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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일찍이 미국의 도청 의혹에 강력히 해명을 요구했던 대통령이 있었다

'워터게이트'부터 '남산의 부장들'까지…영화로 본 불법도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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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이 아직 무너지기 전인 1984년 동독. 슈타지(STASI, 국가보위부) 요원인 비즐러의 업무는 반체제 인사로 분류된 예술가 연인을 도청하는 것이다. 비즐러는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애인이자 배우인 크리스타를 감시한다. 교대 시간이 올 때까지 몇 시간이고 헤드셋을 끼고 이들의 집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타자기로 기록한다.

예술가 연인의 기쁨과 슬픔, 사랑을 나누는 것부터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다. 건조한 표정으로 도청 업무를 수행하던 비즐러는 차츰 예술가에게 감화되면서, 정보기관 요원으로서의 고뇌가 시작된다.

영화 <타인의 삶>
2006년작 독일 영화, <타인의 삶>의 줄거리다. 이 영화는 도청업무를 하는 정보기관 요원의 고독을 담았다. 도청은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며 정보기관의 주요 업무가 됐다. 전쟁은 끝났지만, 도청 기술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미국 정보기관의 한국 국가안보실 도청 의혹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를 통해 도청의 역사를 짚어보려 한다.
 

1940년대 : 정보전 '후발주자'였던 미국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독일은 정보기관을 적극 활용했다. 1933년, 나치 독일에서 헤르만 괴링이 이끄는 '연구부'가 설립됐다. 이곳은 무선통신 암호해독을 위한 비밀기관이었다. 6천 명의 직원이 국내와 국외, 민간인과 군인, 무선과 유선전화를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모든 것을 도청했다.

도청을 통해 히틀러는 독일 제국을 비판하는 자들을 잡아들였고, 수다를 떠는 당원들의 통화 내용까지 엿들었다. 독일 정보기관은 슈타지로 이어지면서 동독이 망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영국 또한 20세기 초부터 정보기관 MI6를 만들어 적국의 동향을 적극적으로 살폈다. 2차 대전에서 독일과 영국은 서로 정보기관을 통해 무선통신을 도청했고, 정보전에서 우위를 점하려 했다. '에니그마'(수수께끼)라는 이름의 장치를 사들여 적국이 해독하지 못하도록 암호화된 통신을 보내기도 하고, 이를 해독하기 위한 기술을 얻는 것에 집중하기도 했다.

2015년에 국내에 개봉한 <이미테이션 게임>은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이 어떻게 독일의 암호를 해독하게 되는지를 그린 영화다.

독일, 영국과 달리 미국은 2차 대전 당시까지 제대로 된 정보기관이 없었다. 미국은 1929년 정부의 암호해독 활동을 중단시켰는데, "신사는 다른 사람의 우편물을 읽지 않는다"는 당시 외무부장관 발언이 미국의 태도를 보여준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날, 세계에서 비밀정보부가 없는 유일한 강대국"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두 가지 사건이 미국을 최고의 정보기관을 가진 나라로 변모시킨다. 진주만 사건과 9.11 테러가 그 사건들이다. 미국은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기습적인 진주만 폭격을 예측하지 못했다. 정보전에서의 실패가 큰 피해를 가져온다는 걸 깨달은 미국은 정보기관의 힘을 키우게 된다. FBI가 정보 업무를 넓혀가고, OSS는 CIA로 재편된다. 또 미국의 대통령은 정보기관들로부터 매일 아침 일일보고를 받을 정도로 정보를 중요시하게 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1952년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설립이다. 이곳은 CIA처럼 정보요원이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를 얻는 '휴민트' 방식보다 도·감청을 통한 신호정보인 '시긴트'를 분석하고 암호를 해독하는 업무를 위주로 하는 정보기관이다. 9.11테러 이후, NSA가 어떻게 '데이터 괴물'이 되었는지는 시간적 순서에 따라 글의 후반부에서 설명하려 한다.

1998년에 나온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NSA에 대해 다룬다. NSA는 주인공 윌 스미스의 전화, 신발, 시계, 바지, 펜 등에 도청장치를 심어 모든 걸 도청한다. 최종 빌런으로 나오는 NSA 부국장은 다음과 같은 대사로 민간인에 대한 광범위한 도청을 합리화한다.

"국가안보국은 전시를 위한 조직이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위험해서 없어진 지 오래됐다. 우리가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생각하는가?"
 

1970년대 : 세상을 뒤흔든 '도청 게이트'

2차 대전이 끝나고 냉전시기였던 1970년대는 국가안보와 방첩이라는 명목으로 광범위한 도청이 이뤄졌다.

1970년대 미국의 '워터게이트'와 '코리아게이트' 사건을 통해 도청의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1976년작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과 2020년 개봉된 한국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각각 이 사건들을 그린다.

1976년작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1972년 6월 17일 토요일 아침 9시, 워싱턴포스트에 입사한 지 9개월 밖에 안 된 기자 밥 우드워드는 사회부장으로부터 출근 지시를 받는다. 워터게이트라는 이름의 오피스텔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서 5명이 체포됐으니 취재하라는 것이다.

