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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주름이야말로 꽃을 닮았다 - 인생의 봄에는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북적북적]

노년의 주름이야말로 꽃을 닮았다 - 인생의 봄에는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75 : 노년의 주름이야말로 꽃을 닮았다 - 인생의 봄에는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어휴, 세상아. 꼬리를 흔들어대라. 나는 명랑하고 행복하게 살련다. 

봄이 이르게 만개했습니다. 온 천지가 다시 ‘우두두두’ 깨어나는 약동의 에너지로 가득합니다. 바로 그 새로운 시작의 에너지 때문인지, 사계절 중에서도 유독 봄이 우리 인생이 찰나보다 유한하다는 것, 그래서 찰나만이 영원처럼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아흔다섯까지 살면 슬픈 기억도 생기고 삶의 추잡함도 알게 되기 마련이에요. 하지만 그런 걸 그리고 싶진 않아요. 나는 예쁜 그림을 그립니다. 예쁘지 않은 것을 그릴 때면 조금씩 다듬어주고요. 그림을 보고 사람들의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뭐 하러 그리겠어요? 

오늘의 책, [인생의 봄에는 할 일이 참 많습니다]는 지난 2월에 수오서재에서 출간됐습니다.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라는 미국 할머니의 인터뷰와 편지, 구술 기록을 모은 책입니다.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는 1860년에 태어나서 101세까지 살다 갔습니다. 미국 동부의 한 농장에서 태어나서 평생 열 명의 아이를 낳고, 그중 다섯 명이 태어나자마자 사망하는 것, 장성한 자녀들 중에 2명도 30~40대에 사망하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12살 때부터 남의 집 가정관리사로 일했고, 농부의 아내이자 바느질로 생계를 꾸렸습니다. 7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관절염이 심해져 자수 놓는 일 하던 것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70대 후반의 나이에 이르러서, 돈이 없어 열매즙을 짜서 만든 물감으로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 한 수집가의 눈에 띄어 유명해지고, 80이 넘은 나이에 미 전역에서 ‘셀럽’이 됩니다. 결코 순탄하다고만 할 수 없었던, 고된 노동과 몇몇 아픔들로 점철됐던 평생에서 길어올린 삶에 대한 올곧은 태도와 유머감각이 미국인들의 가슴을 두드린 겁니다. ‘인생의 봄에는 할 일이 참 많습니다’는 이 책의 제목 역시, 모지스 할머니가 84세에 그린, ‘봄에(In the Springtime)’ 라는 제목의 자기 작품에 대해 설명하면서 했던 말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전에도 우리나라에 모지스 할머니의 어록들이 출판되어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동네를 휩쓴 태풍이) 나는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믿음이 있었거든요. 당신이 여길 떠날 때 저 문으로 걸어나가겠지요? 인생은 그뿐이에요. 앞날은 예정되어 있어요. 어쩔 수 없답니다. 그냥 믿음을 가져보는 거지요. 믿음을 가지면 걱정으로 세월을 허비하지 않을 거예요.” 
 
“할머니는 계속 똑 같은 그림만 그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세상에 똑 같은 강은 있을 수 없고 똑 같은 나무, 똑 같은 하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똑 같은 할머니가 없듯이 말이지요.” 
 
“길고도 고된 삶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보다 더 잘 살 수 있었을지 모르겠어요. 아마 그러진 못했을 겁니다. (99세에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한 말.) 

‘북적북적’에서 [아흔 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 책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97세였던 이옥남 할머니의 일기모음입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셨고, 남편이 돌아간 노년에 비로소 한글을 배워 쓰기 시작했던 일기들을 엮은 것인데, 손자가 출판했습니다. 지금까지 [북적북적]에서 읽었던 책 중에 가장 마음 깊이 남아있는 책 중 하납니다. 그 시절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던 우리 할머니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비슷비슷하게 닥쳤던 시련들로 점철됐던 삶, 외롭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을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자긍심을 갖고 담담히 노동하며 이어가던 할머니의 일기가 지닌 문학성에 솔직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노년에 이르러 비로소 배운 글자로 써내려간, 맞춤법이 틀린 글자가 맞는 글자보다 더 많은 듯한 일기였지만, 상처가 많았던 긴 시간을 버티고 꾸려온 인간의 품위가 경이로울 만큼 진득하게 배어 나오는 글들이었습니다. 가난, 무지, 학대 가운데서도 이토록 피어나는 사람의 영혼이란 얼마나 신비한 것인가에 대해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새삼 되새겨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옥남 할머니처럼 특별하고 품위 있었던 우리 할머니에게 이런 손자가 돼드리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새삼 느끼게 해준 책이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미국 할머니,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가 남긴 말들을 읽으며, 오랜만에 이옥남 할머니, 그리고 우리 할머니를 생각했습니다.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100년을 살아낸, ‘그래도’ 전반적으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평탄하고 풍요로웠던 미국 시골의 할머니 화가가 남긴 말들은 이옥남 할머니의 일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대목들이 많긴 합니다. 역시 ‘북적북적’에서 읽었던 [백년을 살아보니]의 저자, 이옥남 할머니와 같은 시대의 한국을 살았지만 남성 지식인으로서 100년을 넘기고 있는 김형석 교수와도 또 다릅니다. 그러나 100년을 산 이 분들 모두 노년이 얼마나 찬란한 봄이 될 수 있는지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만은 공통적이로구나, 생각했습니다.  
 
