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명의 생명이 스러진 그날 밤
불은 4층 한 가정집 냉장고에서 시작되었으나 1시간 만에 24층 꼭대기까지 번졌고, 129 가구가 사는 건물은 결국 전소했다. 작은 화재가 걷잡을 수 없는 참사로 치닫게 된 원인은 1년 전 새로 설치된 외장재에 있었다. 이는 저렴하지만 가연성이 높아 유럽에서는 사용이 금지된 자재였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정부 당국이 꾸준히 규제 완화를 추진해 온 덕분에 입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용될 수 있었다. 즉, 그렌펠 타워 화재는 산업의 이익을 생명과 안전 앞에 놓았을 때부터 예견된 참사였고 명백한 인재였다.
또한 화재 진압에 나섰던 소방당국이 긴박한 현장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입주민들에게 "가만히 있으라(Stay Put)"는 원칙적 가이드라인을 첫 97분간 반복한 것 역시 인명 피해를 키운 원인 중 하나였다.
대화도 배경 음악도 없는 다큐멘터리 '그렌펠'
영상은 멀리 런던을 내려다보는 항공 샷으로 시작한다. 혼잡한 도로 소리, 새소리 등 부산한 삶의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촬영하던 헬리콥터가 날카롭게 방향을 전환하면 이윽고 검게 탄 건물의 잔해가 눈에 들어온다. 순간 모든 소리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 듯 사라져 완벽한 진공상태에 이른다.
이어지는 영상 속에는 카메라를 통한 감독의 시선만이 담겼다. 어떠한 이야기도, 드라마도 없이 건조한 응시만 있지만 그 시선에는 억눌린 분노가 깃들어 있다. 까맣게 탄 잔해를 전체적으로 부감한 카메라는 조금 더 가깝게 접근해 천천히 회전하며 꼭대기부터 한 층 한 층 꼼꼼하게 기록한다. 녹고 불타 뼈대만 남은 건물 속에는 커다란 쓰레기 봉지가 군데군데 쌓여 있을 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화재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촬영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가피하게 연상되는 삶의 흔적에 눈을 돌려 외면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이것이 감독의 의도였을지도 모르겠다. 카메라는 무자비할 정도로 고집스럽게 집에서 집으로, 한 채도 빠뜨리지 않고 천천히 옮겨가며 참사를 기록한다. 저층으로 내려오면 건물을 흰 천으로 가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영화가 끝나고 출구를 나서면 하얀 벽과 마주친다. 그 벽에는 희생자 72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어떤 성은 여섯 번이나 반복되어 하룻밤 사이에 함께 참변을 당한 한 가족의 아픔을 상기시킨다.
참사를 기억하는 방법 : 지워지기 전에 기록해야 한다
맥퀸은 그렌펠 타워 인근에서 성장했다. 사고 당시 그는 이 사회적 참사가 잊히게 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었다고 밝혔다. 그래서 건물 잔해를 가리려는 계획이 알려졌을 때, 화재의 흔적이 모두 지워지기 전에 기록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서둘러 '그렌펠'을 촬영했다. 그렇게 그는 "고의적 태만"에 의해 발생한 비극을 고발한다. 동시에 관람객을 목격자로 만들어 기억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