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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소송대리'에서 '특허감정'까지…"재주만 부리는 곰이 된 변리사들"

[취재파일] '소송대리'에서 '특허감정'까지…"재주만 부리는 곰이 된 변리사들"
▲ 지식재산감정평가 제도 선진화 방안 토론회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는 '지식재산감정평가 선진화 방안'을 놓고 변리사들과 감정평가사들 간에 얼굴을 붉히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특허, 상표, 디자인, 저작권 등 지식재산에 대한 가치평가는 "감정평가사들의 고유 업무로 감정평가사만이 할 수 있다"는 한국감정평가사협회의 주장과 "변리사법에 변리사들도 특허나 상표, 디자인 등에 대한 감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고, 무형자산에 대한 감정평가는 변리사들이 제일 잘하는 만큼 변리사들이 해야 한다"는 대한변리사회의 주장이 충돌한 것이다.

'변리사법에 규정된 감정 업무에 가치평가도 포함한다'고 명시한 변리사법 개정안을 발의한 국민의힘 이주환 의원은 "국제적인 움직임에 부응하고, 대한민국의 산업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지만, 무형자산에 대한 가치 평가라는 업무 영역을 독점하려는 감정평가업계와 현실에 맞는 업무영역의 조정이 필요하다는 변리사업계의 주장은 좀처럼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토론회 사회를 맡은 박성필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장과 토론자로 참석한 배동석 인텔렉추얼디스커버리 부사장, 조경선 한국지적재산권경상학회 전 회장, 박재영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 김용철 한국지식재산기자협회 회장은 "무형자산의 거래와 금융 활성화를 위해 제대로 된 가치평가가 선행돼야 한다. 최근 전세사기 사건에서도 보듯 정확한 가치평가를 해야 예상치 못한 소비자의 피해도 막을 수 있다. 수요자 중심의 발상 전환과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홍장원 대한변리사회 회장은 "대표적인 무형자산 가운데 하나인 특허는 그 본질이 기술에 있다. 발명에 대한 권리를 법으로 보장하는 특허는 변리사들이 제일 잘 안다. 실제로 비즈니스 현장에서 특허를 출원하고 평가하며 무효나 침해여부를 다투는 일들은 대부분 변리사들이 한다. 일은 변리사들이 하고, 감정평가사나 변호사의 이름으로 관련 당국에 신고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법과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받는다'는 말처럼, 산업 발전을 선도하는 변리사들이 홀대를 받고 있다는 주장이다.

김용철 취재파일

변리사들의 소관 업무를 규정한 변리사법 1조와 2조

"특허의 가치 평가는 감정평가사만이"…하도급 받아 일하는 변리사들

변리사법 2조는 '변리사는 특허청 또는 법원에 대하여 특허, 실용신안, 디자인 또는 상표에 관한 사항을 대리하고 그 사항에 관한 감정과 그 밖의 사무를 수행하는 것을 업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변리사들은 이를 근거로 변리사들도 특허의 가치를 감정 평가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감정평가사들은 변리사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감정'이지 '가치평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감정'이란 골동품 감정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진위를 가리는 것'이지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다. '무형자산의 가치평가'는 감정평가 및 감정평가사에 관한 법률에서 규정한 감정평가사들만이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김용철 취재파일

감정평가사의 업무와 위반 시 벌칙을 규정한 감정평가사법과 시행령

감정평가 및 감정평가사에 관한 법률 49조는 '부정한 방법으로 감정평가사의 자격을 취득한 사람이나 감정평가법인 등이 아닌 자로서 감정평가업을 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감정평가 및 감정평가사에 관한 법률 시행령은 감정평가사들이 하는 감정평가의 대상을 부동산 외에 저작권, 산업재산권, 어업권, 양식업권, 광업권 및 그 밖의 물권에 준하는 권리'로 규정하고 있다.

홍장원 대한변리사사회장은 "감정평가법에 감정평가법인만이 무형자산의 가치평가 업무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서 변리사들이 특허 등에 대한 가치 평가를 수행하고도 감정평가법인 이름으로 국세청에 세무신고를 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무형자산에 대한 가치 평가 업무가 감정평가사들로부터 하청을 받아하는 하도급 업무가 된 것입니다. 감정평가업계는 이를 근거로 특허 등 산업재산권에 대한 가치 평가를 하는 변리사들을 고발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선진국의 감정평가사 업무 범위 (자료: 대한변리사회)

변리사업계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무형자산에 대한 가치평가를 토지에 대한 감정평가를 하는 감정 평가사들에게 하도록 하는 나라는 없다. 특허 등 무형자산에 대해 잘 아는 변리사들이 무형자산에 대한 가치 평가를 하도록 법과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법원 2012. 10. 25. 선고 2010다 108104 판결

"소송 대리는 변호사만이"…'쪽지변론'만 하는 변리사들

변리사법 2조는 '변리사는 특허청 또는 법원에 대하여 특허, 실용신안, 디자인 또는 상표에 관한 사항을 대리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변리사들은 특허침해 소송에 대한 소송대리도 하지 못하고 있다. 법원이 변리사들의 특허침해 소송 대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2년 10월 25일 대법원은 '변리사에게 허용되는 소송 대리의 범위는 특허심판원의 심결에 대한 심결취소소송으로 한정되고, 현행법상 특허 등의 침해를 청구원인으로 하는 침해금지청구 또는 손해배상청구 등과 같은 민사사건에서 변리사의 소송 대리는 허용되지 아니한다.'고 판결했다. 민사사건은 고도의 법률적 지식과 윤리의식을 보유한 변호사만이 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외국의 변리사 소송대리 허용 실태 (자료: 대한변리사회)

