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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고아로 둔갑해 미국 입양됐다 추방" 재판, 세계 각지에서 방청객 모인 이유는?

"홀트, 1억 배상해라" 해외 불법 입양 첫 판결…각국에서 모인 해외입양인들

서울중앙지법 (사진=연합뉴스)

지난 16일 서울중앙지법 민사법정 359호. 오후 재판을 앞두고 법정은 일찍이 방청객과 취재진들로 꽉 차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바로 해외 입양인 신송혁 씨가 '불법 입양'을 당했다며 홀트아동복지회와 우리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선고 공판이 열리는 법정이었습니다. 신 씨에 대한 홀트의 배상 책임이 일부 인정되는 판결이 나오자 법정을 빠져나온 방청객들. 하나둘 모여 저마다 다른 언어로 소회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바로 신 씨와 비슷한 시기 홀트를 통해 한국에서 미국, 덴마크, 노르웨이 등지로 입양된 해외 입양인들입니다.

'덴마크 한국인 진상 규명 그룹', 혹시 들어보셨을까요? 덴마크를 비롯해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 네덜란드 등 10개국에서 650여 명이 가입한 세계 최대의 한인 입양인 커뮤니티입니다. 한국 전쟁 이후 '고아 수출국'이란 오명까지 썼던 우리나라. 해외 입양이 하나의 산업이 되면서 당시 친 부모가 살아있는데도 부모 정보를 기재하지 않고 '고아 호적'을 허위로 만들어 입양을 보내거나, 성폭력이나 학대 전력이 있어 자격이 없는 부모에게 입양되는 등 피해 사례가 많았습니다. 일단 입양만 보내 놓고 아이 시민권이 제대로 취득 됐는지 확인하지 않아 신 씨처럼 강제 추방 당하는 사례들도 마찬가지인데요. 그렇게 신 씨와 비슷한 상처와 아픔을 가진 이들이 재판 결과를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법원에 모인 겁니다.

신 씨가 제기한 소송은 해외 입양인이 입양 과정의 불법성을 이유로 입양 기관과 정부에 배상을 요구한 첫 사례입니다. 소송을 준비하고 있는 다른 해외 입양인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죠. 법원은 이날 재판에서 홀트의 배상 책임을 일부 인정하고 신 씨에게 1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다만 정부에 대한 청구는 기각했는데요. 미국으로 입양됐던 신 씨에게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우리 법원이 '해외 불법 입양'에 대한 첫 소송에서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취재파일>을 통해 정리해보겠습니다.
 

"고아로 둔갑해 미국 입양됐다 추방"…남은 건 다섯 개의 이름 뿐

해외입양
▲ 신송혁 씨 가족

세 살 때인 1979년 미국으로 입양된 신송혁 씨. 신 씨에게는 다섯 개의 이름이 있습니다. 신송혁, 신성혁, 아담크랩스…. 이름이 여러 개가 될 수밖에 없던 사연을 따라가 보면, 그가 이번 소송을 제기한 이유가 드러납니다. 신 씨의 본명은 신성혁, 홀트는 그를 입양 보낼 때 '신승혁'이란 본명을 '신송혁'으로 잘못 기입했습니다. 미국으로 입양된 후에는 양부모의 학대를 겪었고, 파양과 재입양 그리고 재파양을 거쳤습니다. 그때마다 이름도 바뀌어야 했죠. 그렇게 이름만 다섯 개가 됐습니다.

두 차례의 파양 끝에 신 씨는 고작 16살 나이에 거리에서 노숙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돼 자신에게 미국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양부모가 신 씨의 시민권 취득 절차를 밟아주지 않았던 거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법 체류자가 돼있던 신 씨. 꿋꿋이 재기의 발판을 다져 미국에서 단란한 가정까지 꾸렸는데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영주권을 재발급 받는 과정에서 청소년 시절 경범죄 전과가 드러나 한국으로 한 순간에 추방된 겁니다. 그렇게 지난 2016년 미국에 있는 두 자녀들과 헤어진 채 한국으로 추방됐습니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와 홀트와 대한민국 정부에 2억 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습니다. 소송 청구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홀트가 자신에게 생모가 있는 데도 고아로 꾸며 불법 입양을 시켰고 2) 시민권 취득 과정을 확인하는 등 입양 절차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다 3) 그리고 정부 역시 홀트의 부실, 불법 입양을 제대로 관리 감독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선, 자신의 호적을 고아로 꾸며 입양시켰다는 신 씨의 주장. 앞서 언급한 '덴마크 한국인 진상 규명 그룹' 해외 입양인들이 겪은 대표적 피해 사례 중 하나입니다. 일명 기아 호적(고아 호적)을 만들면 입양 시 친 부모 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입양이 가능해지는데요. 양부모가 입양할 아이를 직접 보지 않고도 대리인을 통해 입양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입양 절차가 간단해지다 보니 입양 기관들이 과거 친 부모가 있는 아이들의 경우에도 기아 호적을 만들어 입양을 보냈다는 지적들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사실 친부모는 해외 입양에 어떠한 동의도 한 적 없는데 입양 서류에는 고아로 표시돼있다 보니 해외 입양인 입장에선 평생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뒤늦게 이상한 점을 발견했더라도 조작된 서류 때문에 친 부모를 찾을 가능성이 희박해질 수밖에 없단 겁니다. 해외 입양인들이 '진상 규명' 커뮤니티를 만든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고요.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친 부모를 알 권리가 침해됐다는 거죠.
 

