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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앤디 워홀'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틀렸다

[뉴욕타임스 칼럼] By 리처드 메이어

스프 NYT 뉴욕타임스(앤디워홀)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리처드 메이어는 스탠퍼드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다.
 

대법원의 판단이 틀렸다.

최근 대법원은 앤디 워홀이 1984년 린 골드스미스가 찍은 팝스타 프린스의 사진을 실크스크린 초상화 시리즈의 원본 이미지로 사용한 것은 저작권 침해라고 7대 2로 판결했다. 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좁은 의미의 판결이었다. 워홀 재단이 워홀의 작품 「오렌지 프린스」를 잡지에 복제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어, 골드스미스가 원본 사진을 동일한 용도로 사용하고자 했던 만큼 라이선스 비용의 일부를 받아야 한다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자이자 워홀 전문가인 나는 워홀 재단의 주장을 뒷받침에서 의견서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의견서에서 워홀의 작품이 골드스미스의 사진을 (크기와 구성, 매체, 색상, 전반적인 시각 효과 면에서) '공정 이용(fair use)'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변형했다고 주장했다. 공정 이용이란 표현을 자유의 이름으로 특정 조건에서 저작물의 각색을 허용한다는 원칙이다.

하지만 워홀과 독창성의 문제에 대해 내가 의견서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 이제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으니, 당시에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나는 공정 이용이라는 개념이 법적인 원칙으로서 필요하기는 하지만, 워홀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워홀은 커리어 내내 저작권(copyright)이 아닌 복제권(right to copy)에 관심을 가졌다. 워홀에게 복제권이란 창작 방식인 동시에 삶의 방식이었다.

워홀은 1963년 인터뷰에서 "다른 사람이 나 대신 그림을 그려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모든 작품을 '아웃소싱'하지는 않았지만, 찍기, 자르기, 제목 붙이기, 심지어는 작품 구상과 같은 창작 과정의 일부를 친구나 조수에게 맡겼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그릴까?'하고 물어보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며, "팝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팝'이 예술가의 독창적인 비전보다는 외부의 아이디어나 이미지에서 비롯된다는 의미였다. 워홀은 "다른 사람에게 아이디어를 구하는 것이 잡지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말도 남겼다.

이런 워홀의 외부 의존도는 예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워홀로 사는 것에 지칠 때면, 다른 이에게 워홀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1967년에는 배우 앨런 미지트를 고용해 전국 순회강연에 대신 내보냈다. 몇 차례 강연 이후 대역이 들통나자, 워홀은 "(배우가) 나보다 강연을 더 잘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워홀의 입장에서는 배우가 말을 하고 청중의 질문에 답하는 일에 더 능숙한 사람일 뿐 아니라, "워홀 노릇을 더 잘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원본을 뛰어넘는 카피란 워홀의 감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였다. 그는 찾아낸 사진을 복제하고 다시 만들어 생기 넘치는 그림과 판화로 재탄생시켰고, 그 작품들은 다시 다양한 시각적 차이를 갖는 버전으로 거듭났다. 워홀이 화단에서 부상하기 시작한 1950년대 당시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이미지를 복제하는 일은 미술계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저급한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자 미술계와 산업계 모두 '팝'의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내가 학생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일화가 있다. 1967년, 캠벨 수프 컴퍼니(Campbell Soup Company)는 워홀의 그 유명한 수프 통조림 그림을 여러 장 담은 책 출간을 앞두고 있던 출판사 랜덤하우스(Random House)에 서한을 보냈다. 서한에 따르면, 캠벨 수프 컴퍼니는 캠벨 로고와 워홀이 용도를 변경하여 사용한 로고 사이에 저작권 충돌이 없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워홀의 작품은 회사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다만, 서한은 한 가지 주의사항을 명시하고 있었다. 워홀이 로고 그림을 실제 통조림에 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워홀이 캠벨과 직접적으로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워홀은 기꺼이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는 예술을 하는 사람이지, 수프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후 워홀의 팬들은 공개 행사에 캠벨의 통조림을 가져와서 사인을 받기 시작했다. 통조림이 워홀을 연상시키는 물건이 되어 워홀 작품의 기성품 버전으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원본 자료와 예술 작품이 자리를 맞바꾸게 됐다.

후기 워홀은 유명 인사와 사교계 인물, 기업 거물, 그 밖에도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의 실크스크린 초상화 그리기에 몰두했다. 초상화는 2만 5천 달러, 대비되는 색으로 찍어 첫 작품 옆에 나란히 두는 추가본은 1만 5천 달러를 받았다. 워홀에게 초상화를 의뢰하는 것은 곧 '워홀 작품' 하나로 만들어진다는 뜻이었다. 반복과 전유에 기반한 창작 기법이 역설적으로 워홀의 시그니처 스타일이 되었다.

워홀은 예술가들이 백지상태(tabula rasa)가 아닌, 이미지와 정보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작품을 시작하는 미래를 예견했다. 현대 예술가들이 디지털 렌더링은 물론 기존의 사진과 물체를 자유롭게 활용하고 있는 지금이 바로 워홀이 예견한 미래다. 우리의 '워홀적' 대역은 더 나은 버전의 나를 표현하는 대역 배우가 아니라, 인스타그램과 트위터상의 프로필이다.

바바라 크루거, 제프 쿤스 등 유명 아티스트들이 시각적 전용과 관련된 법적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리처드 프린스는 최근 인스타그램 사진 무단 사용으로 두 건의 저작권 침해 소송에 휘말렸다. 그러나 이러한 분쟁도 워홀이 개척한 창작물 활용 관행을 억누르기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1987년 워홀 사망 이후 관행은 더욱 널리 퍼졌다.

자기표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워홀의 소망이었던 만큼, 생성 AI과 예술의 접목에 그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기계가 되고 싶다"던 워홀의 유명한 소원은 오늘날 현실에 매우 가까워졌다. 챗GPT와 같은 신기술과 소프트웨어로 인해 인간의 지능과 기계의 흉내를 구분해 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워홀은 이런 골칫거리를 (학생들의 과제를 채점해야 하는 대학교수와는 달리) 마음껏 즐겼을 것이다.

워홀은 누구보다도 독창적인 방식으로 독창성의 개념을 해체한 사람이었다. 이 이야기가 너무 난해하게 들릴까 봐 의견서에는 넣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 점을 아주 명확하게 이해한 사람이 대법원 심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엘레나 케이건 대법관은 열정적인 소수의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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