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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삶이 그림이다, 그림이 삶이다" - 수묵화가 김호석


스프 그사람 김호석

이름보다 작품이 더 유명한 사람

지인에게 이 사람을 한 번 취재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분이 누군데요?"라고 반문했다. 김호석이란 이름 석자가 낯설었다. 인물화의 최고봉, 수묵화의 대가라는 수식어는 진부했고 올해의 작가, 비엔날레 초대작가, 뉴욕 무슨 미술관 초대전 같은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림 한 점을 팔면 1년을 먹고 산다는 말에 조금 호기심이 일었고 100여 종이 넘는 초.중.고 교과서에 작품이 실렸다는 말을 듣고서는 '설마 한 사람 그림이 그렇게 많이 실렸을까' 싶었다.

인터넷에서 그림을 찾아보고 나서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눈에 익은 그림들이었고 이런 다양한 그림을 이 사람이 그렸다는 것도 놀라웠다. 이름보다 작품이 더 유명하다는 말이 작가에게 칭찬일지 욕일지 모르겠다.

<수박씨를 뱉고 싶은 날>. 1997
주변 사람들도 화가 김호석은 몰라도 <수박씨를 뱉고 싶은 날> 같은 이 사람 작품을 처음 본다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따뜻한 시선과 날카로운 필치를 갖고 있는 것일까, 이런 관찰력은 어떻게 얻은 것일까 궁금했다. '5월 광주'의 작가이기도 하니 '광주'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이미 지인을 통해 부탁을 해서인지 인터뷰 요청에 선뜻 응했다. 5월 11일 오후 세 시에 보기로 했는데 두 시간 정도 시간이 된다고 했다. 단 몇 분이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30분쯤 일찍 작업실에 갔다. 그림에 문외한이라 어떻게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할지 다소 걱정이 되었는데 그것은 기우였다.
 

스승과의 불화, 가난과의 싸움


스프 그사람 김호석
1977년 홍익대 미대에 들어갔다. 교수들에게 불편하고 골치 아픈 학생이었다. 사군자를 그리는 기법에 앞서 왜 난을 치고 대나무를 그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바람을 그릴 수는 없는지 흔들림을 그리면 안 되는 것인지 캐물었다.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날개에 털도 안 나는 놈이 날려고 한다'라는 말만 들었다.

학교 밖으로 답을 찾아 나섰고 그럴수록 교수들에게 미운 털은 더 깊이 박혔다. 1980년대 초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치던 날 은사가 찾아왔다. 화기애애하게 시작된 두 사람의 대화는 술잔이 박살나고 상이 뒤집어지는 것으로 끝났다.
 
"실력 없는 선생님을 은사로 둔 덕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게 선생님의 공입니다."

"너 같은 놈을 제자라고 믿고 살아온 내가 미친놈이다, 너는 더 이상 내 제자 아니다"

"선생님에게 찍힌 제자가 어떻게 작품을 하고 사는지 지켜보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오래 사셔야 합니다".

예술 세계는 선후배도 없고 스승과 제자도 없다는 이 사람에게 쥐꼬리만한 재주 믿고 날뛰는 오만방자한 놈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이 사람 석사 논문을 보지도 않고 집어던졌던 그 은사와는 훗날 화해하고 잘 지냈지만 그 일화는 권위 같은 것은 깡그리 무시하는 이 사람 성정을 잘 보여준다.

스승과의 갈등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가난과의 싸움이었다. 중학교 때 가세가 기울어 대학생 때 안 해 본 일이 없다. 공사장 막노동은 기본이고 공동묘지에서 무연고 묘 파묘해서 유골을 화장하는 일도 해봤다. 거의 고학으로 대학을 다녔고 학군장교, ROTC를 선택한 것도 돈 때문이었다.

그림 그릴 종이 한 장 살 여유조차 없어 친구들이 쓰고 버린 종이를 잘라서 이어 붙였다. 두께가 다르고 색깔도 제각각이었다. 그 위에 그린 그림이 이 사람을 세상에 처음 알린 <아파트>라는 작품이다. 중앙미술대전에 응모할 때는 심지어 액자를 살 돈도 없어 직접 만든 액자에 구두약을 발라 출품했다. 이 작품으로 1979년 중앙미술대전에서 2등에 해당하는 장려상을 받았다.