"홀트, 입양아 미국 국적 취득 여부 확인 안 해" 입양 기관 책임 첫 인정

입양만 보내 놓고 나몰라라 입양 기관 홀트 1억원 배상 판결

그만큼 이번 재판에서 홀트 측의 허위 호적 작성, 그 불법성이 인정될지가 주요 포인트 중 하나였는데요. 1심 재판부는 홀트가 입양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 일부러 고아 호적을 만들었단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신 씨의 생모는 신 씨를 1978년 한 영아원에 입소시켰는데, 당시 영아원 아동카드 기록 등 정황을 보면 신 씨 생모가 양육을 포기하려 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또 신 씨 친 부모가 신 씨에 대한 출생 신고도 하지 않았고, 호적에 입적시키려고 한 정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것도 판단 이유로 들었습니다. 애초에 신 씨 생모가 양육을 포기할 의사로 영아원에 신 씨를 위탁했기 때문에 홀트가 허위로 기아 발견 보고를 하고 고아 호적을 만들었다고 보기는 힘들단 겁니다.

의미 있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홀트가 입양만 보내놓고 미국 국적 취득 여부도 확인하지 않는 등 후견인으로서의 보호 의무를 방기했다는 신 씨 측 주장을 인정한 대목인데요. 우리 법원이 해외 입양인에 대한 국내 입양 기관의 책임을 인정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재판부는 신 씨가 입양 37년 만에 한국으로 추방되고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된 배경에 홀트의 책임 방기가 있다고 봤습니다. 홀트가 예비 양부모에게 시민권 취득 절차를 이행하도록 고지하고 지도했어야 한다는 겁니다.

입양 당시 신 씨가 받았던 비자는 IR-4 비자. 양부모가 입양아를 데리러 한국에 와 입양을 완료한 아동들에게 부여되는 IR-3 비자와는 달랐습니다. IR-4 비자의 경우 입양이 완료되지 않은 채 미국에 입국하게 되는데요. 이 경우 아이들에겐 한시적인 영주권만 부여되고, 양부모에겐 2년의 임시 양육권이 부여됩니다. 2년이 지난 뒤 예비 양부모가 관할 주 법원에서 입양 재판을 거쳐 입양 명령을 받아야만 입양 절차가 완료됩니다. 또 입양이 완료된 뒤 양부모가 시민권 취득 절차를 밟아야 시민권까지 획득할 수 있는데 신 씨의 양부모는 시민권 신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입양 완료 전 2년의 기간, 즉 양부모의 임시 양육 기간 동안은 홀트의 후견 의무가 유지된다고 봤습니다. 입양 완료가 되기 전인 2년 동안은 아이를 위한 보호조치를 해야 하고, 그 보호 조치 중 가장 중요한 게 입양 완료 후 아이들이 제때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사전 조치를 마련하고 이행하는 것이란 겁니다. 나아가 재판부는 홀트가 입양 아동의 국적 취득 여부를 확인하고 이를 법무부 장관에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이조차 이행하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홀트가 의무를 다했다면 신 씨가 성인이 될 때까지도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해 강제 추방 되는 결과가 초래되지 않았을 거란 겁니다. 재판부는 "신 씨는 미국에서 배우자 및 자녀들과 함께 생활했으나 강제 추방되면서 더 이상 미국에 함께 거주할 수 없게 됐다"며 "비록 신 씨가 멕시코 등 다른 국가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할 수 있다 해도 수십 년간 살아온 삶의 터전을 상실한 원고가 겪을 정신적 고통은 매우 클 것임이 분명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 씨가 꼭 다투고자 했던 우리 정부의 관리 감독 책임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정부가 홀트의 입양 업무를 감독할 의무가 있다면서도 "홀트가 직접적 의무를 부담한다면, 정부는 입양 요건과 절차를 정해 아동의 권익과 복지를 증진하는 일반적 의무를 부담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기존의 입양 제도나 정부 대응에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 하더라도 고의로 감독 의무를 위반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봤습니다.
 

"이번 판결이 시작, 이번엔 뭔가 다를 것 같다"…유사 소송 잇따를 듯

(블러 추가) 입양만 보내 놓고 나몰라라 입양 기관 홀트 1억원 배상 판결

일부 승소 판결이긴 하지만, 해외 입양인들은 이번 판결이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1974년 홀트를 통해 덴마크로 입양됐던 피터 뮐러 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 그룹 공동대표는 "홀트를 법정에 세우기까지 70년이 걸렸다"며 "이 자체로 굉장한 일이고 홀트의 책임에 대해 법의 심판을 받게 한 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공동대표인 해외 입양인 한분영 씨도 '이번에는 뭔가 좀 다른 것 같다'며 기대감을 드러냈습니다. 한국에선 들리지 않았을지 몰라도 전 세계 각지 한인 해외 입양인들이 수십 년 전부터 목소리를 내왔고 이제 조금씩 그 문이 열리는 거 같다는 겁니다. 진실화해위원회도 최근 해외 입양 과정에서 일어난 인권 침해 사건 370여 건에 대한 조사를 개시하겠다고 발표했는데요. 신 씨 사례처럼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거나 고아나 제3자 신원으로 서류가 조작돼 입양 보내졌다는 사례들입니다. 조사 결과가 나올 경우, 해당 자료 등을 근거로 입양 기관이나 국가의 책임을 따지기 더 쉬워질 걸로 보입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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