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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인어는 어쩌다 여성이 되었을까…남성 인어는 어디로?

[어쩌다] (글 : 손가인)

스프 어쩌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인어를 좋아했습니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풍성한 머릿결과 보석같이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꼬리를 가진 젊은 여성의 이미지가 한창 '디즈니 공주'에 빠져 있던 꼬마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사랑을 위해 삶을 팽개치고 뭍으로 올라왔다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리는 비극적인 동화도 그렇게 매혹적일 수 없었습니다.

인어 이야기가 안데르센의 동화나 서양 신화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나 미 대륙에서도 전해져 왔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을 땐 가슴이 뛰었습니다. 같은 형상을 한 존재의 전설과 목격담이 세계 곳곳에서 이렇게나 많이 기록됐는데, 어쩌면 인어의 존재는 상상이 아닐지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도 싹텄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궁금했던 것은 왜 인어는 아름답고 젊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속에 에리얼의 아버지이자 아틀란티카의 왕인 '트라이톤'이 있긴 했지만, 그를 제외하고 남성인 인어를 상상해 보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인어가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생각해 봐도 주로 여성 인어가 인간 남성을 사랑하는 이야기가 익숙하지, 남성 인어의 상대로 인간 여성이 등장하는 것은 흔치 않습니다. 애초에 인어 사회는 성비가 굉장히 불균형한 여초 집단인 걸까요? 어쩌다 인어의 상반신은 여성이 된 걸까요?

인어공주의 조상, 세이렌


몸의 절반이 인간 여성이고 나머지 절반은 동물의 모습을 한 존재를 그린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9세기경 호메로스가 썼다고 알려진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입니다. 반인반수(半人半獸)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들을 유혹하고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하지만 이 책 어디에도 세이렌의 하반신이 어떤 동물의 모습이었는지 정확히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이렌은 오늘날 인어공주의 조상이라 받아들여지지만, 오히려 기원전 6세기 그리스 도자기에 그려진 세이렌은 노래를 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새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Terracotta vase in the form of a siren
지금의 우리에게 익숙한 물고기 꼬리가 달린 인간의 가장 오래된 이미지는 8세기말 카롤링거 왕조 때 쓰인 한 라틴어 필사본에 등장합니다. 여기에는 성모마리아가 마귀를 쫓아내는 의식을 행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이 마귀의 모습이 꼬리가 달리고 머리카락이 긴 반인반어(半人半魚)입니다. 그러나 이 존재가 호메로스의 작품에 등장한 세이렌인지 또 다른 바다의 요정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반신이 물고기인 세이렌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중세 유럽의 베스트셀러였던 그리스어 우화집 『피지올로구스(Physiologus)』(2세기 경)와 9세기 영국 맘즈베리의 수도사 앨드헬름입니다.

특히 『피지올로구스』는 4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고 이후 수 세기에 걸쳐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면서 유럽 대륙을 매혹합니다. 이 책에 등장한 세이렌의 모습은 머리에서 배꼽까지는 인간, 하체는 새의 모습을 한 채 뱃사람들을 노래로 유혹하고 잠재운 후 먹어 치우는 해로운 존재입니다.

한편 수도사 앨드헬름은 로마에서 바다 괴물 '스킬라'의 부조상을 본 후 이를 묘사하면서 "세이레네스처럼 처녀의 머리와 젖가슴을, 바다표범의 배와 돌고래의 꼬리를 지니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존재가 미모로 뱃사람을 유혹한다고 설명하죠.

John William Waterhouse, Ulysses and the Sirens(1891)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Melbourne Purchased, 1891, ⓒ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이후 『피시올로구스』가 활발하게 개작되던 중, 앨드헬름의 이야기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면서, '세이렌'은 새의 하반신을 가지거나 물고기의 하반신을 한 다양한 모습으로 재창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절반은 인간이 아니지만, 상반신은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인어라는 상상에 살이 붙여졌습니다. 갈수록 새의 전통은 사라지고 물고기 꼬리를 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점차 주를 이루게 됩니다.

