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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손을 좀 잡고 이 삶을 지나죠" 《아무튼, 친구》 [북적북적]

"친구들의 손을 좀 잡고 이 삶을 지나죠" 《아무튼, 친구》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89 : "친구들의 손을 좀 잡고 이 삶을 지나죠" 《아무튼, 친구》
 
“oo의 친구시죠?” 하고 상대 쪽에서 물어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나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이 내가 대관절 뭐 하는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그냥 oo의 친구인 것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혹자는 내게 어떤 이의 친구로 먼저 인식되는 것이 자존심 상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 몹시 놀랐다. 누군가의 친구로 소개되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들이 뿜어내는 빛과 그늘에 가려지는 것이 나는 무척 좋았다. 

비틀즈의 노래 중에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하세요? 아마 가장 많이 돌아오는 대답은 “그때그때 달라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매우 높은 확률로 제 마음 속 다섯 손가락 리스트 안에 자주 드는 곡 중 하나로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란 곡이 있습니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야말로 비로소 ‘도대체 리버풀이란 동네의 물이 어떤지 몰라도, 뭘 먹고 자랐는지 이 사람들이 특별한 현자들이 맞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좀더 몽환적이고 좀더 주목을 요하는 단어들의 비중이 좀더 높은 비틀즈의 다른 유명한 곡들보다도, 어쩌면 이 노래야말로 남들이 여전히 잘 흉내내지 못하는 비틀즈만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인) 유치원생도 모를 수 없는 단어들만 조합해서 우리 삶을 가장 진실에 가깝게 되짚는 그 놀라운 능력 말입니다. 
 
“내가 노래 부르다 ‘삑사리’를 내면 어떡할 거야? 
일어나서 날 버리고 나가 버릴 거야? 
귀기울여 주면 내가 네게 노래 한 곡 불러줄게. 
틀리지 않고 잘 부르도록 노력할게. 
응, 나는 내 친구들의 도움을 좀 받아서 그럭저럭 해나가. 
내게 필요한 건 내 친구들 뿐이야.”

(비틀즈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 中) 

오늘 [북적북적]에서 읽는 책의 저자는 아마도 이 노래를 세상에서 가장 가슴 저리게 이해하는 사람 중 한 명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아무튼] 시리즈의 최신간. 7월에 출간된 [아무튼, 친구]를 읽습니다. 양다솔 작가가 썼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이상함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첫인상을 좋게 가지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대체 어떤 사람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고도 했다. 몇 년을 만나도 나의 아주 기본적인 것에 대해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간혹, 내가 나라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해주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의 친구가 되었다. 그들이 보낸 편지에는 자주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상하고 용감하고 엉망이고 훌륭한 내 친구에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상한 사람이었던 나 자신을 항상 버거워했다. 몹시 끔찍하다고 느꼈다. 이런 나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졌다. 나는 차라리 내 친구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들이 돌려주는 사랑을 빌려 자랐다. 그들을 믿는 마음을 조금씩 반사하여 나 자신을 믿었다. 
​​
양다솔 작가가 친구들을 생각하는 방식과 마음은 아무래도 ‘남다르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를 신뢰하기 위해서는 친구들에 대해 갖고 있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려면 사랑하는 친구들이 돌려주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친구가 전화를 해오면 머리에 샴푸칠을 막 시작했을 때조차 그 전화를 미루지 못하고, 친구가 요청한 일이면 뇌수막염에 걸린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완료하려고 애쓰다 응급실에 실려갑니다. 친구의 부탁으로 15분 정도 헤어스타일링을 해주기 위해서, 드라이어며 고데기 같은 묵직한 짐을 바리바리 실은 자전거로 기록적인 폭설에 텅 빈 거리를 질주하다 여러 번 넘어지고 다치지만 친구를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까 바로 일어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들이 이토록 뜨겁게 쏟아붓는 애정을 다소 곤란해 하는 모습까지 종종 마주하게 됩니다. 자기가 쏟아 부은 것 같은 몰입도로 되돌아오기는 쉽지 않은 친구들의 반응에 번번이 애가 탑니다. 작가는 자기 자신과 생에 대해 끓어오르는 불화의 열기를 친구들이란 샘물로 다독이는 사람입니다.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자기 스스로 족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반석처럼 단단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그것이 건강한 영혼이라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맞는 말’은 교과서 속 정답처럼 일종의 ‘도달점’에 가깝습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그 ‘도달점’을 향해 가는 언저리 어딘가를 멀든 가깝든 맴돌면서 비슷한 상처와 치유를 반복합니다. ‘내 친구들의 도움을 좀 받지 않고서’는 인생에서 넘어지지 않고 몇 발자국 떼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게 손을 내밀어 주는 친구가 없는데, 넘어졌다가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기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너는 계속 넘어져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친구가 말해줘야, 비로소 ‘내가 정말?’, 나 자신을 문득 새로이 돌아볼 수 있곤 합니다. 

