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삶이 간절해져 비로소 -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 [북적북적]

삶이 간절해져 비로소 -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78 : 삶이 간절해져 비로소 –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
그리하여 사랑이 끝난 뒤에, 사랑이 남을 것이다.

'가장 잔인한 달', 4월입니다. T.S.엘리엇의 시 '황무지'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이 구절은 너무도 익숙하여 이제는 식상하게까지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 전체를 읽어보고 나서도, 역시 가장 강렬하게 남는 것은 이 구절입니다. 저는 대학 때 '황무지'를 수업시간에 따로 배웠습니다. 한참 수업하고 시험까지 봤지만, 돌아서면 이 문구가 여전히 알쏭달쏭한 느낌으로 새롭게 다가옵니다.
요즘 날씨가 변덕스럽습니다. '봄날씨가 왜 이래!'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4월은 사실 늘 이랬습니다. 하늘이 보지 않고는 믿기 어려울 요상한 색깔로 변한다든가, 갑작스러운 어둠과 돌풍이 몰아쳤다 지나간다든가… 세상이 다시 생의 한 주기를 시작하는 이 시기의 대기란 참 불안정해질 수 있어서, 다른 때 볼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합니다. 이윽고 녹음이 짙푸르게 다가와서 강렬한 에너지로 우리를 압도해 버리기 전, 4월은 그 새로운 시작의 정서가 유독 –이 시점에선 어렴풋한- 끝에 대해서도 문득문득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사진으로 남은 모든 풍경은 결코 내가 바라본 그대로일 수 없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나는 탄식한다. 이것을 담을 수 없다. 이것은 지나갔다. 그런데도 시간이 흘러, 훗날 현상된 사진을 보며 어떤 이들은 경탄할 것이다. 그 숲이 아름답다고. 어쩌면 나도 홀린 듯 벅찰 것이다. 그 숲의 아름다움이 마치 사진 속에 박제된 꼭 그만큼이었던 것처럼. 짐짓 충분하다는 듯이. 거짓된 향수에 자족하며. 그러나 동시에 나는 알고 있을 것이다. 빼곡한 나무들의 한가운데서 하얀 입김으로 경탄했던. 그 숲과 이 사진은 같지 않다.

요새 제 마음이 유달리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상실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소중한 것이 생겼을 때입니다.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생겨야 비로소 잃는다는 것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흔한 셀카 한 장이 휴대폰 사진첩에 변변히 없을 정도로, 대체로 사진 찍기를 매번 '까먹는' 편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진을 꽤 많이 찍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자라나는 아기는 놀라울 정도로 매일매일 무언가가 달라집니다. 오늘과 내일이 같아 보이는 아기는 없습니다. 오늘이 지나가면 '이 모습'은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자꾸만 휴대폰을 찾게 됩니다. 그러면서 요즘, 사진으로,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는 행위에 대해 문득문득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확증하는 것은 그 숲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내가 이 세상에 없을 언젠가'에 대해서 비로소 진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는 것은 보통 부모가 된 다음부터가 아닐까 합니다. 스스로가 소멸할 언젠가에 대해서 잊고 살 수 없게 됩니다. 부모라는 사실의 엄중한 시효는 그야말로 끝이 없기 때문에, 소중하게 시작되고 있는 새 생명의 앞에서 나의 끝을 강렬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눈앞에 사물이 없더라도 정물화를 그릴 순 있지만 당신이 없었다면 이 사진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나는 디지털 시대의 허다한 조작 가능성을 외면하고, 거기 틈입할 폭력의 위험만은 잊지 않은 채, 다만 바르트를 따라 조금은 옛날에 서서, 경외하듯 이 말을 쓴다. 사진의 근본은 그 대상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데 있다.

그래서 오늘의 책 제목이! 너무나도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제목을 보는 순간, 읽지 않을 수 없을 것임을 사실 짐작했습니다.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 공연예술이론가 목정원 님의 두번째 사진산문집입니다.
있었다, 라는 저 판명한 사실은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마치 영원히 있을 것처럼 그때 당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더 이상 그렇지 않음을 확인하는 일과 너무도 가깝기 때문에. 지금 당신이 살아 있더라도, 우리가 손을 잡고 있더라도 이는 마찬가지다. 당신의 사진을 볼 때, 나는 당신이 죽을 것을 동시에 본다. 어느 미래에, 당신이 죽어 없을 것이라고, 사진은 끝없이 말하고 있다.