특히 중세 기독교는 교리를 정당화하는 데 '세이렌'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십자가형을 연상시키듯 배 기둥에 몸을 묶은 오디세우스를 육욕으로 유혹하는 악(惡)이 여성의 상체를 가진 세이렌이었던 것입니다. 성서 속 최초의 여성 이브는 뱀의 꾐에 넘어가 남성을 타락시켰기에 이브의 자손인 여성들은 악한 존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오직 단단한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만이 원죄의 바다에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교훈을 바로 인어 이야기로 상징화한 것이죠. 15세기 말경 굳어진 꼬리가 달린 세이렌의 모습은 유혹적이고 위험한 여성의 은유로 활용되었습니다.

Frederic Leighton, The Fisherman and the Syren (1856) ⓒ Bristol Culture, photography by Public Catalogue Foundation/Dan Brown
하지만 잔인한 유혹자로 남을 뻔한 인어의 운명은 덴마크의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 덕에 180도 바뀌게 됩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열병을 겪던 안데르센은 북유럽 지역에서 전해져 오던 '물의 정령' 모티프를 가져와 작품을 집필합니다, 그 덕에 인어는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여리고 아름다운 소녀의 이미지로 탈바꿈했습니다.

이후 월트 디즈니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애니메이션화 하면서 현대인의 상상 속 인어는 '사랑에 지고지순하면서도 이국적인 신비로움을 가진 여성'이 된 것이지요.
 

박물학과 인어

인어가 여성형 상반신을 갖게 된 이유를 '박물학(博物學)'적으로 살펴본 연구도 있습니다. 나카마루 테이코(中丸禎子)(2016)는 근대 박물학의 성별 편향적 시각이 인어의 상반신을 여성의 모습으로 고착시켰다고 말합니다.

박물학이란 동·식물, 광물의 종류와 성질 등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박물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대로까지 이어집니다.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박물학은 인어를 실제로 존재하는 생물로 여겼습니다. 고대 로마의 박물학서인 플리니우스의 『박물지』(77)에는 '네레우스'와 '트리톤'에 관한 보고가 있습니다.

네레우스는 그리스 신화 속 바다의 신 폰토스의 아들이며, 트리톤은 그리스 신화 속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입니다. 모두 남성형 반인반어이지요. 이 『박물지』는 무려 18세기까지 널리 읽히며 박물학의 기초 자료로 쓰였습니다.

중세에는 종교의 영향으로 박물학이 정체됐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와 대항해시대가 도래하면서 해외 문물이 유럽 대륙에 쏟아져 들어왔고,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박물학이 다시 빛을 발합니다. 지금까지는 상상만 하던 다양한 형상을 비교적 정확한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이때 세계 각지에서 쓰인 보고서에는 인어를 목격했다는 기록이 넘쳐납니다. 『콜롬버스 항해지』(1492-1493)에는 "리오 데 오로를 거슬러 올라갈 때 해상 높이 3필(匹)의 인어가 날아오르는 것을 봤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심지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원숭이의 상반신과 대형 생선의 하반신을 이어 붙여 제작한 가짜를 '인어의 미라'라는 이름으로 수입해 와 거래하기도 했습니다.

Mermaid(1700/1799) Photo: ⓒ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르네상스 시기 인어에 대한 목격담에서 중요한 지점은, 기독교의 영향 아래 여성형으로 한정되었던 인어의 표상이, 마치 실제 생물처럼 '암수 한 쌍의 인어'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이 물고기는 비정상적으로 크고…(중략)…코가 소와 닮았다. 팔 같은 지느러미가 두 개 있다. 암컷에는 젖꼭지가 두 개 있어 새끼는 그 젖을 마시며 자란다"
─마갈량이스 『브라질지』(1576)
"나일강에서 낚아, 로마 교황에게 헌상. 상반신은 인간과 비슷, 머리카락은 금발, 배에는 뼈가 있고 팔에는 관절이 없으며 하반신은 물고기. 한 필은 여성, 한 필은 남성으로 보인다"
─앙브루아즈 파레 『괴물과 위협』(1582)

17, 18세기에 해부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덴마크의 토마스 바르톨린(Thomas Bartholin, 1616-1680)과 같이 인어의 존재를 해부학적으로 증명하려는 박물학자도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인어가 고대 인어의 기록처럼 인간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은 거짓이지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남성을 유혹하는 것은 진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Bartholin, Thomas (1654年)

인어의 존재에 대한 회의

그러나 '어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웨덴의 박물학자 페테르 아르테디(Peter Artedi, 1705-1735)는 '실재하는 생명체로써의 인어'에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의 책 『어류학 혹은 어류에 관한 전 저작』(1738)에서 '평미목' 분류에 향고래, 돌고래, 매너티 등과 함께 인어(Siren)를 포함합니다. 하지만 인어가 정말로 존재하는가 하는 데는 판단을 보류합니다.
"해인(Homo mariunus)은 매너티나 다른 모든 것과는 전혀 다르다. 즉, 대략 바르톨린의 인어 (Siren)과 같은 것이다. (중략) 바르톨린의 인어는, 아메리카의 마르세유 근처의 바다에서, 상인들에게 발견되어 포획되었다.

