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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라면값 인하" 부총리…'진짜' 속내는?

'밀 가격 내렸으니 라면 가격 내려야' 발언의 이면

[취재파일] "라면값 인하" 부총리…'진짜' 속내는?
"라면값 내리면 우리야 정말 좋죠.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예요? 밀가루 말고도 인건비하고 포장재 가격 같은 게 다 포함됐을 텐데…"

세종정부청사에 근무하는 한 사무관이 식사 자리에서 한 말입니다. 라면 한 개의 가격을 좌우하는 요소들이 그만큼 많다는 걸 알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지난 주말 추경호 경제부총리의 발언이 큰 화제가 됐습니다. '국제 밀 가격이 50% 정도 내렸다. 그러니 라면값도 적정하게 내려야 한다', '소비자단체가 활발하게 압력을 행사해달라' 정도의 취지였습니다. 이쯤 되면 조금 헷갈립니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 만들겠다더니 라면 제조사들의 팔목을 비틀고 있는 겁니다.

저처럼 라면에 진심인 사람을 포함해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사람들에게 라면 가격 내려가는 건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입니다. 하지만 국제 밀 가격이 내렸으니 라면 가격 내려야 한다는 논리가, 퇴근길 맥줏집에서 나온 얘기가 아니라 한 나라의 경제부총리 입에서 나왔으니 이건 어떤 의도였는지 한번 따져봐야 할 문제가 됐습니다.
 

라면 제조사, 국제 밀 가격의 '직접' 영향권에 있을까?

국내 라면 제조사 중에 국제 시장에서 밀(원맥)을 직접 사오는 곳은 없습니다. CJ제일제당, 삼양사 같은 제분업체들이 밀을 수입, 밀가루로 만들어 라면 제조사에 팔고 있죠. 국제 밀 가격의 직접 영향권에 드는 곳은 제분업체인 셈입니다. 이들이 수입해서 가공 후 파는 가격이 라면 제조사들의 원가에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구조라는 뜻입니다.

한 제분업체 관계자에게 "라면 제조사들에 넘기는 밀가루 가격을 낮추겠다고 발표할 생각이 없는지" 물었습니다. 이 관계자는 "거래처(라면 제조사들)마다 납품 기준과 계약이 다 다르고, 계약을 갱신할 경우 기준을 정할 수 있겠지만 일괄적으로 가격을 낮추겠다고 선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답했습니다. 제분업체가 우선 가격을 낮춰야 라면 제조사들에도 '가격을 낮추라'고 압박할 수 있는데 추 부총리는 제분업체는 건너뛰고 국제 밀 가격의 '간접' 영향권에 있는 라면 제조사들을 겨냥한 겁니다.
 

"국제 밀 가격 50% 하락" vs "평년보다 여전히 비싸"

추 부총리의 "국제 밀 가격 50% 정도 하락"이라는 발언에 대해 이 관계자는 "밀 가격이 떨어진 건 맞지만, 작년 최고점에 비해 떨어진 것"이라며 "오른 가격에 비해 떨어진 것이지 평년과 비교해서는 여전히 높은 가격"이라고 반박했습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해외곡물시장정보를 살펴봤습니다. 밀 선물 가격은 2020년 8월 189달러(1톤당) 이후 지속적으로 우상향 곡선 형태입니다. 2022년 5월 419달러로 최고점을 찍더니 지난 5월 228달러까지 내려와 최고점 대비 약 46% 정도 가격이 떨어졌습니다.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2020년 1월 이후 183달러를 기록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 뒤로 이 가격대까지 돌아온 적은 아직 없습니다. 밀 선물 가격 등락의 영향은 4~6개월 시차를 두고 수입 가격에 반영됩니다. 밀 수입 가격은 지난해 9월 496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지난 2월 449달러로 떨어졌지만 이는 평년의 283달러와 비교하면 1.6배 높은 가격입니다. 추 부총리의 말도 맞고, 제분업체 관계자의 말도 맞는 셈입니다.
 

밀 가격 떨어지면 바로 라면 가격 인하 가능?