<아파트>, 1979
"그러한 고통 그러한 노동조차도 나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노동을 할 때 어디의 힘줄이 움직이고, 어디에 사람의 눈길이 가고, 왜 그리움이 있고 왜 먹고살려고 하는지에 대한 절박함을 그 사람들 눈빛에서 잡아낼 수 있었어요. 나도 절박했으니까. 그래서 내 예술이 그려놓은 모든 것은 최소한 나에게는 재미로 그린 그림이 없어요. 가장 절박하고, 그리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그림을 나는 그리려고 노력해요"

중앙미술대전, 한국일보 대상 등을 휩쓸었고 주목할 만한 전시회에 잇따라 참여하면서 1980년대 초반 20대의 나이에 이른바 수묵화 운동의 기수 역할을 했다. 1986년 네 개의 눈을 가진 '황희' 로 화단을 놀라게 했고 '가족화'로 불리는 일련의 인물화 작업을 통해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1999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다.
 

<함께 가는 길>이 보여준 위로의 힘

〈키재기 - 꿈꾸기〉 1998~1999
1998년 <함께 가는 길>이란 타이틀로 전시회를 열었다. 마침 IMF 외환 위기로 수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고 가정이 해체되던 시기였다. 이 사람의 그림에서 위로를 찾으려는 사람들로 전시회장은 인산인해였다. 얼마나 많은 관람객이 왔던지 전시회가 끝나고 바닥 공사를 다시 해야 할 정도였다. 숱한 관람객 중에서 노숙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때 제가 화랑 주인에게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그림 전시를 합시다' 그랬더니 '안 팔려요' 그래요. 지금까지 많은 그림을 팔았으니 이번에는 팔리지 않아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전시를 통해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사회적 기능이란 그런 거다. 그랬더니 '그림 안 팔아도 되겠습니까?' 그래서 난 상관없다.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했던 전시 중에서 그때 그림을 가장 많이 팔았어요."

이때 나온 <마지막 농부의 얼굴> <어휴 이뻐> <어때 시원하지?> 같은 작품은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보면 미소가 절로 지어지고 이 사람이 얼마나 세상을 따뜻하게 보는지 알 수 있다. 초. 중. 고 교과서에 실린 그림들도 주로 이 시절 그림이다. 교과서로 저작권료를 받는 그림이 115점. 미술 교과서만이 아니라 국어, 국사 교과서에 실렸고 영어 교과서에도 한국을 설명하는 자료로 이 사람 그림이 등장한다.

이 사람을 통해 성철과 법정이 우리 곁에 다시 돌아왔다. 1994년 성철 스님 초상화를 그린 것을 계기로 불교 고승들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대상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관련된 자료를 섭렵하고 그 사람이 살았던 곳을 찾는다. 그 사람을 아는 사람들을 취재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 사람들이 밟고 살았던 곳의 땅을 가져다 재료로 쓴다. 법정 스님의 유해 일부를 화폭에 바른 이야기는 다소 유난스럽다 싶었지만 작가와 대상의 일체를 추구하는 이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 그림은 여기에 아침에 일찍 나와서 가장 맑은 정신에 그려요. 오후에는 다른 일을 해요. 내 스스로가 맑고 투명한 마음을 갖고 있을 때 그림에 집중하는 거죠. 아침에 오다가 험한 뉴스를 듣거나 험한 어떠한 동물의 사체를 보거나 그러면 그날은 그림을 안 그려버렸어요"

그림을 그리는 일은 수행정진이다. 수행하는 곳이니 탁한 기운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작업실에서는 누구도 음주 흡연이 안된다. 이 사람도 생수만을 마신다. 15평 남짓한 작업실은 '성스러운 곳'이고 '사생결단의 현장'이다.

