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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토론 수업으로 대학 간다…IB가 뭐길래

국제 바칼로레아 (International Baccalaureat, IB) 수업에 직접 가보니 1)

지난달 대구 포산고등학교에 내려가서 3학년 역사 수업을 참관했습니다. 학생들은 히틀러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는데요,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________. 왜냐면 __________ 때문이다. "라는 문장을 어떤 내용으로 채울 것인가, 선생님이 질문을 던지자 학생들 사이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포산고 수업장면
 

고3 교실에서 토론 수업을 한다고?


"주변국과 연합해 힘으로 견제할 수 없었는데도 유화정책을 쓰다가 히틀러를 막지 못했다", "대공황 이후 경제난으로 인해 전쟁은 안된다는 영국 내 여론 때문에 체임벌린이 어쩔 수 없이 유화정책을 쓴 것이다" 등등, 학생들은 선생님이 사전에 배포한 신문기사와 논평, 논문 등 여러 자료와 함께 본인들이 준비한 자료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이어나갔습니다.

매달 닥치는 모의고사와 수능 준비에 열을 내야 할 고3 학생들이 이렇게 토론 수업을 할 수 있는 건 이들이 국제 바칼로레아 (International Baccalaureat, IB) 디플로마 과정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IB 디플로마 과정은 고2부터 2년 동안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성, 의사소통, 작문, 연구 능력을 기르도록 설계돼 있는데, 결국 현실 세계에서 문제해결 역량을 갖추는 게 목표입니다. IB 디플로마 성적은 전 세계 90개국 3천3백여 개 대학에서 대입 성적으로 인정하고 있어, 지금까지 국내 국제학교와 일부 자사고에서 IB 과정을 통해 해외 대학에 진학해 왔습니다. 다만, 대구와 제주에서 공교육에 도입한 프로그램은 IB의 공식 언어인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수업과 평가가 이뤄지는 게 아니라, 한국어로 4과목, 영어로 2과목을 진행하는 이중언어 디플로마 프로그램입니다. 즉, 국어와 사회, 과학, 수학 분야는 한국어로, 영어와 예술 분야는 영어로 수업과 평가가 진행됩니다. 

IB 디플로마 프로그램 교육과정

이중언어 IB 디플로마로 대학에 갈 수 있나?


IB 디플로마 과정을 통해 올해 대학 입시에 도전하는 고3 학생은 모두 193명입니다. 제가 다녀온 포산고를 비롯해 대구 지역 3개 학교에 68명, 그리고 제주 표선고등학교 125명이 있습니다. 2019년부터 대구와 제주 교육청이 우리말 IB를 초·중·고 순차적으로 공교육에 적용해왔는데, 올해 처음으로 대학 진학에 도전하는 고3이 나온 겁니다. 이들이 받는 IB 디플로마 점수는 내부 평가와 외부 평가, 그리고 핵심 과정을 종합해 나오는데, IB본부가 주관하는 외부 평가가 수능과 비슷한 시기에 치러지기 때문에 대부분이 수능 점수를 요구하지 않는 수시 전형을 통해 진학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수능 최저를 요구하는 대학을 염두에 두고 시간을 쪼개 수능까지 준비하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고3 학생들은 IB 과정으로 대학 문을 두드린다는 데 대해 약간의 불안감이 없진 않았지만, 수업 방식이 자신의 스타일과 맞아서 이 과정을 선택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정시현 / 대구 포산고 3학년 (IB 디플로마 과정)
"과제가 많을 때는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수업을 하면 완벽하게 흡수를 잘 한다고 해야 할까요. 선생님이 칭찬해주시고, 과제 점수도 잘 나오고 하면 더 뿌듯해서 오히려 다음에 할 때 더 열정적으로 하는 거 같아요. 저는 한 번 잡으면 쭉 깊게 들어가는 스타일인데, (IB수업은) 깊게 다루면서 다른 것까지 연계하니까 저는 그런 스타일을 선호합니다. "
 
김정인 / 대구 포산고 2학년 (IB 디플로마 과정)
"저는 과학 관련 연구직에 종사하고 싶거든요. 그런데 (IB과정은) 일반(수능 준비)반 학생들은 할 수 없는, 본인이 원하는 걸 직접 정하고 그걸 심화해서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게 가장 좋았습니다...... 수능 공부하는 친구들과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보기에는 제가 앞으로 하고 싶은 직업이나 하고 싶은 일이 IB가 조금 더 맞다고 생각하고, 사실 주어진 문제를 푸는 것보다 요즘은 질문을 하는 게 더 중요한 시기라고 하잖아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IB가 미래 역량을 키울 수 있게 도와준다고 생각해요. 일반(수능 준비)반 학생들은 전체적인 지식을 깊이 있게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거잖아요. 많은 문제들을 풀어보면서 그게 본인 몸에 새겨지고, 그런 과정들도 무시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걸 선택할 지는 본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반 친구들이 경쟁자가 아니다?

