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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어떻게 0원으로 2,446억 원을 떼먹었을까

'구리 전세 사기' 일당 주범 공소장에 담긴 사기 수법과 결과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전세 사건 중 피해가 큰 건으로는 인천 미추홀구 사건, 끝 자리가 같은 전화번호를 이용한 '2400 조직', 화성 동탄 사건, 경기 구리 사건 등이 있습니다. 이 중 구리 전세 사기는 부동산 컨설팅 업체 일당이 공인중개사 등과 짜고 경기도 구리 등 수도권에서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900여 채 전세 사기를 벌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주범이자 전체적인 '판'을 짰던 주범 고 모 씨는 구속 상태에서 첫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고 씨의 공소장에는 0원으로 2,446억 원을 떼먹은 범행 수법과 과정이 담겨있습니다.

사공성근 취재파일_전세 월세 OPEN(건물명 블러 처리)

'무자본 갭투자'


이 사건을 수사한 검찰과 경찰은 고 씨를 '무자본 갭투자자'로 봤습니다. 자기 자본 없이 빌라나 오피스텔의 소유권을 이전받는 식으로 물량을 늘려왔다는 겁니다. 고 씨 일당은 신축 빌라나 오피스텔이 나오면 분양대행업자 등을 통해서 매매대금을 협의했고, 동시에 공인중개사를 통해 해당 물건에 전세로 들어올 피해자를 구해 보증금을 받았습니다. 피해자의 전세 보증금으로 매매 대금을 치르는 방식인데, 그 중간에서 '리베이트' 명목으로 분양업자와 공인중개사 등에게 수천만 원이 빠져나갑니다. 결국 실제 매매대금보다 전세 보증금의 액수가 더 큰 '깡통전세'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면 쉽게 이해됩니다. 경기도 구리에 분양가 1억 원짜리 신축 오피스텔이 나왔습니다. 건축주가 받아야 하는 분양대금이 1억 원인 신규 매물입니다. 고 씨는 1억 원을 주고 자신의 명의로 오피스텔을 매입하는 동시에 1억 4천만 원 상당의 전세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 씨에게 '리베이트'를 받기로 한 분양업자와 공인중개사가 공범으로 합류합니다. 고 씨는 세입자에게 받은 보증금 1억 4천만 원 중 1억 원을 분양대금으로 건축주에게 지급하고 나머지 4천만 원은 본인과 회사 직원들, 분양업자, 공인중개사 등과 나눠 먹었습니다. 2년 뒤 돌려줘야 할 전세 보증금은 이미 계약과 동시에 '공중분해' 됩니다. 피해자는 임대차기간이 종료될 때까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취재진이 찾아간 일당의 사무실은 이미 오래전 비워진 상태였습니다.

조직적인 범행…'서당개' 3년 수법을 배웠다

(사진=경기북부경찰청 제공)

경찰은 고 씨와 고 씨의 부동산 컨설팅 업체에서 일했던 직원들, 명의를 빌려준 '바지 임대인'과 임대인 모집책 등에게 '범죄집단조직죄'를 적용했습니다. 고 씨 일당은 철저하게 업무는 나눴습니다. 고 씨는 우선 자신이 대표로 있는 부동산컨설팅 업체를 임대사업자로 등록하면서 간판을 걸었습니다. 함께 구속된 업체 이사부장은 영업지시와 교육, 명의대여인 관리 등의 역할을 했습니다. 팀장급 직원들은 중간관리자 역할을 맡았습니다. 영업사원들은 분양 현장과 부동산을 돌면서 사업에 동참할 분양업자공인중개사들을 모집했습니다. 매달 수천만 원 상당의 수익을 보장받고 명의를 빌려준 명의대여자들이 있고, 또 이들을 섭외한 브로커도 따로 있었습니다.

또 고 씨와 주범들은 이런 체계적인 판을 벌이기 전 다른 부동산 컨설팅 업체에서 함께 근무했던 경험이 있는 '동료'였습니다. 새롭게 이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다른 업체어서 어깨너머로 일을 배워보니 '이 일이 돈이 되겠구나' 느꼈던 겁니다. 이들은 배운 대로 '무자돈 갭투자' 방식으로 물건을 늘려갔습니다. 업체를 차린 뒤 처음에는 두 세명으로 시작했지만 1명이 여러 명의 공범을 데리고 와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순차적으로 조직을 키워갔던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미 알던 수법이니 범죄의 속도도 상당히 빨랐습니다. 2020년 10월에 업체를 차렸고, 같은 해 12월부터 본격적으로 물건 모집에 들어섰는데 불과 2년 만에 일당은 수도권에서 932건의 계약을 체결해 피해자들에게 2446억 349만 원의 임대보증금을 편취했습니다.