대상 인물의 기운이 출중하고, 재료를 엄히 고르고, 그리는 장소의 기운, 거기에 붓을 잡는 시간의 기운까지 따져가면서 작업을 했기 때문일까. 법정 스님 초상에서 신기(神氣)가 느껴졌다. 무소유를 주장했던 스님의 무소유를 내가 그림 한 점으로 소유하고 싶다는 이 사람 욕심이 '어느 정도' 표현된 작품이다.

스프 그사람 김호석
"제 친구가 '호석아 머리 아프고 여러 가지로 고민스러우면 내가 하는 방법을 너도 해봐. 저 성북동 길상사에 가면 진영각에 법정스님의 그림이 있는데 진짜 잘 그렸어. 두어 시간 정도 스님을 바라보면서 '스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은 걸 저한테 들려주십시오' 하면 어려운 문제도 풀린다는 거예요. 그러니 저한테 가서 앉아서 있으라는 거예요. 제가 그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모르는 친구지요.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속으로 '너는 인마 지금 내 손바닥에서 노는 거야(웃음)"

-세수하는 성철 스님 그것도 좋더군요.

"그 그림도 처음에는 성철 스님 제자들이 전시회장에서 떼라고 그랬어요.

-아니 왜요?


<세수하는 성철스님>
"천하게 엉덩이를 들고 있다고…저는 어떻게 생각했냐면 성철 스님도 똥을 싸는 사람이야. 그러나 먹는 것만큼 싸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을 성철스님도 똑같이 느끼고 있어. 제가 작가 노트에 이렇게 썼어요. '성철 그는 불립문자를 주장했다. 제자들에게 바람에 날려온 신문지조차 보지 못하게 한 분이었지만 진정 그는 아침마다 세수 대야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보며 마음의 빛을 갈고닦았다' 그랬더니 떼라고 했던 사람이 또 좋다고 또 그래(웃음)"

-그림이 사진 하고 다른 특성, 변별력이 뭘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어요? 사진가라면 성철 스님 엉덩이에 그렇게 카메라를 들이대겠어요?

"그런 사진 없죠. 예술적 상상력으로 만들어 내야지. 딱 보는 순간에 아 이 사람의 전형성은 무엇일까? 그만이 도달한 정점은 어떤 것일까를 빨리 잡아 내야 돼요. 뭘 그릴 것인가. 성철을 통해서 지금 우리 사회에 던지고 싶은 거대 화두가 무엇일까를 되묻는 방식으로 접근을 했어요"


인물화의 대가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니 이제 사람을 보면 그 사람 인생 전부가 단박에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우문 같은 질문에 이런 현답을 내놓았다.

"내가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다. 한 사람 눈에서 개인의 삶과 함께 그 사람이 살아온 사회와 역사를 본다. 그래서 내 그림의 인물들은 개인이면서 개인이 아니다. 김호석이 만든 사회의식을 그 사람의 눈 안에 넣는 것이 내 작업의 본질이다."
 

나를 가르치는 것은 오직 나일뿐

스프 그사람 김호석
지금까지 몽골에만 예순 번 넘게 다녀왔다. 초원에 가면 고요의 극치 속에서 자연의 소리가 오감으로 느껴진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 생명의 시원에 대해 그리기 시작했다. 하나의 죽음이 하나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어떻게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는지 <하늘에서 땅으로> 같은 그림을 예로 들어가며 길게 이야기했다. 이런 그림은 생명으로 들끓는다. 소멸을 그린 그림에서도 들끓는 생명이 느껴진다.

<하늘에서 땅으로>, 2005
-거의 모든 작품에 생명이 등장하더군요. 사람의 생명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명에 대한 관심이 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잘 보셨습니다. 생명이죠. 살아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죽어 있는 것조차도 쓸모없는 것이 없다라는 게 자연을 보는 제 관(觀)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어있는 것은 뻣뻣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이름값을 한다. 그 어떤 것도 근거 없이 생성하지 않았고 소멸하지 않는다"


설명을 듣고 나니 그런 그림이 다시 보이기도 했지만 가족화나 인물화에 비하면 여전히 어렵고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역사와 사람'이 있어야 될 화폭을 '신화와 동물'들이 차지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듣는다. 어떤 작품은 보기 불편했다고 하자 경험치의 차이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의 층위는 수직적이라 했다. 생각의 깊이와 폭에 차이가 있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작품 마치고 나서 이거 참 참 좋다 흐뭇하다 이랬던 작품이 뭐가 있을까요?