양다솔 작가의 친구들은 활활 타오르며 다가오는 작가의 애정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작가가 넘어졌을 때 가만히 그가 다시 일어나기를 옆에서 기다려 줍니다. 작가가 기어이 일어나고 나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라고 가만히 등을 밀어줍니다.  

네 발 자전거의 보조 바퀴 2개는 그 보조를 떼게 되는 순간에 가장 의미있는 물건일 것입니다. 두 발 자전거 타기를 처음 배울 때 등을 밀어주는 손은 그 손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미래를 향해 내 등을 부드럽게 밀고 있습니다. 양다솔 작가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양 작가의 친구들이야말로 바로 그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하루를 보내고도, 늦은 밤이면 나는 방에 들어가서 울기 시작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가슴을내려치며 통곡했다. 슬픔이 폭포처럼 쏟아지도록, 마음의 절벽이 무너지도록 두었다. 스투키는 방문을 열어젖히고 나에게 다가와 가만히 등을 쓸어주었다.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옷자락이 흥건해지도록 한참을 울었다. 내가 다시 잘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몇 십 번을 되물었다. 스투키는 매번 “그럼, 그럼” 하고 답했다. 

그런 밤이면 스투키는 빗을 들고 왔다. 빗살이 촘촘하고 손잡이가 두툼해서 기분 좋게 손에 감기는 빗이었다. 스투키는 우선 나를 푹신한 이불에 눕히고서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스투키의 둥근 그림자가 천장에 일렁였다. 스투키는 내 머리맡에 앉아서 눈물로 잔뜩 얼룩진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한 올도 빠짐없이 넘겨주었다. 그리고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우선 머리끝에 엉킨 부분들부터 조심스럽게 풀어내야 했다. 아무렇게나 뭉쳐진 머리카락을 스륵스륵 한 올 한 올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러다 일순간 마음이 벅차오른다. 순간의 진실이 불어온다. 친구의 침묵이 마음 속으로 전달된다. ‘다솔아, 나는 이제 네가 그런 것에 마음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함께라고 믿는 순간에 우리는 함께 있어. 네가 더 좋아하는 일들에 마음을 썼으면 해.’ 친구가 하지도 않은 말이, 내 마음속에서 피어난다. 

친구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많겠거니 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친구들을 통해 바라본 스스로의 성장을 뜨겁게 기록하고 있는 글들입니다. 그 기록의 어떤 솔직함에 끌렸습니다. 허공에 발버둥치는 심정으로, 억누를 수 없는 초조감에 휩싸여서 지나게 되는 날들이 있죠. 요즘 저도 조금 그런 상태인 것 같습니다. 자기 마음 깊은 곳의 가장 아픈 혈들을 사정 보지 않고 꾹꾹 눌러 치료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택한 것 같은 양 작가의 솔직한 문장들이 제 마음에도 닿았습니다. 
 
상실은 빗의 속도로 흘러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반들반들 빛나는 머리카락을 하고, 나는 절벽 같은 언덕을 넘었다. 어제는 스투키의 촘촘한 빗살 사이로 흘러갔다. 어떤 서두름도 없이, 아다지오와 안단테의 속도로. 그러다 문득, 나는 다시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스투키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럼에도 다시 새로운 언덕 앞에 서게 될 것임을 안다. 언젠가 그 언덕을 넘었었다는 사실조차 잊을 것임을 안다. 모든 것이 손쓸 수 없이 엉켜버릴 수도 있음을 안다. 새로 찾아올 밤에는 머리를 빗겨주는 스투키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아무튼] 시리즈가 오늘 읽는 [아무튼, 친구]로 벌써 57권째에 다다랐습니다. [북적북적]을 진행하는 세 명의 기자 모두 이 시리즈를 좋아합니다. 여러 권의 [아무튼]이 북적북적에서 읽혔습니다. 저는 그러고 보니까 [아무튼, 술]과 [아무튼, 술집]을 읽었더라고요. (사람이 너무 투명한 게 아닌가, 겸연쩍어집니다.)  

제가 [아무튼] 시리즈를 좋아하는 여러 이유 중에 하나는, [아무튼]에 생활인 작가들이 많이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각자 생업을 가진, 정말 글쓰기를 좋아하고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아니, 노력한다는 말로는 부족하게 발버둥치는,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나서 풀썩 쓰러졌다가도, 문득 돌아누워 노트북을 켜는 사람들. 양다솔 작가의 문장들은 그 ‘발버둥’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솔직한 느낌이라 정이 갔습니다.  

내 발버둥이 허공만 차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대해 입도 열지 못한 채 어느 지하철 차창가에서, 버스 한 켠에서, 남들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채로 사무실 한 구석에서, 혹은 널따란 거실일지언정 누운 게 누운 게 아닌 마음으로 지금 흔들리고 있는 [북적북적] 가족들이 있다면. 오늘의 [북적북적]은 그 마음들에 좀더 가 닿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함께 해 주시는 모든 분들, 늘 고맙습니다. [북적북적]은 그 어떤 때에라도 잠깐 찍을 수 있는 편안한 쉼표가 되어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새삼 바라봅니다. 

*위고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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