이들은 카메라와 도청 장치를 가진 채 민주당 사무실에 불법 침입했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처음에는 단순한 사건사고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한 밥 우드워드는 취재를 하면서 CIA와 백악관이 관계됐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5명의 좀도둑들이 가진 수첩에 적힌 이름은 하워드 헌트였다. 취재를 해보니 도청을 지시한 헌트는 백악관 보좌관이자 닉슨 대통령 재선위원회의 실무자였던 사실이 드러난다. 백악관 관계자와 공화당이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민주당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 했다는 계획은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닉슨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지만 워터게이트 논란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미국 대통령 최초로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상대 정당, 민간인에 대한 불법도청은 1970년대 미국 사회에 충격을 안겨줬다.

스프 뉴스쉽 영화 <남산의 부장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닉슨이 물러난 뒤 미국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기를 배경으로 한다. 도청 건으로 닉슨이 떠나고, 부통령이었던 포드가 대통령직을 이어받는다. 하지만 공화당은 도청사건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가 임박한 상황이었다.

닉슨 공화당에 대한 반발로 도덕과 인권을 앞세운 지미 카터가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카터는 평화를 주장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었던 한국은 재미 사업가를 통해 미국 의회에 주한미군 철수를 철회시키려는 로비를 벌였다. 재미 사업가의 배후에 청와대와 중앙정보부가 있었다는 것이 폭로된 사건이 '코리안게이트'다.

워터게이트 폭로로 닉슨을 내려오게 만든 워싱턴포스트가 이번에도 코리아게이트를 첫 보도한다. 기자 업계용어로 설명하면 코리아게이트라는 '물을 먹은' 뉴욕타임스는 '반까이'(만회) 기사로 몇 개월 뒤 미국 정보기관의 '청와대 도청 의혹'을 보도한다. 최근 미국 정보기관의 국가안보실 도청 논란과 겹쳐 보이는 부분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1970년대 후반 코리아게이트를 중심 소재로 하고 있다. 영화에서 박정희 대통령 역할을 맡은 배우 이성민은 "대한민국을 얼마나 졸로 봤으면 대통령 책상에 도청을 달아?"라며 미국 정보기관의 행태에 불 같이 화를 낸다.

CIA의 청와대 도청을 알아차리지 못해 코너에 몰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역할을 맡은 건 배우 이병헌이다. 2인자 자리를 놓고 김재규와 싸우는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역을 이희준이 맡았다. 미국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비위를 폭로한 전직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역은 곽도원이 맡아 코리안게이트를 둘러싼 청와대 내부의 역학관계를 잘 보여준다.

영화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차지철과 김재규를 서로 도청하고 감시하도록 시킨다. 각하는 자신을 위협할 만한 2인자가 크는 걸 내버려 두지 않는다. 영화의 절정은 이런 긴장관계 속에서 김재규 역할을 맡은 이병헌의 도청 장면이다.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이 술을 마시는 대화내용을 옆방에서 도청한다. "임자 옆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도청을 통해 본인을 죽이라는 지시를 들어버린 김재규는 결단을 내리고, 10.26 사건으로 이어진다는 게 영화의 줄거리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1976년 코리안게이트 폭로 이후 발표된 외무부장관의 성명을 살펴보자. 성명에는 당시 박정희 청와대가 미국의 도청 의혹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한미현안 외무부장관 성명> - 1976.12.28. 동아일보 (출처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미국정보기관에 의한 청와대 도청 운운의 문제에 관하여는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의 주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행위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로서는 이 문제를 중요시하고 미국 정부 당국의 공개해명을 강력히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미국 정부는 미국정보기관의 활동과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가부간 논평하지 않는다는 오랜 관례 때문에 공개적으로 해명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나 수차에 걸쳐 미국 정부고위층이 외교경로를 통하여 우리가 수긍할 수 있도록 부인하였기 때문에 청와대 도청 운운 보도는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예상외의 사건으로 인하여 한미 양국 간에 일시적으로 물의가 야기된 것은 매우 유감된 일이나 미국정부는 이러한 물의에도 불구하고 한미 간에 전통적으로 존재하는 기본 우호유대와 미국의 대한 방위공약에 변함이 없음을 재확인하였으며 앞으로 한국 정부와 외교 군사 경제 및 문화 등 제반분야에 있어서 계속 긴밀하고 건설적인 협조관계를 강화해 나갈 것을 다짐한 바 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대외적으로 코너에 몰린 상황이었다. 유력한 미국 대통령 후보가 주한미군 철수를 들고 나왔고, 이를 막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재미 사업가를 통해 100명 가까운 미국 국회의원에게 매년 100만 달러의 현금을 전달했다는 의혹이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박정희 정부는 성명을 통해 미국 정보기관의 청와대 도청 의혹에 대해서 불쾌감을 드러내며 '주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행위'라고 미국의 공개해명을 강력히 요구한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한미 동맹을 위해 끝까지 문제 제기를 이어가진 않은 것으로 보이나 최소한의 강력한 항의 표시를 했다.
 