"솔직히 하나도 없어요. 그건 없어요. 작품 좋다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저는 전시를 통해서 지금까지 집중했던 작품에 대한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해요. 지난 시간의 공부를 점검받는 게 전시회입니다. 그래야 자신을 복제하지 않고 창조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나의 형태가 분명한 그림을 그리지만, 그것이 나의 문제에만 잡힌 그림은 경계해 왔어요. 그건 좋은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전시장에 작품을 펼쳐 놓고 보면. '좋구나'라는 것보다도 '내가 왜 이렇게 허탈하지, 내가 왜 이렇게 부족했지, 내가 왜 이렇게 모자라지, 내가 진짜로 그림을 계속 그려도 될까'라고 하는 자괴감이 먼저 와요. 정말 그래요. 뒤돌아 보면 다 버려야 할 쓰레기들로 보이기도 해요."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그런 사람이 없단다. Self taught, 자기에게 배운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덧붙였지만 자신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자신감으로 들리기도 했다.

동시대 작가 중에 경쟁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답을 하지 않았다. 거듭 묻자 독일 작가 오토 딕스( Otto Dix)와 중국 판화작가 자오옌녠을 들었다. 국내 작가는 없느냐는 거듭된 질문에 고암 이응로를 들었고 이우환은 천재라고 했다. 다른 사람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만족하는 작품은 없다면서도 작품에 대한 자부심은 거의 하늘에 닿아 있었다. 자의식, 자존심,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이런 말은 어지간한 자신감 아니면 입밖에 내기 어렵다.

"그림을 그리지 않고 그리는 최고의 고단수를 나는 실험하고 있어.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이게 지금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받지 못한다? 좋아, 너희들은 서로의 접점이 다르거나 지향점과 문화 층위가 달라서 내 그림을 이해 못 하지만 10년 지난 뒤에도 이해 못 할까? 천년 뒤에도 이해 못 할까? 나는 천년 지난 뒤에라도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평론가, 화가가 나올 거라고 생각해. 그때 지하에서 나는 웃을 거야! 이런 자세로 그리고자 노력합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고 빈 여백으로 예술이 뭔가를 보여주는 경지, 말하지 않고 말하면서 진리를 전하는 경지를 꿈꾼다. 얼굴이 없고 눈이 없는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얼굴 없는 노무현 그림은 그런 시도 가운데 하나다.

스프 그사람 김호석
"노무현 대통령과 둘이 주고받았던 말들을 어떻게 녹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좀 많이 했고 그런 고민의 결과 '얼굴을 그리지 말자, 우리는 지금 권력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노무현을 바라보고 있지만 권력을 놓았을 때 그의 명성과 힘은 마치 거대한 바람에 미세하게 깎여 나가는 먼지처럼 흩날리는 모습을 경험할지 모른다… 먼지처럼 지워 나가는 그이의 모습이 어쩌면 형상보다 더 강한 형상의 이미지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고도 생각을 했고요."

그림 값이 비싼 화가다. 그림 한 점을 팔면 1년 먹고살 수 있고, 아들이 미국 유학을 갔을 때는 그림 한 점만 더 팔면 됐다. 그림 값을 양보하지 않는다. 그림이 팔리지 않으면 막노동이라도 해서 먹고살면 그만이라는 자세로 살았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 예술적 성과에 대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된다고 믿는다. 그림 값 흥정하려는 사람들과는 두 번 다시 거래하지 않는다. 전시회를 할 때마다 한 사람에게 석 점 이상은 팔지 않는다. 절대 전시장에 나가지 않은 그림은 거래하지 않았다.

