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거짓 답변까지 늘어놓으며 재벌가 감싼 관세청

'마약 밀수 혐의' 재벌가 인사

국내 재벌가 인사가 대마 성분이 함유된 물품 반입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최근 검찰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계열사 대표이기도 한 A 씨는 자신의 비서를 통해 흔히 CBD라 불리는 칸나비디올(cannabidiol) 함유 약품을 들여오려 한 혐의를 받습니다. 대마의 일종인 햄프에서 추출한 CBD는 뇌전증 치료 등 목적으로 의약품에 활용되지만, 우리나라는 마약으로 분류하고 있고, 개인의 반입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적발은 세관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국제우편으로 들어오던 약품을 서울본부세관이 포착했고, 관련 조사를 진행한 뒤, A 씨를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 기소의견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송치했습니다.
 

서울세관 (사진=관세청 제공, 연합뉴스)
 
이러한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자 A 씨 측은 관련 사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했습니다. A 씨가 지인으로부터 숙면에 도움을 주는 약품을 추천받아 비서에게 한국에서도 이를 구할 수 있는지 말했을 뿐인데, 비서가 '직구'로 구매했다는 겁니다. CBD가 포함되어 있는 약품인지도 전혀 몰랐고, 서울세관에 출석해 관련 검사도 받았지만 전부 음성이 나왔다고도 덧붙였습니다. '헤프닝'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기소의견을 냈던 세관에 사실관계에 대한 '크로스 체크'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본부세관 관계자는 기소 또는 불기소 의견 여부, 검찰 송치 일자, 심지어는 수사를 하기는 했는지조차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밝혔습니다. 피의사실을 공표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실적 홍보' 보도자료 내더니…재벌가 사건은 유독 "피의사실 공표 금지"

수사기관이 아직 실체를 파악하지 못해 한창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말을 아끼는 건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서울세관이 수사를 통해 '기소의견'을 달아 검찰에 송치한 건입니다. 결론까지 내놓고서는 대상자를 불러 조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조차 언급 못하겠다는 게 의아했습니다. 더군다나 그간 서울세관은 자신들의 수사 결과를 보도자료로 만들어 실적 홍보에 적극 활용해 왔습니다.
 

관세청 관련 취재파일 용

해당 내용이 알려지기 엿새 전인 5월 25일, 서울세관은 정승환 세관장 명의로 보도자료를 배포합니다. 공공기관 근무복을 부정 납품한 48살 무역업자를 적발해 검찰에 송치했다는 내용입니다. 적발 시기는 물론, 구체적인 혐의 내용과 과징금 처분 결과 등이 상세히 담겨있습니다. 납품 거래도를 이미지화해 범행 구조에 대한 이해까지 도왔습니다.
 
2023. 5. 25 서울본부세관 보도자료 中

최근 사례 외에도 서울세관 홈페이지를 둘러보면 활약상이 담긴 보도자료가 꽤나 많이 게시되어 있습니다. ▲7인승 수입 SUV를 9인승으로 속여 허위 신고해 관세법을 위반한 수입업체를 적발(2022. 5. 31) ▲ 저가의 외국 액세서리를 원산지 세탁한 인도인 무역업자 38살 남성과 한국인 공범 2명을 대외무역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 송치(2022.12.12.) ▲짝퉁 의류를 밀수해 판매한 수입업체 대표 2명 적발(2022. 2. 3) 등입니다. 서울세관의 상위기관인 관세청 역시 보도자료 배포에 적극적입니다.

관세청이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 간 관세청이 세관의 범죄 적발 실적을 보도자료로 배포한 건 275건에 달합니다. 담당 범위는 다르지만 같은 특별사법경찰의 테두리에서 운영되는 철도특별사법경찰대(최근 5년간 5건)나 서울특별시 민생사법경찰단(최근 5년간 86건), 경기도 특별사법경찰단(최근 5년간 183건)과 비교했을 때 훨씬 많습니다. 이렇다 보니 관세청과 서울본부세관이 재벌가 A 씨의 범행에 대해서만 유독 '피의사실 공표 금지'를 내거는 상황이 더 의문스러웠습니다. 어떤 사람과 조직의 범행 사례는 실적 홍보용으로까지 활용하고 있으면서 어떤 사람의 범행은 왜 일절 언급조차 못 하는 건지, 그 이유와 근거를 물어봤습니다.
 

