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서울 평창동에 있는 노르웨이 대사관저에서 노르웨이 왕실 공로훈장 수여식이 열렸습니다. 훈장을 받은 사람은 김미혜 한양대 연극영화과 명예교수. 한국 문화계 인사로는 처음으로 이 훈장을 받았습니다.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작가 헨리크 입센 작품이 모두 실린 전집을 번역한 공로를 인정받은 건데요, 노르웨이 국왕 하랄 5세를 대신해 안네 카리 한센 오빈 주한 노르웨이 대사가 김 교수에게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올해 75세의 김 교수는 연극학자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론서를 쓰고, 수많은 작품을 번역하고, 연출까지 했던 '연극인'입니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연극학 박사 과정을 마쳤고, 한국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김 교수가 입센 전집을 번역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독일어로 된 걸 번역한 건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입센 작품을 번역하기 위해 60세에 노르웨이어를 독학했다는 겁니다. 정년퇴임 이후 쉬기는커녕 본격적으로 번역 작업에 매달렸고, 74세 되던 지난해, 총 23편, 10권 분량으로 입센 전집 한국어 번역본을 발간했습니다.
김 교수는 '시장성이 없어서' 출판 비용 일부를 부담하고 책을 냈습니다. 책상 앞에서 입센의 희곡과 씨름한 세월이 길어지며 척추 협착증을 얻어 한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김미혜 교수는 훈장을 받는 자리에서 울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악전고투를 자처하며 왜 그렇게 입센에 매달렸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골라듣는 뉴스룸 커튼콜에 김 교수를 초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헨리크 입센은 현대 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노르웨이의 극작가입니다. 헨리크 입센, 하면 몰라도 '인형의 집'은 들어보신 분들 많을 겁니다. 1879년에 입센이 발표한 '인형의 집'은 페미니즘 희곡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꼽힙니다. 여주인공 노라가 결혼과 남녀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자아를 찾아 집을 나가는 결말로 유명하죠. 입센은 '인형의 집' 외에도 '민중의 적', '유령' 등 지금도 끊임없이 공연되는 걸작들을 남겼습니다.
김 교수가 본격적으로 입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6년, 입센의 서거 100주년을 맞아 독일에서 열린 한 학술대회에 참가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베를린 대학에서 입센 콘퍼런스가 열렸는데 제가 당시 연극학회 회장 자격으로 초청받아 갔거든요. 27개국에서 와서 자기 나라에서 하는 입센(연구와 작품)에 대해 발표하는데, 저는 얘기할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왜? 우리는 안 하니까. 그때 엄청나게 우울했어요.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듣고만 있었어요. 독일 주재 노르웨이 대사관 리셉션에 갔는데, 거기서도 할 말이 없어서 대화에 끼기도 어려운 거예요."
왜 그렇게 됐을까 의아했던 김 교수는 그래서 베를린에서 돌아온 후, 바로 노르웨이 오슬로로 갔습니다. 거기서 전 세계에서 발간된 입센 관련 출판물을 모두 수집해 놓았다는 입센 연구 센터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한글로 되어 있는 자료는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때 뭐라 그럴까, 자괴감, 절망감을 느꼈어요. 그래도 우리도 문명국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일본 책도 있고 중국 책도 있는데 한국 것만 없어요."
막연하게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김 교수는 그다음 해인 2007년, 뉴욕 방문길에 서점을 찾았다가 우연히 'Complete Norwegian'이라고 적힌 책을 발견하고 운명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 내가 직접 입센을 연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하죠. 김 교수는 홀린 듯이 이 책을 사서 귀국했는데, 알고 보니 이 책은 노르웨이어 독학 교재였어요.