"팔고 싶지 않은 사람과 팔고 싶지 않은 그림에 대해서는 아무리 좋다고 해도 팔지 않았어요. 그림을 여러 점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경제적 여유를 주게 되어 좋았지만 그것 또한 절제하고자 거절했어요. 딱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되고 약간의 불편함과 결핍은 저를 더 긴장하게 하여 집중하게 했어요. 그리고 특정인이 독점하는 순간이 되면 작가가 망해요."

전시회가 있을 때마다 석 점씩 사들여 이 사람 작품을 60점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림을 그려 달라는 사람이 아직 있다. 눈을 그리지 않은 인물화로 유명한 <사유의 경련>은 한 달만 보고 돌려주겠다는 한 기업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가 끝내 되돌려 받지 못했다.

"그분이 "김화백. 내가 돌려주려고 마음 먹었으면은 김화백한테 그림 갖고 왔겠어. 내가 갖고 싶네요. 괜찮겠어요?" 그래서 "예 그러시죠" 그냥 심플했어요. 그러고 나서 직원을 시켜서 그림 가격은 어떻게 하느냐 물어봐서 회장님이 주고 싶은 대로만 받겠다"

지금까지 대략 1천 점을 그렸고 5백 점 정도가 팔렸다고 했다. 자신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고 고가에 구입해 주는 사람도 고맙지만 자신의 그림에서 위안을 찾는 장삼이사들의 이야기는 더 반갑고 고맙다. 어느 미장원에서 신문에 실린 <토요 미스테리 극장> 그림을 오려서 거울에 붙여 놨다. 그것을 부인이 보고 울었다. 아내의 마음이 남편의 마음이다.
 

接神의 경지-내 그림의 핵심은 귀신 神입니다

1957년생, 이제는 눈곱도 끼고 눈이 흐려질 때도 되었건만 눈빛이 형형했다. 접신의 경지를 경험한 사람의 눈빛이 저런 것일까. 미당 서정주는 마흔다섯이면 귀신이 보이는 나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은 몇 살에 귀신이 보이기 시작했을까.

"내 그림의 핵심은 뭐냐, 그러면 나는 귀신 신(神)이라고 딱 말합니다. 진짜 귀신을 보지 않으면, 귀신을 그리지 않으면 그림에 생명력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사람의 그림을 본 중국 작가 자오옌녠(趙延年)은 '神' 자를 적어 보이며 당신의 그림에서 신기가 느껴진다고 했단다. 이 사람 열광적인 팬 가운데는 종교인들이 많은 것도 그림에서 영성, 신기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 장인은 그 날카로운 눈빛으로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귀신의 영역을 감지하려고 애쓰고 그 기운이 어느 순간 벼락 치듯 임하면 그 한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야 되고 긴장해야 한다. 자유로운 예술가의 영혼보다는 몸가짐과 마음가짐 단정한 종교인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거다.
스프 그사람 김호석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봉쇄수도원 한 수녀가 우연히 이 사람 작품을 알게 됐다. 작품에서 깊은 영성을 느낀 모양이다. 그림 한 점 한 점 묵상하고 그 묵상을 글로 옮겼는데 그 글이 화제가 돼서 세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마산 트라피스트 봉쇄 수녀원에서 수도 중인 장요세파 수녀가 그 주인공이다.

-그 수녀님은 지금 봉쇄수도원에 계시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제 그림을 보고 묵상을 하면 온갖 삼라만상이 느껴진대요. 그 느낀 것을 글로 써서 저한테 보라고 메일로 보내요. 그러면 제가 전화를 해요. 생각이 같을 때가 많지만 제가 못 본 것을 수녀님이 보실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땐 '수녀님 제가 볼 때는 이 그림은 이런 느낌이었는데 수녀님 하고 다르네요' 그러면 수녀님이 '저도 그걸 느꼈는데 내가 거짓말인 것 같아서 안 썼어요."


죽고 싶을 정도로 어려울 때면 신이 몸 안에 들어와 그림을 계속 그려도 되는지 자기를 시험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지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러니 죽을 각오로 그린다. 단 하나의 점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정신의 극점까지 가고 싶다고 했다.