대검찰청 허락받고(?) 보도자료 냈다는 관세청

서울본부세관은 '보도자료 배포와 재벌가 A 씨에 대한 피의사실 언급 문제는 다르다'는 취지로 답하면서도 판단의 근거와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상위기관인 관세청은 타 부처의 훈령을 근거로 들고 나왔습니다. 법무부훈령인 '형사사건의 공보에 관한 규정'을 준용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타 부처의 훈령이나 행정규칙을 준용하는 게 아주 드문 일은 아닙니다. 다만, 준용하기로 결정한 시기 등 명확한 근거가 존재합니다. 예컨대, 대구광역시 민생사법경찰은 경찰청의 '경찰수사사건 등의 공보에 관한 규칙'을 준용하고 있고, 준용 결정은 2014년에 이뤄졌습니다. 훈령 준용 시기와 근거를 묻는 질문에 관세청은 엿새 만에 서면으로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훈련 준용에 대해 언급한 것은 법무부, 검찰에서도 이러한 내부규정에 의해 철저히 관리하고 있어 관세청도 이를 참고하고 있다는 취지"
- 관세청 공식 서면 답변 中 (2023. 6. 8)

공식적으로 준용하기로 결정했다는 건 아니고, '참고'해왔다는 답변입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수사결과를 토대로 한 홍보성 보도자료 배포 배경에 대해선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지금까지 관세청은 미리 대검과의 협의를 거친 경우에 한해 적발 사례 등을 홍보"
- 관세청 공식 서면 답변 中 (2023. 6. 8)

지난 5년 간 내놓은 275건의 보도자료 전부 대검찰청의 허락을 받고 냈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답변입니다. 법률 상 세관 특별사법경찰이 담당 검사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검찰청이 관세청의 보도자료 배포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을 갖진 않습니다. 대검에 관련 내용을 물었더니 황당하다는 반응과 함께 "사실무근"이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다음날엔 관세청 관계자가 다시 연락해 왔습니다. "대검 연락을 받았다"며 "서면답변을 잘못했다"고 밝혔습니다.  각 세관을 지휘하는 지방검찰청과 협의한다는 걸 대검찰청과 협의한다고 잘못 기재했다는 겁니다. 정부 부처가 언론사에 보내는 공식 서면 답변은 통상 여러 결재라인을 타고 검토 과정을 거칩니다. 관세청의 이번 서면 답변 역시 최초 질의 후 엿새, 서면 질의 발송 후 사흘 넘게 걸렸습니다. 그렇게 나온 서면 답변을 타 부처의 연락을 받고 잘못 기재했다며 뒤집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자의적 판단과 거짓 답변

결국 서울세관, 관세청이 재벌가 A 씨의 혐의에 대해선 언급조차 못 하면서 다른 사람의 범죄사실은 홍보성 보도자료로 배포하는 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와 근거를 끝내 듣지 못했습니다. 그저 형법 상의 피의사실공표 금지 규정만 '전가의 보도'마냥 내세우고 있습니다.
관세청 사칭 금품 갈취 보이스피싱 주의

수년 전 조국 전 법무장관 일가 사건을 둘러싸고 해당 규정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한창 커졌었습니다. 당시 제기된 우려의 목소리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상황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해당 규정이 수사기관의 뜻대로 국민의 알 권리를 자의적으로 제한하는 도구로 전락하여 '힘 있는 자만을 위한 규정'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관세청의 수많은 보도자료 배포와 재벌가 수사에 대해선 일절 언급도 않는 현 상황의 간극을 바라보니 당시의 우려가 다시 떠오릅니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민감하지 않은 일반인에 대한 사건 정보는 공개되는 반면, 공적인 감시의 필요성이 훨씬 큰 인물의 행위에 대한 정보는 사실상 차단됐습니다. 명확한 근거 규정도 없이 자의적인 판단으로 이러한 차이를 만들었다는 게 놀랍습니다. 관련 내용에 대한 언론사 취재에 거짓 답변까지 내놓는 걸 보니 섬뜩합니다. 그리고 관세청과 세관이 유독 이 사건에 피의사실 공표 금지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한 이유가 무엇일지 의구심이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재벌가 A 씨에 대한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중앙지검은 현재 사건 기록을 살펴보며 보완수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세관에게선 들을 수 없었던 이번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확인하게 되길 기대합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