김 교수는 곧 입센 연구에 뛰어들었는데요. 한국어로는 입센을 연구할 수 없었습니다. 자료가 사실상 전무했으니까요. 김 교수는 한국 대학에선 영문학을 전공했고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해 독일어에 능통했기에, 영어와 독일어로 출판된 입센의 희곡과 관련 도서, 논문들을 백방으로 구해 '미친 듯이' 읽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노르웨이어를 직접 배워야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김 교수의 입센 연구는 2010년 헨리크 입센 평전을 출간하면서 첫 결실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입센의 작품을 영어와 독일어 번역으로 다 봤는데, 이게 차이가 있더라고요. 영어는 거의 단어 대 단어로 직역해 놓은 느낌이라서 문장을 읽고 나서도 작가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독일어는 또 너무 자세하게 번역해서 이게 희곡이 아니고 소설로 풀어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도대체 오리지널이 어떻길래 이럴까 궁금해하다가, 노르웨이어 교재를 사 왔던 게 생각났어요. 그래서 노르웨이어를 공부하게 된 거죠."
나이 60세에 노르웨이어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에선 노르웨이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노르웨이 남자 친구를 사귀면 된다'는 농담을 들었다고 하죠. 결국 뉴욕에서 사 온 노르웨이어 교재, 노르웨이에서 사 온 사전과 책들을 쌓아두고 독학을 시작했습니다. 노르웨이어가 독일어, 영어와 유사점이 있는 건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일은 처음 생각한 것보다 훨씬 험난한 과정이었습니다.
"매일 공부해야 하는데, 밖에서 바쁘고 밤늦게 오면 못하죠. 그럼 분명히 엊그제 했는데 그다음을 펴면 앞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내가 정말 늙었구나. 전에는 기억력이 좋았는데 왜 이렇게 기억이 안 나지? 정말 많이 괴로웠지만, 그래도 계속 반복하니까 외워지더라고요. 그렇게 대강 노르웨이어를 떼고 나서, 바로 입센 전집에 도전했어요.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작가들도 입센을 오리지널로 읽고 싶어서 노르웨이어를 배웠대요. 그 사람들은 세계문학의 거장들이고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나라고 못할 것 뭐 있어? 나도 한 번 해보자! 그랬죠. 그런데 막상 도전해 보니까 다행이었던 게, 입센이 즐겨 쓰는 어투나 구절이 자꾸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있었죠."
김 교수가 보여준 노르웨이어 입센 전집은 한 페이지도 반으로 나눠 깨알 같은 글씨로 꽉꽉 채워 1,0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벽돌 같은 책이었습니다. 입센이 평생 쓴 희곡 23편이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은 너무 글씨가 작아서 작품 별로 나온 단행본들도 따로 사 왔습니다. 번역 작업은 지루하고 더디게 진행됐습니다. 하루 종일 번역에 매달려도 두 줄 밖에 진도를 못 나가는 날도 있었습니다. 정년 퇴임 후에는 시간이 더 많아져서 본격적으로 입센 전집 번역에 매달렸습니다.
입센의 희곡 23편을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고 나니 4,300페이지, 책 10권 분량이 나왔습니다. 영어나 독일어로 했다면 1년에 한두 권씩 낼 수도 있었겠지만, 노르웨이어는 자신이 없는 외국어라서, 계속 공부하면서 먼저 번역했던 것도 보고 또 보고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하느라 막판에 한꺼번에 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김 교수는 그동안 노르웨이에도 여러 차례 다녀왔는데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바다에서 온 여인'을 번역하는데, 해안가 마을에 사는 주인공이 '넓은 바다'를 가고 싶어 하는 거예요. 바닷가에 사는데 왜 그럴까 의아했는데, 노르웨이 가보고 알았어요. 협곡이 너무 심해서 이 안에 콕 들어가 있는 해안가에 살면 넓은 바다가 안 보여요. 그리고 협곡 안쪽의 바다 하고 넓은 바다의 색깔도 달라요. 작품에 색깔에 대한 얘기도 나오거든요. 노르웨이에 직접 가서 보고 왜 그런 작품이 나왔는지 이해하게 된 부분이 많아요. 그래서 제 재산도 좀 들어간 거죠."
그런데, 중간에 그만두고 싶었던 때는 없었을까요?