흉곽 부분의 두 개의 지느러미는 얇은 가죽으로 연결된 손가락과 비슷한 다섯 개의 뼈로 되어 있고, 이것을 사용해 헤엄친다. 옆으로 된 상태에서의 반경은 손가락의 폭으로 4개 분량일까 말까 한다.

이 동물을 검증하고, 거짓 이야기인지 진짜 물고기인지를 확인하는 진정한 어류학자가 나타나면 좋을 텐데. 본 적도 없는 것에 대해서는, 부주의하게 무언가를 공언하기보다, 판단을 보류하는 편이 낫다."

아르테디가 젊은 나이에 급사하면서, 동료이자 친구였던 칼 폰 린네(Carl von Linne, 1707-1778)가 그의 저작을 이어 집필합니다. 린네는 근대 식물학과 분류학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진 박물학자이지요. 린네는 아르테디가 만든 '평미목'이라는 항목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긴 하지만, 평미목에 매너티를 포함한 대신 인어는 제외합니다.

다만 '모순강(Paradoxa)'이라는 항목을 마련해 히드라, 사티로스, 용처럼 실재를 입증할 수 없는 동물을 분류하고 그 안에 인어를 넣습니다. "산 상태든, 죽은 상태든, 현물이 확인된 적이 없고, 또 충분, 확실, 완전하게 기술되어있지도 않은 이상 의심스럽다"라는 평가와 함께 말이죠.

수년 뒤 판을 개정하면서는 '모순강' 항목 자체를 삭제합니다. 실재 생물이라 여겨지던 '인어'가 상상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반면 함께 평미목에 속했던 매너티는 인어와 명확하게 분리되어 포유동물로 남습니다.

매너티와 인어, 짐승과 여성

여기서 짚어볼 것은 매너티와 인어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인어의 실재 여부를 논할 때, '바다의 포유류인 매너티나 듀공이 수유하는 모습이 마치 사람 같아서 이들을 인어로 착각한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매너티와 인간 모두 포유류이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린네가 고안한 이 '포유류'라는 명칭, 좀 이상하지 않나요?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것은 포유류 중 암컷뿐이고, 암컷이 젖을 먹이는 것도 포유류의 생애 중 아주 단기간에 불과합니다. '포유'라는 보편적이지 않은 생물학적 특징이 어쩌다 '털이 있고 새끼를 낳는 네 발 짐승'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을까요.

이에 관해 미국의 연구자 론다 쉬빙거(Rhonda Schibinger)는 린네의 여성관을 지적합니다. 다른 박물학자들은 인간을 포함한 이 동물의 부류에 붙일 이름으로 '태생동물(胎生動物)' '피모동물(被毛動物)' '다모동물(多毛動物)'을 제창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성에게 가정 내의 어머니 역할만을 강요했던 린네는 '포유류'라는 이름을 고집했습니다.

실제로 린네는 당시 만연했던 '유모(乳母)' 문화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유모 제도 때문에 유아 사망률이 높다고 주장한 그는, 고래나 사자, 호랑이 등 사나운 대형 짐승의 암컷처럼 인간 여성도 '모유'로 '새끼'를 길러야만 한다고 믿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카마루 테이코는 '유방'을 매개로 매너티(혹은 듀공)과 인어를 연결하는 박물학적 시각에 젠더적 문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훗날 린네의 연구를 정밀하게 조사해서 『동물계』(1817)라는 책을 쓴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2)는 매너티, 듀공, 스텔러바다소를 '포유강 고래목 초식속'으로 분류합니다. 아래는 매너티에 관해 퀴비에가 기술한 내용입니다.
가슴지느러미 끝에는 손톱의 흔적이 남아있어, 엎드려 나아가거나, 새끼를 운반하거나 하기 위해 교묘하게 가슴지느러미를 이용한다. (중략) 그 생활양식 때문에 '소'나 '해우'라고도 불리고, 그 유방 때문에 '해녀(femme marine)'라고도 불린다.