정치와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할 때는 세속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었지만 정신의 극점까지 가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백척간두에 서 있는 작가, 천 길 낭떠러지 앞에 선 예인이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거기에서 기꺼이 한 발 더 나갈 수 있다는 각오로 산다. 그 모습이 위태롭게 보인 것은 필자만이 아닌 모양이다.

스프 그사람 김호석
"집사람이 제가 작업 도중에 뛰어내릴까 봐서 문을 다 잠그고 졸졸 따라다니고 자동차 운전도 못하게 해요. 근데 나는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어떻게든 시험에서 내 스스로가 통과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그림을 그리면서는 그 생각은 없어요."

밥값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날은 밥을 먹지 않는다. '너는 밥 처먹을 자격이 없는 놈이야'라고 스스로 말한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눈썹이 우수수 빠진다. 지금 이빨 가운데 12개는 자기 이가 아니다. 그렇게 자신을 학대하면서 내가 걸으면 그게 법도가 되고 내 생각이 곧 모본(模本)이 되는 것, 그림을 통해 성인이 되고 군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다.

-'나는 욕심이 많고 꿈이 많은 사람이다. 난 중심이 되고 싶다'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을 파고들지 않고 주변에 있는 것만 가지고 부화뇌동하는 그런 그림이나, 삶을 살고 싶지 않아요. 남들은 '네가 중심이 아니고 껍데기야'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는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제가 욕심이 많은 것은 사실인데 물욕은 그렇게 없어요."

 

이 사람이 말하는 '5월 광주'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 시기 대학교 4학년 ROTC장교 후보생이었다. 혹시 광주에 빚진 마음이 있을까 물었더니 그런 것은 없다고 했다.

<광주민주화운동>, 1997 <광주민주화운동사>, 2000
1986년 전남대 출강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광주와 인연을 맺었다. 1997년에 <광주민주화 운동>, 200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사> 등을 그렸다. '광주'를 그리기 위해 1백 명이 훨씬 넘는 관련 인물들을 만나 이야기를 채록했고 광주 어떤 기록 단체보다 더 많은 사진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사진 자료를 얻기 위해 전국의 주요 언론사 자료실을 다 뒤졌고 5.18 직후에는 광주에 있는 유력 신문사 자료실을 뒤져 당시 보도되지 못했던 사진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린 '광주'에 비해 이 사람이 표현하는 '광주'는 그리 격렬하지 않다. 부드러움으로 거침을 말하려는 의도 때문인지, 현장을 경험하지 않은 탓일지,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날의 현장'보다는 역사 속에서 '빛고을 광주'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고민한다.

광주에서 벌어진 만행을 고발하기보다는 광주가 보여준 정신에 대해 더 집중한다. 그래서 이 사람의 광주 그림에서는 선혈이 흐르지도, 함성이 들리지도, 총성이 귀를 찢지도 않는다. 그런 것보다는 누구나 평등했던 대동의 세상과 사람을 그리고자 한다.

지난 5월 17일 광주 시립미술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광주시민들과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평일 오전 시간이었지만 주최 측에서 준비한 60개 좌석이 가득 차 보조 의자까지 놓을 정도였다. 미술관 측에서 급히 선풍기 몇 대를 동원해야 할 만큼 세미나실 열기가 뜨거웠다.

광주 항쟁 43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시점, 관심은 역시 5.18이었다. 이 강씨를 비롯해 민주화 운동 관련 인사들이 몇 명 자리를 함께 했고 지정 토론자도 민병로 전남대 5.18연구소장이 나왔다. 이 사람은 점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서 몽골 초원 여행, 생명에 대한 이야기, 쥐 그림 등을 광주와 연결 지으며 강연을 풀어갔다.

광주는 광주 사람만의 광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광주 항쟁은 서울 부산 마산 전주 등 전국적 의인들이 힘을 합해 만든 일이다, '광주' 그림들은 자신이 그린 것이 아니라 광주 영령들이 자신 속으로 들어와 그려진 것이라고 했다. 은유와 상징이 리얼한 그림보다 더 오래 잔상을 남긴다는 말도 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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