인터뷰를 하던 중에, 눈이 번쩍 뜨이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일반적으로 모둠 활동을 하다 보면 결과물에 기여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불평·불만이 생기게 되는데, 참여형 수업을 주로 하면 이런 갈등은 없느냐고 질문했을 때였습니다. 
 
정시현 / 대구 포산고 3학년 (IB 디플로마 과정)
"기숙학교이다 보니까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다른 과목에 치중하다 보면 가끔 자는 친구들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저희 반 분위기 자체가 저희끼리 경쟁을 할 필요가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각자 응원하고, '피곤할 수 있지, 이 친구가 덜 한 건 나중에 알려줘야겠다' 라는 식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다들 가는데, '나는 어차피 이 과목 딱히 필요 없으니까 열심히 안 해야지' 하고 편승하는 분위기는 없는 거 같아요."
 
그런데, 잠시만요, 고3 학생들이 서로를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요?
 
정시현 / 대구 포산고 3학년 (IB 디플로마 과정)
"오히려 서로 과제 보여주면서 '야, 내가 뭐가 좀 부족하냐, 피드백 좀 해줘라' 하면서 서로 과제가 하나 큰 게 떨어졌다고 하면 애들끼리 카톡이나 메시지로 '내 거 보면서 수정 좀 해줘라, 어떤 게 부족하냐' 이렇게 비교하면서 도와주는 분위기입니다. 경쟁 체제가 아니라는 확신, 그건 애들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점수에 목매고 이러면서 서로 눈치를 보기보다는 그냥 얘를 도와주면서 나도 얻을 게 있으니까 도와준다, 이런 식으로 마인드가 잡혀있는 거 같아요. (친구랑 협동하면서 나도 성장한다?) 네, 서로 얻는 게 있는 거죠, 공생 관계처럼."
 
이 학생이 특이한 사례일까요? 아니면 카메라 앞이라서 일부러 멋지게 대답한 것일까요? 
고3 학생은 물론 고2 학생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김정인 / 대구 포산고 3학년 (IB 디플로마 과정)
"경쟁, 사실 반 안에서는 직접적으로 잘 느끼지 못하는 거 같아요. 저희도 3학년이 같은 층을 쓰다 보니 옆 반 (수능준비반) 보면 분위기가 보이잖아요. 굉장히 살벌하거든요. 그런데 저희 반은 전혀 그런 딱딱한 분위기 혹은 내 걸 지켜야 되고, 내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 되고, 그런 것보다는 서로의 결과물을 보고 서로 피드백 해주고, 그런 과정 안에서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거든요. 그런 점이 IB의 장점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조승완 / 대구 포산고 2학년 (IB 디플로마 과정)
"경쟁자보다는 서로 피드백을 해주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가서 친구한테 물어보고, 제가 보는 방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니까, 다양한 의견을 가진 친구라고 생각되지 경쟁자로 느껴지지 않아요."
 
학생들이 이렇게 느끼는 데는 평가 시스템이 한몫 한 거 같습니다. 한 문제 때문에 일희일비하는 시스템이 아니니까요. IB디플로마 프로그램은 과목별로 7점 만점 (총 42점)의 점수와 핵심 과정 3점 만점의 점수를 합쳐서 총 45점 만점으로 평가됩니다. 지식이론 전시회와 에세이, 소논문, 창의활동봉사 같은 핵심과정 외에도 내부평가와 외부평가에서 일부 선다형 문제(과학 분야)를 빼면 대부분 논술, 서술형 문제로 나옵니다. 수능 시험처럼 외부 평가가 있지만, 학교 생활과 활동 전체를 평가하기 때문에 주변 친구들보다 한 문제 더 맞히고 1점 더 얻는 데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IB 디플로마 평가

구술·논술·서술형 평가가 공정할까?