듀공을 설명할 때는 그 별명으로 '세이렌(sirene)'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새끼'나 '유방'처럼 암컷의 생물학적 특성을 나타내는 키워드를 근거로 매너티와 듀공을 여성 인어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봤듯 고대와 중세, 르네상스기의 박물학에서 인어는 암수 한 쌍이 모두 있는 생명체였습니다.

"죽어갈 때 한탄의 노래를 부른다"와 같은 묘사로 마치 감정과 인지 능력이 있는 듯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이후의 박물학은 인어를 여성으로 한정하고 그 모델을 짐승에서 찾고 있습니다.

게다가 바다소가 "젖이 달려 있고 종종 물 밖으로 상체를 꼿꼿이 세운다"라고 했던 퀴비에의 주장과 달리, 바다소는 물 밖에서 상반신을 세운 채 새끼에게 젖을 먹이지 않습니다. 젖가슴이라고 부르는 것도 겨드랑이 부근에 나 있는 젖꼭지일 뿐이라고 하니 굳이 유방을 들먹이며 인어를 여성화시키는 박물학의 시선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바다소 수유
사실 동물, 식물, 광물을 채집하고 분석해 기록하는 박물학은 인간 스스로를 다른 존재들과 분리해 우월하다고 여기는 학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만이 가졌다고 여겨졌던 '지성'으로 자연 상태 그대로인(미개한) 다른 생명체들을 하나하나 파편화해 뜯어보는 작업이기 때문이지요.

박물학을 통해 인간의 분석 대상으로 전락한 '짐승'으로 규정지어진 매너티와 듀공, 착각할 만큼 이들 짐승과 닮아 있는 유방을 가진 여성의 몸. 대부분 상반신을 훤히 드러낸 여성형으로 굳어진 현재의 인어 형상에는 분명 찝찝한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남성 인어는 어색해

고대 신화로 거슬러 올라가면 분명 상반신이 남성인 반인반어도 존재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어 표상이라 불리는 바빌로니아 신화 속 '다곤'은 물고기의 피부를 한 남성이거나 하반신이 물고기인 남성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나 바다의 정령 '네레우스'도 남성이고, 포세이돈의 아들 '트리톤'도 반인반어입니다. 스웨덴 민화 속 물의 정령 '넷켄'도 전신이 남성이지요.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에서 트라이톤도 트리톤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남성 인어입니다.

하지만 이들 고대 신화나 민담 속 신 외에 보편적이고 평범한(?) '남성 인어'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당장 인터넷에 '인어'를 검색해 봐도 대부분이 긴 머리를 낭만적으로 늘어뜨린 여성의 상반신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소비되는 인어의 표상은 거의 모두가 여성이고, 남성 인어는 '멸종'되다시피 한 것입니다.

여성형에 편향되어 있는 인어에 대한 인식을 고찰한 흥미로운 논문이 있습니다. Philip Hayward(2017)는 유방이 있는 상반신으로 '여성성'을 드러내기 쉬운 여성형 인어와 달리, 남성 인어의 '남성성'은 상반신만으로는 드러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남성 인어의 경우 상체가 제아무리 근육질이라 하더라도 물고기의 하반신으로는 남성성을 상징하는 생식기가 생략된 모습이기에 강력한 성별 표시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래전부터 남성형 인어의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고 하더라도, 남성형 인어는 여성형 인어만큼 (성적으로) 확실한 인상을 남길 수 없고, 이것이 '인어'의 기본 형태를 여성의 상반신으로 고착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디즈니 <인어공주> 속 트라이톤이 들고 있는 삼지창이 근육질의 상반신만으로는 표현하기에 부족했던 남성성과 가부장적 힘을 상징하는 도구로 활용됐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Linda Ågren(2013)은 이 현상이 언어학적으로도 나타난다고 분석합니다. 옥스퍼드 사전에 'merman'(남성 인어)를 검색하면, "like a male mermaid(남성인 인어)"라는 용어로 정의를 내린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여성형 인어 'mermaid'는 별다른 성별 부연 설명이 붙지 않는 독립된 형태인데, 이는 인어의 기본형이 여성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Linda가 조사한 33개의 언어 중 18개의 언어에는 아예 남성 인어를 표현하는 단어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어가 생활하는 '물'의 속성에 주목한 경우도 있습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고 물고기는 다량의 알을 낳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물에 사는 인어는 자연스레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원시적인 어머니, 그리고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oxford english dictionary - merman. 현재의 옥스퍼드 사전에서 'merman'을 검색한 결과. 여전히 'mermaid'의 'male counterpart'라고 정의되어 있다. 2023년 6월 6일 검색.