목정원 님은 이 책을 '없을 당신에게' 바칩니다. 언젠가 없을 당신에게. 지금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없을 당신에게.
당신과 함께 찍고 있는 이 풍경, 당신과 함께 포착하고 있는 이 풍경은, 포착되고 있기 때문에 그 순간 또한 사라집니다. 포착하고 있다는 행위 자체에 이미 과거가 깃들어 있습니다. 사진을 더욱 그럴싸하게 찍어낼 수록, 사진 속에 담긴 이 풍경, 이 시간은 지나갔다는 것이 점점 더 또렷해집니다.
바르트는 언젠가 사진과 함께 기어이 소멸할 사랑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는 이 문장으로부터 도리어 사랑의 잔존을 읽어낸다. 그때까지, 사랑이 있을 것이다.

글보다 사진이 훨씬 더 많은 책이라 조금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사진들이 참 좋은데, 낭독 팟캐스트를 통해서는 전달해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지 않은 글 분량에서도 낭독을 통해서 함께 나누고 싶은 구절들이 속속 나와서, 결국, 선택했습니다. (이 낭독은 유튜브의 SBS뉴스채널을 통해서도 서비스됩니다. 유튜브에는 목정원 작가가 이 책에 실은 106장의 사진들 가운데 몇 작품이 낭독과 함께 4월 24일부터 올라갑니다. 마치 그 자체 고유한 그림자들을 각각 지닌 듯, 여운이 긴 사진들을 '북적북적' 가족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 문의했더니, 작가와 출판사가 흔쾌히 허락해 주셨습니다. 유튜브에선 사진 함께 보면서 들어주시고,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 직접 펼쳐보셔서 다른 사진들도 모두 만나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프랑스 곳곳을 비롯한 유럽과 한국의 여러 지역들을 오갑니다. 시베리아의 벌판과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 파리의 오페라 극장과 (아마도 모네와 똑같은 자리에 목정원 작가도 섰던 것이 아닐까 싶은) 모네의 풍경화를 통해 익숙한 지베르니의 풍경부터 우리 광양과 강릉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제가 가본 곳도 있고, 영 낯선 곳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진들이지만, 사실 목정원 작가의 사진들입니다. 작가의 시간들이 담긴 사진들이라, 제게 익숙한 곳조차도 낯설게 다가옵니다. 그저 풍경일 뿐인데도, 이것은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렬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나의 사진들을, 이 책장 너머 내게는 보이는 나의 시간들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나의 사진들이 이렇게 아름답거나 세상에 프로페셔널로서 내놓을 만한 사진들이 아니더라도, 내 삶에 사진으로 남은 장면장면들이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문득 되새기게 합니다.
어쩌면 사진은 애초부터 물성을 갖지 않는 것 같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사라지지도 않을 것 같다. 촬영된 이미지를 일별하는 것만으로 내게 그 사진은 영영 존재한다. 한때 사랑이 있었던 것을 증명하며. 그리하여 사랑이 끝난 뒤에, 사랑이 남을 것이다.

목정원 작가가 회전목마를 포착하는 순간은, 그것이 한창 돌고 있을 때가 아니라, 아이들이 모두 떠나고 휘장이 내려져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실은 들어본 적도 없는, 저 회전목마가 아이들을 태우고 신나게 돌던 시간들에 흘러나왔을 그 멜로디가 귓전을 맴도는 것 같은 기분이 됩니다. 지금이 소중하니까 끝을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고, 끝을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더더욱 지금의 소중함이 전에 알지 못했던 날카로움으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4월과 그 너머에 다가오는 시간들에도 [북적북적] 함께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침달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 <골룸: 골라듣는 뉴스룸> 팟캐스트는 '팟빵', '네이버 오디오클립', '애플 팟캐스트'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 '팟빵' 접속하기
- '네이버 오디오클립' 접속하기
- '애플 팟캐스트'로 접속하기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