IB 프로그램은 스위스에 본부를 둔 비영리교육재단 (IBO)이 개발·운영하고 있습니다. 로열티를 받고 프로그램을 전수하는데, IBO가 가장 중점을 두는 것 중의 하나가 평가 노하우입니다. 앞서 얘기했듯 IB 디플로마 점수가 국제 공인 성적으로 대학 입학에 활용되는 건 컴퓨터 채점이 불가능한 논술.서술형 평가임에도 공정하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IB 인증 학교에선 IBO의 특별 연수를 받은 교사를 중심으로 학생들의 성장 과정에 대한 피드백을 주는 동시에 ABC 3단계로 내신 성적 (내부 평가)을 내고, 외부 평가는 IB 본부 채점관이 중복 채점해서 공정성을 높입니다. 아무래도 평가 방법과 학생부 반영 방식이 가장 궁금해서 샘플이라도 학생부를 볼 수 있을까 요청했는데 개인 정보라서 힘들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다만, 학생의 다양한 활동을 기술하는데 일반 고등학교와 똑같은 글자 수 제한을 받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압축하는 게 가장 힘들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또 일반 고등학교의 활동과는 다른 면이 많아서 각 대학의 입학사정관에게 이를 이해시키기 위한 설명회를 열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학생 추가 부담 없다…교육부도 IB 확산 지원

영어로 진행되는 IB 디플로마 프로그램은 이미 국제학교를 비롯해 경기외고와 충남삼성고 등에서 진행해왔는데요, 국제학교의 학비는 말할 것도 없고, 자사고에서도 추가 비용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대구와 제주에서 실시하는 우리말 IB 프로그램은 학생 부담금이 전혀 없습니다. 최근 무상교육 방침에 따라 공립 고등학교에선 등록금을 내지 않는데, 현재 고3 대상 우리말 IB 디플로마를 진행하는 대구외국어고등학교와 경북대사범대부설고등학교, 대구 포산고등학교, 제주 표선고등학교 모두 학생이 내야 하는 추가 비용은 없습니다. (대구외고는 사립이 아닌 공립입니다.) 물론, IB를 진행하기 위해 교사 연수와 교재 번역 등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지만 해당 교육청이 부담했고, 지난해부터는 교육부도 IB 교사 연수 등에 특별교부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대구와 제주 외에도 서울과 부산, 경기, 인천, 광주,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에서 IB 준비 학교를 운영하거나 맞춤형 교사 연수를 시행할 계획입니다. 교육부가 내세운 사업 목적은 "IB 프로그램의 확산을 지원하여 다양한 수업·평가 혁신 사례를 확산하고, 학교 교육력 제고를 지원한다" 입니다. 
 
공교육에 IB를 도입한 데 대한 가장 큰 비판은 IB 본부에 로열티를 지급한다는 겁니다. 우리 정부도 자체적인 국가교육과정을 수립하고 이에 따른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해외 프로그램을 사오는 것은 교육 주권을 포기한다는 비판입니다. 이에 대해 강은희 대구교육감은 국가교육과정을 바탕으로 IB 프로그램이 이뤄지고 있고, IBO에 지급하는 비용도 자료의 활용성 등을 생각하면 그리 크진 않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IB 도입·확산의 목표가 국가 교육체계를 IB로 바꾸자는 게 아니라 혁신적인 교수학습 방법·평가에 대한 경험을 통해 우리 공교육의 변화를 꾀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강은희 / 대구 교육감
"2022년 깊이 있는 학습을 하기 위해 국가교육과정을 바꿔놓았거든요. 이제 학습 설계 방법도 백워드 형태(이해 중심 교육과정 설계)로 바뀌었는데, 백워드 설계를 제대로 하려면 어떤 단계를 거쳐야 교사들이 바뀌는지, 그런 과정이 생략된 채 최종적인 목표만 현장에 전달했기 때문에 그걸 바꿀 체계적인 시스템을 여태 가지지 못했던 거죠. 그래서 IB 프로그램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도 무엇이 부족하고 우리의 장점은 무엇인지 배워서 익혀가면서 체계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거죠. IB 스타일의 교수학습법을 배우면서 우리가 서서히 이 체계를 우리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IB 프로그램의 도입으로 어떻게 우리 공교육의 변화를 꾀할 것인지, 다음 편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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