2000년대 : 미국 정보기관은 '모든 걸 듣고 있다'

냉전이 끝나고 미국 정보기관의 활동과 불법도청의 필요성은 잦아드는 듯했지만, 21세기에 새로운 사건이 터진다. 2001년 9월 11일, 테러리스트에 납치된 항공기가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충돌하면서 미국은 충격에 빠진다.

3천 명이 넘는 국민이 숨진 테러사건 이후 미국사회는 정보기관의 광범위한 도청과 정보활동에 토를 달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주도로 애국법(USA PATRIOT ACT)이 만들어졌고, 이 법은 테러 등 국가안보를 위해 법원의 영장 없이 통신기록을 무차별적으로 수집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영화 <스노든>
9.11과 애국법 이후 미 정보기관의 공공연한 도청과 그에 대한 시민사회의 묵인이 이어졌다. 침묵의 얼음을 깨뜨린 건 내부고발자들이었다. 에드워드 스노든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동명의 영화 <스노든>으로 영화화됐다.

톱배우인 조셉 고든 레빗(에드워드 스노든 역)이 현안을 담은 민감한 배역을 맡는 선택을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조셉 고든 레빗의 경우 스노든 배역을 선택한 이유를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라크전에 참전하려던 스노든이 9년 만에 NSA의 내부고발자가 됐다"면서 "한 인물이 이렇게 변해가는 과정은 흥미로운 주제였고, 배우로서 이것이 궁금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NSA가 미국 시민의 정보를 수집해 놓고 그런 적이 없다고 거짓말했다"며 정면으로 미국 정보기관의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에드워드 스노든은 젊은 나이에 군인이 돼 일본 미군기지와 이라크 전쟁에 투입됐다. 군대를 전역한 뒤 2006년엔 CIA에 채용됐다. 그는 3년 뒤 CIA를 나와 사기업 직원으로서 NSA의 데이터 시스템 서비스 기술자로 일했다. 20만 달러의 높은 연봉을 받으며 NSA 데이터를 관리하던 스노든은 비밀 정보자료를 넣은 노트북 4개를 들고 홍콩으로 떠났다. 홍콩에 도착한 2013년 5월 20일 당시 그는 29세였다.

스노든이 내부자료를 유출해 폭로한 PRISM 프로젝트는 미국 NSA가 인터넷 공간에서 개인정보를 광범위하게 들여다보고 수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대형 통신회사 AT&T가 NSA에 개인 통화기록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 미국 정보기관이 애플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와 페이스북 등 미국에 본사를 둔 빅테크 기업들에 데이터를 퍼올 수 있는 비밀스러운 뒷문('백도어)'을 만들어놓았다는 의혹도 나왔다.

영국 언론 <가디언>이 이러한 내용을 폭로한 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오바마는 해명을 내놓았다. NSA의 해당 활동이 테러리즘 방어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설명이었다. 다만 시민들의 사생활에 대한 정찰은 가능하면 최소한으로 제한했다고 덧붙였다.

스노든의 폭로를 계기로 미국 NSA가 메르켈 독일 총리 등 동맹국을 포함해 최소 35개국 정상을 도청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NSA가 인터넷 공간에서 시민들의 정보를 사찰하고 동맹국 정상까지 불법도청했다는 논란이 일었지만, 크게 바뀐 건 없었다. 미국 정부는 NSA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거나 약화시키는 조치를 하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런 행동을 중요한 예외적 경우로 한정할 것이라고만 약속했다.

애플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와 페이스북 등 인터넷 운영자들은 대부분 미국에 본사와 서버를 두고 있다. 때문에 미국의 정보기관은 데이터에 접근할 권한을 이들에게 강제하면서, 다른 국가의 정보기관에 비해 비교할 수 없는 광범위한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게 됐다. 군대나 고위관료의 전화, 대화를 대상으로 시작된 도청이 이제는 만인에 대한 인터넷 사용정보 수집으로 진화한 것이다.

잭 테세이라 일병
미국 안에서도 이런 상황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항의하는 시민단체나 언론, 내부고발자들이 존재하지만 국가안보와 애국이라는 이름 아래 크게 바뀌진 않고 있다. 폭로를 한 스노든은 망명 신청한 여러 국가에서 거절당한 뒤 러시아로 망명했다.

폭로 이후에도 미국 정보기관은 제대로 개혁되지 않고, 여전히 도청 업무를 진행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미국 기밀문건 유출로 체포된 병사 잭 테세이라는 최소 15년형 이상의 높은 처벌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문건에 담겨 세상에 공개된 미국 정보기관의 불법도청 행태는 변화가 있을지 여전히 의문스럽다.
 

2023년 : 우리는 '도청 의혹'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국가안보를 위한 '과학화, 정보전'을 명목으로 정보기관의 도청은 시작됐다. 전쟁 당시 적국을 대상으로 개발됐지만 이제는 '세계의 경찰' 미국이 동맹국 기밀까지 빼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개인에 대한 정보수집은 크게 늘고 있다. 최근에는 테슬라 자율주행차 카메라에 달린 정보 수집이 논란이 된 바 있고, 중국에 본사를 둔 소셜미디어 틱톡의 개인정보 수집 논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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