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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김일성 동상' 비판을 듣고 있던 북한의 그 사람

[N코리아정식] 그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2천 년대 후반 북한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만 해도 평양 순안공항은 남한의 지방공항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초라했습니다. 공항에서 평양 시내로 가는 버스에 올랐는데, 평양 시내로 이동하는 도중 버스에 같이 탄 북한 인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혁명의 수도 평양에 오신 기분이 어떻습네까?"

평양 방문 당시 순안공항에서 찍은 사진
당시 버스 안에는 평양에 처음 온 남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평양이라는 곳에 처음 오게 되니 북한에 대한 호기심으로 누구 한 명 조는 사람 없이 평양 모습 구경에 한창이었는데, 북한 인사는 이를 평양에 대한 동경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습니다.

"혁명의 수도 평양에 오신 기분이 어떻습네까?"라는 말에는 평양과 같은 훌륭한 도시를 본 적이 있느냐는 자부심이 묻어났습니다. 외국 한번 나가본 적 없고,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우월한 나라라고 교육받은 북한 인사 입장에서는 수도 평양을 남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운 듯했습니다. 질문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같은 한국말을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 이해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던 기억이 납니다.
 

백두산 방문 당시 있었던 일

당시 북한 방문 일정 동안 백두산에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평양에서 북한 고려항공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삼지연 공항에 내려서 백두산에 오르는 일정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평양의 호텔에서 나와 순안공항으로 이동한 뒤 고려항공을 타고 삼지연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보통 비행기를 타면 신문을 주듯이 북한 고려항공도 신문을 제공하는데, 노동신문을 나눠주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삼지연 공항에서 내려 버스로 나눠 타고 백두산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백두산 정상 부근에 있던 표지석
백두산 정상으로 가는 도중 이곳저곳 관광지를 들렸는데, 북한의 관광지라는 것은 거의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적지입니다. 김일성이 백두산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며 조국을 해방시켰다고 선전하고 있는 북한에서는 백두산 곳곳에 김일성 동상을 세우고 관련 유적지라는 곳들을 개발해 놨습니다. 사적지라는 곳에 내리면 북한의 전문 해설사들이 김일성의 항일투쟁 업적을 줄줄이 설명해 주곤 합니다.

백두산의 한 사적지에 내렸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도 김일성 동상이 엄청나게 크게 서 있었는데, 함께 방북했던 몇몇 기자들과 북한 전문가인 교수가 김일성 동상 한쪽 편에서 이런 얘기를 하게 됐습니다.

"백두산에만 해도 엄청난 동상들이 곳곳에 서 있는데, 이런 동상을 만들 돈으로 식량을 사서 북한 주민들에게 나눠줘야 하는 것 아닌가"

"북한 주민들이 제대로 못 먹고사는데 이런 동상 제작에 돈을 쓰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


기자들이 이런 얘기들을 꺼내자, 같이 있던 교수는 북한의 행동방식을 '프레스티지 이코노미'(prestige economy), 즉 '위신 경제'라는 틀로 설명했습니다. 간추리자면 대체로 이런 내용입니다.

김일성이 1994년 사망했을 때 북한은 '고난의 행군'으로 들어가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은 당시 김일성의 집무실이었던 금수산의사당을 김일성의 시신을 안치하는 금수산기념궁전(지금의 금수산태양궁전)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막대한 돈을 썼습니다.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는데 건물 리모델링에 막대한 돈을 쓰는 게 제정신이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지만, 정권 유지라는 차원에서만 보면 그게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게 '위신 경제'의 설명방식입니다.

건물 리모델링에 들어가는 돈으로 식량을 사 와도, 어차피 북한 주민들의 식량난을 모두 해결할 수 없는 만큼 그 돈을 김일성 우상화에 써서 김일성 일가의 절대성을 북한 주민들에게 각인시키는 게 정권 유지에는 보다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굶어 죽는 주민들보다 정권 유지가 더 중요한 북한의 입장에서 가능한 얘기겠죠.
 

북한 비판 발언 그대로 듣고 있던 북한 인사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 당시 제가 주목해서 봤던 것은 주변에서 서성이던 한 북한 인사의 행동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저를 포함한 기자들과 교수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는데 모른 체하면서 일부러 다른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백두산 속이라 주변에 소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저희들이 소곤소곤하는 작은 목소리로 대화한 것도 아니어서 저는 대화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북한 인사는 일부러 다른 곳을 보는 듯하면서도 저희들의 대화를 그냥 그대로 듣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희들의 대화를 문제삼자면 보통 복잡한 일이 아닐 테니 모른 체하자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을 보는 듯하면서도 계속해서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이 특이했습니다. 그곳을 떠나 다른 일정이 시작됐을 때에도 그 인사는 우리들에게 기분 나쁜 표정을 짓지 않았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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