변리사들은 '특허침해 소송은 발명의 권리 범위를 다투는 기술적 사안으로 관련 기술을 잘 아는 변리사들이 소송 대리를 해야 발명자들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할 수 있다. 변리사들도 민사소송 등에 대한 법률지식과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다. 변리사들의 민사소송 대리를 허용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며, 관련 법과 제도의 변경을 촉구하고 있다. 대형 로펌 소속의 변호사들은 지금도 변호사들과 함께 특허침해 소송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 법정에 들어가지만 변론을 하지 못하고 변호사들이 기술적 사안에 대하 조언을 요청할 경우 이른바 '쪽지변론'을 통해 변호사들을 돕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변호사협회를 비롯한 변호사 단체들은 "변리사들의 특허침해 소송 대리 허용은 절대 안 된다"며 결사 반대하고 있다. '변리사들도 특허침해소송 대리를 할 수 있다'고 명시한 변리사법 개정안은 2006년 이후 20년 가까이 국회가 새로 구성될 때마다 발의됐지만, 번번이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번 21대 국회에서도 민주당 이규민 의원 등이 발의한 변리사법 개정안이 작년 5월 12일 소관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를 통과한 뒤 지난 2월 23일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됐지만, 법사위를 통과하지 못하고 법안의 무덤으로 불리는 제2소위원회로 회부됐다.

대한변리사회는 오는 15일 21대 국회 법사위가 다시 열리면 변리사와 변호사의 특허침해소송 공동대리를 허용하는 변리사법 개정안도 다시 안건으로 상정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를 앞두고 우리나라의 주력 첨단산업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배터리, 바이오 업계 4개 단체가 변리사의 특허침해소송 공동 대리 허용 조항을 담은 변리사법 일부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촉구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와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 한국배터리산업협회, 한국바이오협회는 지난달 31일 성명을 내고 "지난 20년간 네 번이나 국회 문턱에서 좌절된 '변리사 공동대리' 법률 개정안이 국회에서 반드시 통과되길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들 4개 단체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배터리, 바이오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특허분쟁이 벌어지고 있다."며, "기술 개발부터 특허 출원 등록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 해온 변리사는 기업의 기술과 특허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전문가다. 이런 전문가를 소송에서 활용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변리사의 특허침해소송 공동대리 허용을 촉구하는 변리사들 2023.03.03

"독점에서 개방과 공유, 협력으로"…제도 선진화 시급

지난 1일 한국지식재산기자협회(KIPJA)와 국민의힘 이주환 의원실이 공동 주최한 '지식재산감정평가 선진화 방안' 토론회에 참석한 박재영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산업이 고도화되고 시장이 다양화될수록 지식재산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미래 성장산업일수록 투자와 기업의 성장 전략에 변화를 주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지식재산에 대한 감정평가는 전문가에 의해 정확하게 수행되어 공정성과 합리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감정평가 결과가 산업현장에서 제대로 활용될 수 있도록 제도의 틀을 정비해야 할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감정평가 수요자를 고려한 정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기조발제를 맡은 이봉진 변리사(대한변리사회 지식재산감정위원회 위원장)는 "가치평가 영역에서 지식재산권 분야 전문가 집단인 변리사가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서로 집안 싸움을 할 때가 아니라, 여러 평가 전문가(변리사, 감정평가사, 회계사, 박사, 기술사 등)들이 팀을 구성해 지식재산 평가시스템 수출 및 확산 전략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지식재산서비스협회 미래준비위원회는 별도 입장문을 통해 "지식재산(IP) 가치 평가 업무는 여러 분야별 전문가들의 협업이 반드시 필요하며 과거 전통적인 방식으로 특정 자격자의 업역으로 구분되는 업무 분야가 아니다. 해외 주요 선진국은 물론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APEC(아태경제협력체) ▲WIPO(세계지식재산기구) ▲IVSC(국제가치평가기준의회) 등 국제기구가 규정한 무형자산ㆍIP 가치평가 매뉴얼(기준)에서도 IP 가치평가 업무 수행자의 자격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두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내용에 따라 분야별 전문가들의 협업을 권고한다. IP가치평가는 특정 자격이 아니라 업무 특성과 능력에 따라 여러 분야별 전문가들이 협업을 통해 ▲시장전망 ▲기술동향 ▲기업경영▲금융투자 ▲법적 쟁점 등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의 조사분석에 근거해 자유롭게 수행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철저히 IP서비스 시장과 수요자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프트웨어(S/W)와 하드웨어(H/W)가 융합하고, 로봇과 인공지능(AI)이 사람의 육체노동은 물론 지식노동까지 대체하는 산업간의 경계가 무너진 융복합시대다. 사전적인 규제보다는 사후 규제로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하고, 폐쇄적이고 독점적인 법과 제도의 틀을 개방과 공유, 협력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혁신의 플랫폼으로 전환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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