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월드리포트] '악의적 도청' 없었다? 무슨 뜻일까

미국의 기밀 추정 문건 유출 사건을 놓고 연일 시끄러운 가운데 문건에 도청 피해 당사국으로 등장하는 우리나라에서도 공식 입장이 발표됐습니다. 대통령실은 지난 11일 "공개된 정보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데 대해서 한미의 평가가 일치한다"고 밝혔습니다. 한미 양국의 국방장관이 통화를 했는데 문건 내용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데 양국 견해가 일치했다는 겁니다.

미국 측 발표도 비슷했습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조정관은 현지 시간 10일 브리핑에서 문건 내용 일부가 변경된 걸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유출된 문건의 형식이 고위급에 제공되는 보고서와 유사하다는 점을 인정하며 문건 자체는 정부 문건이 맞을 수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커비 조정관은 "우리는 이 사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종류의 문건들이 온라인에 공개됐다는 데 대해서는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정보기관 위조 문건

대통령실 '문건 내용 사실과 달라'

한미 양국의 발표를 정리해보자면 SNS에 유출된 100쪽 분량의 문건은 미 정보당국이 작성한 문서가 맞는 걸로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상당 부분 위조된 걸로 보인다는 겁니다. 현지 언론에서는 조작의 근거로 일부 내용이 다른 여러 버전의 문건이 존재한다는 점, 미국 국방부의 공개 데이터와 달리 러시아군 사상자 수가 훨씬 많거나 적게 나타난다는 점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 정황상 유출과 조작의 배후로 러시아가 지목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관련 내용도 조작됐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미국이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의 대화 내용을 도청(일부 기사에서 도∙감청으로 쓰고 있지만 감청은 수사기관이 영장을 받아 합법적으로 실시하는 것인 만큼 외국 정보기관이 했다면 무조건 '도청'(盜聽)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한 걸로 기술된 문건 내용에 대해 대통령실은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다는, 즉 조작된 내용이라는 취지로 답변했습니다.

위조된 내용이라니 다행이기는 한데, 다만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문건에 따르면 김 전 실장과 이 전 비서관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쓰일 포탄을 미국에 제공할지 논의했습니다. 이 전 비서관이 살상무기는 지원하지 않는다는 지금까지의 정책을 변경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공식 천명하는 방안을 거론했고 이에 김 전 실장이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그렇게 할 경우 회담과 무기 지원을 거래했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이에 김 전 실장은 폴란드에 포탄을 수출하고, 폴란드가 이를 다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우회 지원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고 문건은 적고 있습니다.

기밀문건에 담긴 한국산 포탄 수송 계획

대통령실은 문건 내용이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정확히 어떤 내용이 어떻게 맞지 않는다는 건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폴란드를 통한 우회 수출을 논의한 적 없다는 건지, 아니면 무기 수출 천명을 거론한 적 없다는 건지 불분명합니다. 특히나 대통령실 관계자는 사태 초기 우크라이나 우회 무기 지원설과 관련한 질문에 '그런 말이 오간 적 없다'며 부인하기보다 "확정된 사안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문건에 언급된 우크라이나 무기 우회 지원 방안이 '사실이 아니다'가 아니라 '확정된 사안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겁니다.

현지 시간 11일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워싱턴을 찾았습니다. 이달 말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의 의제 조율차 출장을 온 것이었지만 질문은 이번 기밀 문건 유출과 도청 의혹에 집중됐습니다. 내가 궁금한 건 남도 궁금한 터라 상당수 문건이 위조됐다는 정부 설명에 대해 '김성한 전 실장과 이문희 전 비서관의 대화 내용이 조작'됐다는 말이냐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김 차장은 "그 얘기는 구체적으로 묻지 마시라. 어제 제가 한마디로 했으니까 거기에 모든 것이 다 함축돼 있다고 본다"라며 애매한 답만 내놨습니다.
 

"악의를 갖고 했다는 정황은 발견되지 않아"…했다는 건가, 안 했다는 건가?

문건 위조 여부도 중요하지만 국민적 관심이 더 큰 부분은 미국이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맹국을 도청했는지 여부입니다. 이와 관련해 대통령실은 공식 입장문을 내고 "(미국 정보기관의) 용산 대통령실 도·감청 의혹은 터무니없는 거짓 의혹임을 명백히 밝힌다"고 강력 부인했습니다. "용산 대통령실은 군사시설로, 과거 청와대보다 훨씬 강화된 도·감청 방지 시스템을 구축, 운용 중"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실, 안보실 등이 산재해 있던 청와대 시절과 달리, 현재는 통합 보안시스템과 전담 인력을 통해 '철통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데, 설명이 일견 타당해 보입니다. 용산 대통령실은 과거 국방부 청사로, 보안 등급에서 절대 뒤쳐지지 않을 뿐 아니라 이전 과정에서 추가 보강이 있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보안시스템이 높다고 도청에 100% 안전하다고 할 순 없습니다. 그런 보안을 뚫는 게 첩보전의 핵심이란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김태효 차장도 입국 인터뷰에서 동맹국 도청에 대한 국민적 의혹을 묻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김 차장은 "현재 이 문제는 많은 부분 제3자가 개입돼 있기 때문에 동맹국인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악의를 갖고 했다는 정황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도청 정황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취지의 답변으로 보였지만 그냥 도청 정황이 없다고 하면 될 걸 굳이 '악의'라는 단어를 붙인 걸까 하는 의문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기자단 질문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같은 주제로 물어보시려면 저는 떠나겠다"는 김 차장의 말에 관련 문답이 끊긴 탓입니다. 김 차장은 계속 질문하는 한 기자에게 다른 주제를 물으라며 중간에 질문을 끊기도 했습니다.

우리 정부는 정보 동맹인 양국이 이번 일을 계기로 좀 더 신뢰를 굳건히 하고 함께 협력하는 시스템을 강화할 생각이라고 밝혔습니다. 우리가 미국의 도청 의혹을 더 따질 생각은 없다는 말로 해석됩니다. 미국 정부가 조사 진행 중이라니 그거라도 기다려봐야 할 것 같은데 조사 대상자만 수십만 명이라니 이 또한 언제 끝날지 모를 일입니다. 스노든 폭로 때 오마바 대통령이 내놓았던 정보 수집 관련 개혁안을, 당시 부통령이었던 바이든 대통령 손으로 또 바꿀지, 아니면 별일 없었다고 그냥 넘길지 지켜볼 일입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