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빅픽처] '귀공자', 박훈정 감독의 퇴보…두 배우의 빛바랜 호연

귀공자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겐 단 하나의 대표작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감독이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이 영화계다. 차기작을 찍을 수 있는 감독이라는 건, 적어도 직업인으로서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훈정 감독에겐 영화 '신세계'(2013)가 있고, '마녀'(2018)가 있다. 느와르 장르에서 장기를 발휘하며 두터운 팬층도 확보했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인 박훈정은 감독으로 입봉한 뒤에도 왕성한 창작욕을 발휘하며 매년 신작을 내놓고 있다. 다만 완성도와 신선도 면에서 갈수록 퇴보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최근 영화들은 명작의 레퍼런스 거나 자기 복제의 결과물이다. 대표작 역시 그 범주 안에 있지만 적어도 그 작품들은 개성과 비틀기를 가미한 재창조에 가까웠다.

귀공자

지난 21일 개봉한 '귀공자'는 박훈정의 졸작 리스트에 포함될 만하다. '코피노'(Kopino, 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라는 소재를 끌고와 필리핀과 한국을 잇는 추격전을 펼친다. 엄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의 고향인 한국을 찾은 마르코(강태주)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를 쫓는 귀공자(김선호), 그리고 각자의 목적을 위해 마르코를 노리는 한이사(김강우)와 윤주(고아라)가 더해지면서 영화는 추격전의 가속도를 올린다.

촬영, 조명, 미술로 특유의 눅진한 무드를 조성하고, 만화같은 비현실적 액션에 장난끼 넘치는 대사들이 더해져 박훈정표 느와르 가 또 한 편 완성됐다. 여기에 개연성 부족의 시나리오가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떨어뜨린다는 것까지 최근작들과 궤를 함께 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귀공자의 독특한 캐릭터를 전시하듯 늘여놓는다. 그리고 추격전이 시작되면 물음표를 끌고 가는 전개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박훈정 감독은 '귀공자'에 얽힌 두 가지 반전을 후반부에 제시하는데, 모두 다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치명타다.

귀공자

첫 번째 반전은 영화 내내 물음표를 생성하는 귀공자의 추격전에 대한 답이다. 귀공자와 마르코는 영화 내내 쫓고 쫓길 뿐, 정서적 교감이나 밀착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주인공의 대사와 플래시백으로 친절하게 설명한다 해도 길 잃은 개연성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영화는 인물이 전혀 할 것 같지 않은 행동을 한 이유로 정체성을 언급한다. 서사는 쌓아야 하고, 드라마는 스며들어야 한다. 귀공자의 비밀은 제시된다. 너무 쉽고, 간단하다.

두 번째 설정은 두 시간 동안 영화를 봐 온 관객을 바보로 만드는 장난질에 가깝다. 이를 쿠키 영상에 삽입해 재밌는 해프닝처럼 다루려는 의도가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사의 축이 흔들리지 않는 건 아니다. 장르의 톤 앤 매너까지 망가뜨리는 무리수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과 피와 살이 튀는 벌떼 액션이 끝난 후 남는 건 장르적 쾌감이 아닌 허탈함이다. '코피노', '필리핀→제주도', '추격전'과 같은 주요 키워드만 놓고 시나리오를 급조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개연성은 구멍 나 있기 때문이다.

귀공자

유일한 장점을 꼽자면 배우를 보는 맛이 있다는 것이다. 박훈정 감독의 영화 속 배우들은 공통적으로 캐릭터 플레이를 한다. 절체절명 상황에서도 영화적 노림수가 보이는 유머를 치며, 액션도 게임이나 만화처럼 소화한다. 모든 게 과하기 때문에 배우 개개인의 호감도가 캐릭터의 매력을 상승시키는데 큰 지분을 차지한다.

김선호가 연기한 귀공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추격자'로 설정돼 있다. 말끔하게 수트를 차려입고, 신출귀몰한 액션을 펼치는 '초인'에 가깝다. 또한 발을 땅에 붙이고 있을 때는 광기 어린 눈빛과 조커 같은 입꼬리를 만들며 연신 주인공을 향해 농을 친다.

귀공자는 '광인'과 '돌아이'를 넘나드는 익살스러운 캐릭터다. 다소 유치한 콘셉트가 캐릭터의 개성으로 여겨지는 건 김선호의 개인기와 매력이 낳은 결과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영화계에 김선호라는 배우의 역량을 보여주는 쇼케이스로는 성공적이다.

198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발탁된 신예 강태주도 인상적이다. 김선호만큼 화려한 캐릭터나 연기는 아니지만, 정체성에 대한 고뇌를 신예답지 않게 차분하게 표현해 냈다.

귀공자

김강우가 연기한 '한이사'는 박훈정의 영화에서 배우만 바꿔 등장하는 복붙 같은 캐릭터다. 이는 감독이 선호하는 일종의 필요조건 같은 캐릭터이나 반복되다 보니 신선함과는 거리가 멀다. 김강우는 영화 내내 기능적인 연기로 감독이 원하는 캐릭터의 전형을 보여준다.

박훈정 감독은 지난 10년간 8편의 영화를 발표했다. 그중 절반은 흥행했고, 나머지는 실패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영화에는 창작자의 고민과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민없이 양산하는 비슷비슷한 장르물은 수명이 길 수가 없다. 이제 흥행 결과보다 더 중요한 건 감독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다.

(SBS연예뉴스 김지혜 기자)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