 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로 근무하는 동안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재판 등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2020년 5월 김 대법원장에게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그러나 김 대법원장은 사표 수리를 거부했습니다. 이후 사표 수리 거부가 국회의 탄핵 논의를 막는다는 비난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는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김 대법원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런데 해명 하루 만인 2021년 2월 4일 임 전 부장판사가 김 대법원장의 육성이 담긴 녹취를 공개했습니다. "지금 뭐 탄핵하자고 저렇게 설치고 있는데, 내가 사표 수리했다고 하면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느냐"며 임 전 부장판사의 사의를 만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녹취 공개 직후 대법원장 사퇴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법원 내부에서는 '사법부 수장이 국회 눈치를 보는 것도 모자라, 그걸 숨기려고 공개적으로 거짓말까지 했다'며 참담한 심정을 토로하는 판사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이 후보자의 이런 글은 김 대법원장의 부적절한 처신을 겨냥해 비판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막상 떠나는 시점에 이르러서 이 후보자는 홀가분하다고 썼습니다.
 
"(...) 그래도 제가 부임할 때와 달리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돌아갈 수 없으리라 예감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설렘과 조만간 사법부에도 진실과 정의가 살아 숨쉬고 국민의 상식이 존중받는 방향으로의 대전환을 앞두고 있다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이 후보자의 대전고등법원장 퇴임일은 2023년 2월 17일. 김 대법원장 임기가 7달 남짓 남은 시점이었습니다. 취임사 일부를 끌어와 당시의 풍파를 2년 뒤 퇴임사에 또 길게 언급한 것을 감안하면, 이 후보자가 말하는 대전환은 김 대법원장 체제에서 새로운 대법원장 체제로의 전환이라고 유추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듯합니다. 그리고 현시점 사법부 수장 자리에 가장 근접한 이 후보자가 생각하는 '더 나은 미래'가 무엇인지는 퇴임사 뒷부분을 통해 엿볼 수 있었습니다.
 

"평등 지향 조직은 퇴보…효율 갖춘 새로운 시스템"

 
"(...) 법원은 이상적인 기능조직으로서의 본래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 구성원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역할 분담체계와 운영방안의 경험을 계승하는 연속성을 지키면서 새로운 발상에 의한 자극이라는 발전성을 갖춘 사법 운용 시스템으로 새롭게 만들어져야 합니다. 법원 구성원의 행복이나 만족감 추구가 공동체가 아닌 기능조직인 법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구성원의 만족을 전혀 무시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는 결국 수단에 불과하고, 충실하고 신속한 재판절차를 통해서 법의 지배를 실현한다는 법원 본래의 목적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법원조직 안에서 스스로 돕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에 대한 차별화는, 모든 구성원을 스스로 돕는 자로 끌어냄으로써 발전을 가져오지만, 법원이 차등을 허용하지 않는 평등 지향 조직이 된다면 정체와 퇴보를 피할 수 없다고 역사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이 후보자의 이 발언 역시 김 대법원장의 '사법 개혁'을 되짚어보면 독해가 수월해집니다. 김 대법원장은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된 '제왕적 대법원장' 권한을 내려놓고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하는 사법 관료화를 해체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대표적인 조치가 2020년 '고등 부장 승진제' 폐지입니다. 기존에는 대법원장이 지방법원 부장판사 중 일부를 선발해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보임했습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은 법원장 또는 대법관 후보군으로 분류됐습니다. 지방, 고등할 것 없이 법원장 자리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이 돌아가며 맡았기 때문에 보임 자체가 일종의 승진으로 기능해왔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의 이원화가 자리 잡아 지방법원장은 지방법원 판사 중에, 고등법원장은 고등법원 판사 중에 임명하도록 구분 지어져 있습니다.

2019년에는 법원장 추천제가 도입됐습니다. 법원장 추천제는 법원장 후보 추천위원회가 소속 법원 판사들의 투표를 거쳐 후보군을 올리면 대법원장이 그 중 한 명을 임명하는 제도입니다.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형식을 취하지만, 대부분 득표율 1위 후보자가 법원장에 임명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역시 대법원장 권한 축소의 일환입니다.

지난 6년 동안 김 대법원장의 사법 개혁으로 대법원장 권한은 대폭 축소됐고 법관들 사이의 수직적 질서도 상당 부분 사라졌습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되지 않아도 법원장이나 대법관이 될 수 있고, 법원장이 되는 데 후배 법관들의 투표가 크게 작용하도록 바뀐 영향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개혁은 일하지 않는 법원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승진 개념이 희미해지면서 근무 평정을 관리할 필요가 크게 줄었고, 열심히 일할 유인도 사라진 겁니다. 이런 '법원의 수평화'를 만성화된 재판 지연의 주원인으로 꼽는 시각도 많습니다.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 (사진=연합뉴스)

이 후보자의 발언을 보면 김 대법원장이 추진한 일련의 사법 개혁을 일정 부분 되돌릴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차등을 허용하지 않는 평등 지향 조직'은 김 대법원장 임기 중 변화한 법원의 모습을 가리킨 말일 겁니다. 이런 조직은 '정체와 퇴보를 피할 수 없다'는 말 역시 지금 법원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 후보자가 대법원장이 된다면 평등에서 효율로, 법원이 추구하는 가치의 무게추가 크게 움직일 가능성이 큽니다.
 

추진력 있다지만…변화는 미지수

다만 이미 승진 개념이 사라진 법원에 어떤 형태로 유인을 제공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인사 보상 시스템인 고등 부장 승진제의 경우 폐지는 2020년에 됐지만,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인 2010년 지방법원 판사와 고등법원 판사를 구분해 임용하는 법관인사 이원화 제도를 단계적으로 시행하면서 이미 폐지 수순이 시작됐습니다. 장기간에 걸쳐 시스템이 바뀌어온 만큼 이 후보자가 대법원장이 된다고 해도 고등 부장 승진제를 되살리긴 어려울 거란 시각이 우세합니다. 법원장 추천제는 폐지할 수 있겠지만 대법원장이 임명할 수 있는 대상자의 폭이 좁아 젊은 법관들은 별 영향 받지 않을 거란 분석도 있습니다. 전에 없던 유인책을 제시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입니다. 사법부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큰 지금, '일하지 않는 법원'이란 편견을 어떻게 불식시킬지 이 후보자가 직접 방안을 들려줘도 좋을 때입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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