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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통일의 시발점이 됐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실수'

[안정식의 N코리아 정식] 북한 변화의 관건은 외부 정보 유입

1989년 5월 동독 부정선거를 계기로 동독에서의 민주화 시위는 엄청나게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11월 4일 동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시위에는 100만 명의 주민들이 참가했고, 주민들의 요구도 자유선거와 공산당 일당 독재 폐지, 내각 퇴진 등으로 과격해졌습니다. 위기에 몰린 동독 지도부는 무엇인가 획기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결국 동독 공산당 정치국과 내각은 획기적인 여행 자유화 조치를 마련했습니다. 동독 주민들이 해외여행을 할 경우 여행 목적 등을 제출하지 않아도 여행을 신청할 수 있고, 여행 허가는 즉시 내려지며 여행 거부는 특별한 경우에만 예외로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동독 공산당 중앙위원회 대변인 샤보브스키는 11월 9일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새 여행법을 발표했는데, "이 법률이 언제부터 발효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내용을 잘 모른 채 "제가 알기로는 즉각"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샤보브스키의 대답이 "동독이 국경을 개방했다"는 내용으로 알려지면서 동독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었고, 그날 장벽은 완전히 개방됐습니다. 샤보브스키의 실수가 베를린 장벽의 개방을 불러온 것입니다. 독일 ZDF 방송은 샤보브스키의 발언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실수"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까지가 베를린 장벽 개방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내용입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개방됐다

장벽 개방의 발단은 TV 앵커의 멘트


하지만, 1989년 11월 9일의 상황을 연구한 포츠담 현대사연구소의 헤어틀레 박사에 따르면, 베를린 장벽이 개방되는 과정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내용은 통일부가 발행한 『독일통일 총서: 22 언론분야』에 기반한 것입니다.

당시 샤보브스키의 기자회견은 11월 9일 19시에 동독 TV로 생중계됐습니다. 샤보브스키의 실수도 그대로 전파를 탔습니다. 하지만 이 방송을 시청한 동독 주민들이 많지 않아서인지 생중계 이후 동독 국경검문소로 가서 여행신청서를 제출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독 주민들은 평소 서독 TV를 즐겨보고 있었기 때문에 동독 TV를 통해서는 정보가 충분히 유통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건은 서독의 TV 뉴스 이후 일어났습니다. 서독 국영방송 ARD의 저녁 메인뉴스 'Tagesthemen' 앵커가 22시 45분 샤보브스키의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하면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11월 9일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동독 당국이 모든 국경이 즉각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다고 발표했습니다. 장벽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 방송을 본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주민들이 장벽으로 몰려들었고, 이러한 대중의 동력으로 베를린 장벽은 개방됐습니다. 샤보브스키가 "아름다운 실수"를 하긴 했지만 베를린 장벽을 개방시킨 직접적인 발단은 샤보브스키의 발언이 아니라 서독 TV를 통한 동독 내부로의 정보 전파였던 것입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서독 TV의 역할


1980년대 말 동독 민주화 시위와 독일통일 과정에서 서독 TV의 역할이 지대했다는데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당시 동독 주민들은 서독 TV나 라디오를 상당수 시청하고 있었습니다. 서베를린이 동독 영토 한가운데에 있었고 전파는 국경으로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동독으로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대규모 시위와 함께 동독 변화의 또 다른 기폭제였던 동독인들의, 서독으로의 대탈출도 서독 TV가 영향을 끼친 부분이 컸습니다.

동독 주민들의 탈출은 1989년 여름 헝가리로 휴가를 나온 일부 동독인들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하면서 시작됐습니다.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철조망을 제거하면서 동서 유럽을 가로막고 있던 '철의 장막'이 걷히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989년 6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이 상징적으로 국경 철조망을 자른 데 이어, 8월 국경도시 쇼프론에서 진행된 '범 유럽 피크닉' 행사를 계기로 국경이 잠시 개방되면서 동독인 수백 명이 서방세계로 탈출했습니다.

이러한 장면은 서독 TV를 통해 동독인들에게도 전달됐습니다. 자유세계로 넘어온 동독인들의 흥분된 목소리가 서독 TV를 통해 동독 주민들의 안방에 전해진 것입니다. 서독 TV는 이러한 내용을 지속적으로 보도했고, 이러한 자유의 드라마가 동독 사회의 변화를 가속화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때문에, 동독 주민 탈출에 대한 서독 TV의 집중적인 보도가 독일통일의 시발점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1980년대 말 독일의 변화를 가능하게 했던 바탕에 동독 주민들이 평소 서독 TV를 시청하면서 가져온 서독 사회에 대한 동경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분단의 장벽이 온존하던 시기 서독 사회에 대한 정보가 지속적으로 동독 주민들에게 전파되면서 결정적인 시기에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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