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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오펜하이머', 파괴의 신이 말하는 최선의 악

오펜하이머

"나는 이제 죽음이요. 파괴의 신이 되었다"

원자폭탄 실험을 앞둔 오펜하이머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거룩한 자의 노래)를 인용해 자신을 '파괴의 신'이라 명명했다. 이는 자랑스러움이 아닌 죄책감의 표현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는 전쟁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파괴의 신'이 되어야 했던 한 과학자의 내적 고뇌를 그린 작품이다.

오펜하이머의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作 카이 버드·마틴 셔윈)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는 크게 두 축으로 전개된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성공까지의 이야기와 매카시즘(극단적 반공주의) 광풍에 휘말린 오펜하이머가 4주간 받게 된 청문회 이야기다.

놀란 감독의 첫 번째 전기물이다. 스릴러, 히어로물, SF 등 다양한 장르 영화에서 자신만의 연출 개성을 보여준 놀란 감독은 전기 영화 역시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성했다. 서사를 병렬로 전개하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고, 컬러와 흑백을 오가며 오펜하이머라는 문제적 인물이자 거대한 미스터리에 접근해나간다.

오펜하이머

놀란 감독이 초점을 맞춘 것은 원자폭탄을 만든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라는 인간의 고뇌다. 원자폭탄의 탄생 과정보다 원폭 투하 이후 전개되는 오펜하이머 내면의 전쟁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도 그 이유다.

'오펜하이머'는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에서 단 한 번 등장하는 폭발신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전 마지막으로 감행했던 트리니티 테스트다. CG 없이 구현해 낸 이 장면은 빛과 어둠의 대비, 카운트다운의 긴장감을 극대화한 사운드 결합을 통해 극적 효과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영화는 마치 이 장면을 향해서 돌진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구성적으로 중요한 장면인 것은 맞지만 이 이후에 본격적인 드라마가 펼쳐진다. 현대의 프로메테스(제우스 신의 불을 훔쳐내 인간에게 가져다 준 대가로 매일 독수리가 간을 쪼아 먹는 형벌을 받게 된 그리스 신화의 신)에게 펼쳐지는 마녀사냥과 죄의식의 시간이 영화의 후반부를 지배한다.

1950년대 미국 매카시즘 광풍을 집약한 청문회 장면에서는 놀란 감독이 선호하는 연출인 교차편집을 통해 오펜하이머의 과거와 현재를 매끄럽게 이어낸다.

오펜하이머

다만, 영화 기술로 무장한 볼거리의 영화라고 예상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이것은 한 인간을 다룬 심리극이며, 고뇌의 드라마다.

원자폭탄의 폭발보다 더 공을 들인 건 오펜하이머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분열과 폭발이다. 과학자로서의 사명과 보편적 인류애를 가진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충돌하는 순간들을 핵분열의 이미지를 통해 시각화하기도 했다.

명배우들이 뛰어난 연기로 인물의 내면은 물론 그때 시절의 공기를 만들어냈다. 특히 타이틀롤을 맡은 킬리언 머피는 오펜하이머의 환생처럼 여겨질 정도다.

놀란 감독의 오랜 페르소나인 머피는 이번 영화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느낌이다. 체중 감량을 통해 인물의 외형에 다가간 것은 물론이고 침묵의 카리스마와 발화를 통한 압도적 감정 연기까지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여기에 스트로스를 연기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명연기가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스트로스는 원자력 위원회 의장이자 수소 폭발 개발을 두고 오펜하이머와 갈등을 벌인 인물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스트로스의 질투와 열등감을 심도 깊은 연기로 표현해 냈다. 특히 흑백 화면에서 빛을 발한다.

오펜

MZ세대들에겐 '아이언맨'으로 유명한 배우지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20~30대 시절 젊은 연기파 배우로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았다. 히어로 무비에서는 해소하지 못했던 내면 연기에 대한 갈증을 제대로 푼 호연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또 한 번 오스카 트로피에 도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교차 편집으로 완성되는 서사인 만큼 빈틈없이 오펜하이머의 인생 여정을 쫓고 싶다면 원작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읽고 관람하길 추천한다. 또한 현재 쿠팡플레이에서 스트리밍 중인 다큐멘터리 '전쟁의 종식자: 오펜하이머와 원자폭탄'을 관람하고 가면 영화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오펜하이머

IMAX 선호하는 놀란 감독은 이번 영화에도 많은 분량을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했다. 영화 전체를 아이맥스 65mm와 65mm 대형 필름의 조합으로 촬영했으며, 영화 역사상 최초로 흑백 아이맥스 필름을 촬영에 도입했다. 흑백과 컬러, 빛바랜 컬러 필름을 서사의 성격과 장면의 의미에 따라 번갈아 사용한 것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른 놀란의 영화보다는 특수관 필람 지수가 낮다. 인물 중심의 드라마인 데다 대화 장면의 비중이 크다. 일반관 관람도 영화의 재미를 만끽하는데 부족하지 않다. 물론 창작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건 IMAX 포맷이지만 시각효과만큼 사운드 효과가 두드러지는 이 영화는 돌비시네마도 훌륭한 선택이다.

(SBS연예뉴스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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