사공성근 취파_우체통에 우편물 꽂혀있는 사진

사기 VS 투자


고 씨 일당은 수사기관의 조사에서 "금리 인상 등 시장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을 뿐 사기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정당한 부동산 컨설팅 사업인데, 시장의 상황 때문에 보증금을 반환하지 못했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경찰과 검찰은 고 씨 일당 모두에게 사기 혐의를 적용했습니다.

검찰은 고 씨가 보증금을 정상적으로 반환할 의사가 능력이 없다고 봤습니다. 실제로 피해자들에게 보증금을 돌려주거나 담보할만한 별다른 재산이 없었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이러한 '깡통전세'가 발생하는 사실을 피해자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수백 채의 빌라 등을 소유하면서도 보증금을 반환할 수 있는 관리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게다가 고 씨는 세금과 사무실 관리비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습니다. 자기 자본이 없을 뿐 아니라 수백 채를 운영할 계획과 능력도 없었던 겁니다. 임대사업을 하는 경우 취·등록세뿐 아니라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 종합소득세 등 각종 세금이 부과됩니다. 세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면 개인 또는 법인이 가진 물건 전체에 대한 압류가 들어오게 됩니다. 또 보증보험에 가입한 물건에 대해서 보증금을 반환하지 못하게 되면 HUG(주택도시보증공사)에서 구상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또 가압류 및 강제 집행을 하게 됩니다. 일당들이 구상했던 톱니바퀴가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하면 새로운 세입자를 구해서 돌려 막을 수 없게 되고,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반환하기 위한 추가 대출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 경찰이 확보한 전세 계약서

사실 '구리'가 아니라 '강서' 전세 사기였다


법무부가 국회(전주혜 국민의힘 의원실)에 제출한 공소장에 따르면 고 씨 일당은 2020년 11월 2일부터 2022년 9월 25일까지 690여 일 동안 총 932회에 걸쳐 932명의 피해자들과 계약했습니다. 하루에 1.3명 이상 계약했고, 한 명 당 2억 6천만 원 상당을 보증금을 편취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처음 언론에 보도될 때 '구리 전세 사기'로 이름 붙었습니다. 일당의 피해 물건 중 구리 오피스텔과 관련해 첫 보도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체 932건의 피해를 분석한 결과 구리는 전체의 1%에 불과했습니다. 서울 강서구가 가장 많은 300여 건으로 전체 33%를 차지했습니다. 그다음이 서울 금천구(13%), 서울 구로구(9%), 인천 남동구(7%) 순이었습니다. 10건 이상의 피해가 발생한 곳(경기도는 시, 서울·인천은 구)만 18곳에 달할 정도로 수도권 전체적으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사공성근 취파_일당들 영장심사 출석퇴장 사진 (블러)

한 푼도 없을 수도 있다


일당에게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한 것은 형량을 무겁게 하겠다는 것 외에도 범죄 수익을 추징하겠다는 수사기관의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부패재산몰수법 3조와 6조에 따르면 범죄수익 및 범죄수익에서 유래한 부패재산을 몰수할 수 있고, 부패재산이 범죄피해재산으로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몰수·추징된 범죄피해재산은 피해자에게 환부됩니다. 별도의 민사소송을 제기하지 않아도 법에서 정해 놨기 때문에 일정 부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겁니다. 다만 사기죄는 부패재산몰수법에서 말하는 범죄에 포함되지 않고, 범죄단체조직죄는 포함됩니다. 이 사건의 경우 사기죄에 더해 범죄단제조직죄가 적용됐기 때문에 피해자가 나설 필요 없이 국가가 나서 부패 재산을 몰수·추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몰수도 재산이 남아 있을 때 가능합니다. 남은 재산이 없다면 피해 회복도 어렵습니다. 고 씨 일당은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수도권에서 물건을 늘려왔습니다. 애초에 자기 자본이 적거나 없었다는 겁니다. 지금 경찰에서는 수사와 별개로 고 씨 등 주범들의 은닉 재산을 쫓고 있습니다. 통장에 얼마가 있고, 부동산과 채권이 얼마가 남아 있는지, 숨진 재산은 없는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추후에 몰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고 씨의 잔여 재산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지난 7월부터 최근까지 국토부와 경찰청·대검찰청이 범정부 특별단속을 통해 받아낸 전세사기 범죄수익은 약 61억 원입니다. 이 기간 전체 피해금액은 4천599억 원입니다. 환수·보전된 금액은 전체의 1.3% 수준에 불과합니다. 전세 사기 사건에서 일당을 엄정 처벌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피해자의 피해를 회복하고, 자립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겁니다. 이미 계약 기간 만료 후에도 보증금을 받지 못해 주거의 위협을 겪고 있는 피해자가 지금까지 파악된 것만 3천여 명입니다. 여기에 이제 곧 계약 기간이 만료될 '예비 피해자'도 더 있습니다. 지난 1일부터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전세사기 특별법)이 시행됐지만 지원의 범위나 방식에 한계가 있어 실질적으로 전세사기를 해결할 방법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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