대형마트에 라면판매대 (사진=연합뉴스)

어제(20일), 현재 이 순간에 제분업체 공장에서 밀가루가 되고 있는 원맥은 3~6개월 전에 제분업체가 국제시장에서 사들인 밀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분업체가 올 1월에서 3월 사이 수입한 밀을 가공해 이윤을 붙여 라면 제조사들에 넘긴 겁니다. 밀 가격은 지금 하향세이니까 라면 제조사들이 더 싼 밀가루를 공급받는 시기는 올 3분기는 지나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라면 제조사가 가격이 50% 떨어진 밀로 라면을 만드는 시점은(제분업체가 가격 인하를 해준다는 조건이 있을 경우) 8월~11월 사이가 됩니다. 만약 추 부총리의 '청부 압력'이 먹혀서 제조사들이 라면값을 내릴 경우 이 시점이 유력할 수 있습니다. 다만 라면 한 개 생산하는데 밀이 차지하는 비중은 원가의 55~60% 정도인데 반해 노동력, 원자재, 전기, 가스, 수도, 운송 같은 비용이 다 올랐기 때문에 제조사들은 내리더라도 찔끔 혹은 아예 안 내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게다가 곡물 가격은 날씨와 전쟁 등 외부 요인에 따라 등락이 심한 품목입니다. 오죽하면 근원물가를 따질 때 농산물과 석유는 빼고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당시 밀 가격, 최고점을 찍었는데 앞으로도 다른 변수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라면 제조사들이 버틸 수 있는 이유들은 이렇게나 많습니다.
 

경제통 추 부총리, 이런 역학 관계 정말 몰랐나?

통계청이 매달 발표하는 소비자물가에서 '라면 물가'는 두 가지입니다. 분식집에서 판매하는 '외식'의 라면과 제조사들이 판매하는 '가공식품'의 라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난 5월 소비자물가 기준으로 '외식'의 라면 물가는 1년 전과 비교해 9.5% 올랐습니다. '가공식품'의 라면은 13.1% 상승했지요.

가격으로 따지면 라면 한 그릇은 500원~1천 원 사이 올랐고, 라면 한 개는 50원~100원쯤 인상됐습니다. 여기서 소비자 체감은 어떤 게 더 크게 다가올까요? 눈여겨볼 부분은 각각의 라면 품목이 소비자물가 통계에 기여하는 정도, 즉 기여도입니다. '외식'의 라면은 0.007에 불과하지만 '가공식품'의 라면은 0.036에 달합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외식'의 라면 가격이 좀 내려갔으면 하는 바람이 더 크겠지만, 물가를 최대한 낮춰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체감'은 덜 하더라도 물가를 더 확실하게 떨어뜨릴 수 있는 '가공식품'의 라면 가격이 팍팍 내려가기를 간절히 바랄 겁니다. 그래야 2%대 물가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에서 5급 공무원도 바로 아는 라면의 경제학을 부총리가 과연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외려 '부총리가 업계 사정 잘 몰라서'가 아닌 '사정 너무 잘 알아서' 그런 발언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대해 기재부 관계자는 "사회자가 갑자기 라면을 물어봐서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라며 부총리의 '잘 몰라서 설(說)'에 무게를 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총리의 발언이 정교하게 짜인 각본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라면 제조사들의 업보

최근 20년 사이 라면 제조사들이 가격을 내린 건 2010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당시 농심은 신라면 가격을 최대 7.1%, 삼양식품과 오뚜기도 각각 최대 6.7%씩 인하했습니다. 그때 밀가루 가격이 7% 가량 떨어지면서 정부가 식품 업계를 전방위로 압박하자 마지못해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반면에 지난해 9월부터 라면 제조사들, '이러단 망한다'면서 가격을 대폭 올렸습니다. 농심이 평균 11.3%, 오뚜기 11%, 팔도 9.8%, 삼양식품 9.7% 정도 인상했죠. 그런데 올 1분기 라면 제조사들의 실적은 놀라웠습니다. 농심의 영업이익은 638억 원, 지난해보다 86% 가까이 뛰었습니다. 오뚜기도 653억 원으로 11% 정도 호실적이 나왔습니다. 원가 절감과 기술 개발 등 자구책으로 돈 벌어야지 서민들 호주머니에서 50원~100원씩 가져와서 이익 본 거 아니냐는 싸늘한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특히 자신들은 50원, 100원 정도 올리는 거라고 항변해도 분식집에서는 그게 기폭제가 돼서 라면 한 그릇 가격을 또 올리는 도미노 현상이 나타난다는 걸 감안한다면 국민 모두 힘들었던 작년에 '꼭. 그렇게. 라면 가격을. 올려야만 했나'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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