"당연히 있었죠. 너무 힘들고, 노르웨이어는 자꾸 잊어버리고, 속상하니까. 그래도 그동안 했던 게 또 아까운 거예요. 그래서 그냥 했죠. 셰익스피어만 전집이 몇 개 있을 게 아니라 입센도 전집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나. 그것도 (독일어나 영어에서 옮긴) 중역 말고 오리지널로. 셰익스피어는 영국인이니까 영어로 다 했잖아요. 노르웨이 사람인 입센은 노르웨이어로 해야죠. 그래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잖아요."
"She was Crazy!" 입센 연구를 시작하고 나서 김 교수는 스스로 생각해도 '미친 여자'처럼 살았다고 했습니다. 한국에 입센 연구가 너무 없어서 직접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선 거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미친 듯이 이 일에 매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일단 시작하면 그게 뭐가 됐든 끝장을 보는 성격이거든요. 처음에는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다 보면 생각보다 어려운 일도 있잖아요. 그래도, '자신과의 투쟁' 이런 진부한 표현은 쓰기 싫고, 어찌 됐든 '내가 시작했는데 자존심이 있지, 끝을 내야지, 그런 편이긴 해요.
사실 이 일 하는 동안에 스스로한테 질문을 안 했어요. '너 왜 지금 이거하고 있니?'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거고, 그럼 보람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혹시나 스스로 하게 될 것 같아서였죠. 그랬는데도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 김 교수는 노르웨이 대사관을 찾아갑니다. 이 일을 계속할 '명분' 혹은 '구속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노르웨이어 입센 전집을 번역하고 있는데, 매년 연말에 번역한 원고를 출력해서 제출할 테니 약간의 번역료를 달라, 그러면 내가 그 돈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 번역 작업을 지속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노르웨이 대사관에서 소액이긴 하지만 지원금을 주셨어요. 6년 동안 지원해 주셔서 저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말마다 그 해 작업한 원고를 출력해서 직접 제출하거나 소포로 발송했어요.
제가 노르웨이 왕실 훈장받던 날 울음이 나오려고 했는데, 그때 노르웨이 대사관 문정관 하시던 분이 오셔서 나도 120% 이해한다, 나도 눈물이 났다, 얼마나 고생했는지 직접 봤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하시더라고요."
김 교수는 입센을 연구하면 할수록, 입센이라는 작가를 인간적으로도 굉장히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랑 너무 쿵짝이 맞는 거예요. 입센이 갖고 있었던 '소명 의식', 그리고 자유를 추구하되 그 자유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생각,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끝까지 해내는 정신이 굉장히 좋았어요.
입센은 19세기 중반에 극작가가 되었는데, 당시엔 노르웨이가 스웨덴의 속국이었거든요. 노르웨이적인 연극도 문화도 별로 없었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작품을 사주는 사람도 없고, 치즈와 빵을 살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지만, 초지일관 자신이 하고자 한 일을 끝까지 했다는 점 때문에, 입센을 보면서 '사람은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김미혜 교수는 입센의 작품은 자유로운 영혼, 인간의 권리, 젠더 문제, 예술가의 문제, 등등 다양한 테마를 다루고 있다고 했습니다. 입센이 그랬듯 입센의 희곡 속에도 소명 의식에 투철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런 대목에서 특히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민중의 적'에 나오는 스토크만 박사가 마지막에 '이 세상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사실은 독일 작가 쉴러가 한 말이기도 한데, 저는 이 대목에서 눈물이 좀 나더라고요. '브란'이라는 작품에도 자신을 희생하면서 소명에 헌신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작품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렸어요."
김 교수는 그 유명한 '인형의 집'은 페미니즘이 처음으로 북구에서 일어나기 시작할 때 나온 작품이라 페미니즘 해석을 많이 해왔지만, 이 작품을 페미니즘적으로만 해석하는 건 협소하게 이해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노라가 꼭 남편 때문에 집을 나갔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교육하기 위해, 이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집을 나간 걸로 본다며, '인형의 집'은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얘기를 듣다 보니 좀 궁금해졌어요. 입센은 19세기에 활동한 남성 작가였지만 '인형의 집'의 노라도 그렇고, 헤다 가블레르도 그렇고, 당시로선 파격적인 여성상을 많이 창조해 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