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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매크로 부정 · 꼼수 판치는 테니스 코트 예약

지난 4일 오후 서울 강서구 서남물재생센터 테니스장을 찾았다. 하드 코트 7면, 클레이 코트 7면 등 총 14면 코트 가운데 수리 중인 곳을 뺀 6면에서 시민들이 한창 공을 주고받고 있었다. 시간당 이용료가 단돈 5,000원에 불과해 인기인데 예약은 쉽지 않다. 프리랜서 친구와 테니스를 치던 김동현 씨(서울 화곡동)는 "볕이 뜨거운 낮보다는 아무래도 해 지고 밤에 치는 게 좋지만 저녁엔 코트 예약이 안 된다"고 말했다. "알람 맞춰놓고 아침 6시에 예약 사이트가 열리자마자 접속해도 밤 8시~10시 시간대는 예약이 이미 다 차 있다"는 것이다.
 

수강 신청 같은 코트 예약…매크로는 공공연한 비밀

코로나 이후 테니스 인구가 늘면서 코트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특히 많아야 2만 원 안팎 이용료에 시설도 괜찮은 공공 테니스장 예약엔 매크로 같은 자동 예약 프로그램과 대행업체까지 동원되는 실정이다. 실제로 인터넷상에선 테니스장뿐 아니라 골프장 등 각종 시설 온라인 예약을 돕는다는 매크로 제작업자들의 광고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테니스에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10만 명 넘게 모인 포털 온라인 카페에선 "매크로 예약 때문에 코트 예약이 너무 어렵다"는 하소연이 하루가 멀게 쏟아지고 있다.

공공 테니스 코트 예약이 얼마나 어려운지 기자가 직접 서울 양천구 시설관리공단이 운영하는 목동테니스장 예약에 도전해봤다. 하드 코트만 24면에 달하고 주차장이 넓어 테니스 동호인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매일 오전 9시(구민 대상)와 9시 30분(전체 대상) 두 차례에 걸쳐 온라인 선착순으로 일주일 뒤 코트 사용 예약을 받는다. 양천구민 동료와 오전 9시 정각에 예약 사이트에 접속했다. '18~19시'만 빼고 이미 예약이 다 차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나마 조금 전 본 18시 코트조차 새로 고침을 누른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마치 학부 때 인기 강의 수강 신청에 도전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테니스장 예약 완료

코트 예약이 어렵다 보니 매크로 사용은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 오래다. 인터넷 광고를 보고 연락한 한 매크로 제작 업자는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은 보안이 세 35만 원을 받지만 만드는 게 어려운 건 아니며, 실제 지금 사용하는 분이 있는데 잘 된다고 한다"고 말했다. "비용을 더 준다면 이틀 만에 만들어줄 수 있다"는 제작자도 있었다. 예약 사이트 개방 시간에 맞춰 매일 아침 졸린 눈 비비며 손가락을 풀던 사람들만 억울할 법하다.
 

1초 만에 예약 수두룩…매크로 실체 확인

기자는 매크로 사용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 국회 이용선 의원실을 통해 석 달 치 목동테니스장 예약 내역을 입수해 살펴봤다. 자료엔 사용자별로 어떤 코트를 언제 이용하기로 예약했는지, '예약에 성공한 시각'까지도 분초 단위로 나와 있다. 결과는 놀라웠다. 직장인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평일 저녁과 주말 오후를 특정 사용자들이 반복해 차지하고 있었다. 이 경우 예약에 성공한 시간은 "09시 00분 01초" "09시 30분 01초" 등 사이트 개방 후 단 1초 만이거나, 길어야 10초 안팎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매크로 사용을 의심하기에 충분한 정황이다.

서울 양천구 시설관리공단 관계자는 "도저히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간에 예약하는 사용자가 많아 부정하게 매크로를 이용한 예약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자동입력 방지 문자 같은 대비책을 도입해도 그때뿐"이라고 말했다. 매크로 사용을 단속하라는 시민 불만도 많았고, 실제 부정 예약이 많은 것도 알지만 대응을 못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테니스장 예약 관련 의원실 자료

석 달간 약 100회 예약…매크로 넘어 꼼수까지

관리 주체가 손 놓은 사이 예약 사이트 자체의 허점을 파고든 꼼수 예약까지 등장했다. 석 달간 목동 테니스장에서 평일 19~22시 황금시간을 약 100차례 예약한 김 모 씨가 장본인이다. 사실상 날마다 성공한 셈이다. 김 씨의 예약 성공은 대부분 1~2초 만이었는데 심지어 '정각'에 이뤄진 경우도 적지 않다.

기자에게 털어놓은 김 씨의 예약 방식은 'URL 직접 접속'이다. 예약 사이트 첫 화면에서부터 여러 차례 클릭을 거쳐야 넘어가는 최종 예약 페이지가, 단지 날짜만 바꾼 URL 주소만 입력해도 바로 들어가진다는 것이다. 구청에서 관리하는 공공 사이트가 이토록 허술할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인데, "이런 방식을 코트 관리사무소에 얘기하고 시연도 해줬지만 '문제없다'고 들었다"는 게 김 씨 설명이다. 김 씨는 이렇게 독차지한 황금시간에 참가비를 받고 회원을 모집해 테니스 클럽까지 운영 중이다.
 

처벌도 쉽지 않아…'복불복' 추첨제가 답?

문제는 선착순 달리기의 출발선을 앞당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매크로 활용을 법으로 단죄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법률사무소 휴먼 손준호 변호사는 "예약 업무 전체의 공정성을 훼손한 측면에서 업무방해죄 적용을 검토해볼 수 있겠지만, 당사자가 자기 편의를 위해서 단순 사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처벌하긴 쉽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예약 사이트 자체를 해킹하거나 서버에 장애를 초래하지 않는 이상 처벌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테니스장

테니스 동호인들은 매크로 논란을 잠재우려면 운에 맡기는 추첨제가 답이라고 말한다. 출발선이 다른 건 못 받아들이겠으니 운에 맡겨버리자는 자조 섞인 목소리다. 고른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다중 예약자나 일정 횟수 이상 누적 사용한 이는 예약에서 배제해야 한다고까지 말하는 동호인도 있다.

최근 국회는 매크로를 통한 티켓 구매 후 재판매한 사람을 최대 1천만 원의 과태료로 처벌할 수 있는 공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지만 공연 예술에 국한돼 테니스 코트 같은 시설 예약과 재판매엔 해당되지 않는다. 이에 앞서 경찰은 지난 2019년 매크로를 이용한 티켓 판매 행위를 현행 법체계 안에서 처벌할 수 있다며 단속을 공언한 바 있다. 법조계에선 시설 예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법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조용의 변호사는 "공공시설은 주민 복리 증진 등에 이바지하려는 목적에서 설치된 것인 만큼 공공시설 관리 업무의 공정성을 방해하는 행위에 대하여 적극적인 단속과 처벌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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