한국의 인어

지금까지 살펴본 인어의 모습은 주로 서양의 시각에서 바라본 형상입니다. 물론 동양에도 인어에 대한 기록이 존재합니다. 동아시아의 인어에 대한 기록은 중국 선진(先秦)시대에 쓰인 것으로 알려진 신화집·지리서 『산해경(山海經)』을 출발점으로 봅니다. 아래는 『산해경』 등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인어 묘사입니다.
다시 북동으로 이백 리를 가면 용후산이 있다.…(중략)…콸콸 흐르는 물이 나와 동쪽에서 황하로 흘러간다. 그 속에는 인어가 많은데 그 생김새는 제어(䱱魚)와 같아 발이 넷이고 그 소리는 어린아이 같다. 이를 먹으면 피곤한 증세[㿄疾]가 사라진다. ─「北次三經」, 『산해경』

저인국이 건목의 서쪽에 있는데 그들은 사람의 얼굴에 물고기의 몸을 지녔고, 발이 없다. ─「海內南經」, 『산해경』
바다의 인어(人魚)가 동해에 있는데 큰 것은 길이가 5, 6척이나 된다. 모습은 사람과 같으며. 눈썹, 눈, 코, 입, 머리가 모두 미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피부는 옥처럼 희고 비늘이 없다. 가느다란 털이 나 있는데, 오색빛이 나고 가볍고 부드러우며 길이는 1, 2촌가량이다. 머리카락은 말총 같으며 길이는 5, 6척이다. 생식기는 인간 남자, 여자의 것과 다를 바 없다. 바닷가에 사는 홀아비나 과부들이 대부분 잡아다 연못에 넣어 기른다. 교접할 때도 사람과 다르지 않으며 사람을 다치게 하지도 않는다. ─『박물지(博物志)』

(오른쪽) The ningyo (人魚) aka ryōgyo (鯪魚, 'hill-fish') 데라지마 료안(寺島良安),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volume 80 of 81. (왼쪽) The Teijin (氐人), or the "Di people". 데라지마 료안(寺島良安),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volume 15 of 81
명청(明淸) 시대에는 중국의 인어 이야기가 『태평광기(太平廣記)』, 『산해경(山海經)』, 『술이기(述異記)』 등을 통해 조선으로 전해집니다.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한 인어 기록이 남아있는데, 조선 후기 정약전이 지은 『자산어보(慈山漁譜)』에도 우리나라에 전해져 오는 다섯 종류의 인어(제어(䱱魚)와 예어(鯢魚), 역어, 교인(鮫人), 그리고 부인(婦人)이 물고기인 경우)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지금 서남해에 두 종류의 인어가 있는데 그 하나는 상광어(尙光魚)이며 모양이 사람을 닮아 두 개의 젖을 가진다. 본초(本草)에서 말하는 해돈어(海豚魚)이다. 다른 하나는 옥붕어이며 길이가 8자나 되며 몸은 보통 사람과 같고 머리는 어린아이와 같으며,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치렁치렁하게 아래로 드리워졌고, 하체는 암수의 구별이 있어 사람의 남녀와 서로 매우 닮았다. 뱃사람들은 이것을 몹시 꺼려 혹시 어망에 들어오면 불길하다 하여 버린다. 이것은 틀림없이 사도가 본 것과 같은 종류일 것이다.

한국 인어 서사를 연구한 강민경(2012)에 따르면 고려부터 조선까지 한반도에서도 인어의 한 종류인 '교인'에 관한 언급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인어와 관련한 한시들도 수백 편 남아있는데, 인어가 은혜에 감격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름다운 구슬이 된다는 이야기에 착안해 아름다운 것을 비유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인어의 눈물'을 활용했다고 하지요.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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