“일흔일곱 살이 되기 전에는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어요. 그 나이가 되어서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요.” 
 
“사람이 늘 무언가에 몰두하고 마음과 손을 부지런히 놀리면 불만이 생길 겨를도 없을 겁니다. 일흔일곱에 은퇴할 수야 없잖아요.” 
 
“삶을 통틀어 무엇이 가장 자랑스럽냐고요? 몇몇 사람을 도운 거요.” 
 
“글쎄요, 사람들이 나랑 같이 다니는 게 자랑스럽다던데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해요. 전에는 나랑 같이 다니는 게 안 자랑스러웠냐고요. 사람들이 날 두고 난리굿을 쳐도 그러라고 내버려둡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사람이거든요.” 

모지스 할머니에 대해 ‘모지스 할머니의 작품들을 ‘향수에 젖은’ 그림들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만나본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만나본 중 손에 꼽을 만큼 감상적이지 않은 분이었다’고 증언하는 내용이 이 책 속에 나옵니다. 모지스 할머니는 이옥남 할머니와 달리 엄청나게 유명해졌습니다. “나보다 어린 사람이 누렸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말할 만큼 말년에 큰 부를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할머니 한 명을 세상이 입맛에 맞게 끄집어내 아이콘처럼 추켜올렸다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겼을 것 같다는 짐작이 벌써 들기 시작합니다. 이 책 안에도, 그런 식으로, 이른바 식자들 일부가 할머니를 조롱했던 당시 분위기가 짐작되는 일화들이 실려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무슨 짓을 했든, 그것은 세상이 한 짓입니다. 모지스 할머니는 자기 인생 100년을 자기 자신에게 당당하게 제대로 살아낸 분이었고, 진지한 화가였습니다.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당신,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은 팔십 노인 아냐’ 식으로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모지스 할머니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뿐, 그 이상의 어떤 말도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리고 결국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그 같은 질시가 아니라, 여전히 미국이 사랑하는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들과 그녀가 남긴 말들입니다. (이 책을 엮어낸 류승경 번역가도 “객관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남지 않은 마음으로” 할머니의 삶과 작품이 남겨준 격려에 깊이 매료돼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모지스 할머니는 예술가로서,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시골의 아름다움’이 담긴, 일종의 파노라마 스타일 풍경화라는 자기만의 스타일도 만들었습니다. 콜 포터는 연주여행을 떠날 때마다 호텔방에 걸어두고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을 아예 가지고 다녔고, 유수의 미술관들과 백악관에 여전히 할머니의 작품들이 걸려 있습니다. 2006년에는 무려 131억 원에 한 작품이 거래되기도 합니다.  
100년의 삶을 이렇게 스스로에게 당당하게 꾸려간 모든 사람들, 짧든 길든 자신의 인생을 이토록 열심을 다해 떳떳하게 만들어간 모든 사람들은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그렇게 느꼈다니 마음이 아프네요. 이곳은 자유의 나라이고 사람들은 저 할 말을 할 거예요. 그러라고 하세요. 우리가 도리에 맞게 행동하면 그들은 우릴 해칠 수 없어요. 원래 남보다 조금이라도 앞서가는 사람에게는 질투가 따르기 마련이잖아요. 언제나 그래왔고, 언제나 그럴 거예요. 그러니 신경 끄는 게 상책이에요. 우리는 이런 일에 초연해야지요. 나는 괜찮으니, 내 일로 걱정하지 말아줘요. 내 앞가림은 지난 90년 동안 잘해왔고 앞으로 90년은 더 끄떡없습니다.” (모지스 할머니 그림의 상업성에 대해 일각에서 비판이 일자, 상처 받을까 봐 걱정하는 편지를 보낸 오토 칼리에(아트 딜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오랫동안 진열돼 손때 탄 그림들을 그런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지 말아달라고 당부하는 것뿐이에요. 가격을 내리든지, 아예 팔지 말든지 해야 해요.” 

꽃은 예쁘다니까, 보통은 꽃을 젊은 미인에 비유하니까,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경우 꽃의 아름다움을 진심으로 감상하고 감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오히려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난 다음입니다. ‘꽃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 노인’이라고 말하기도 하잖아요.  

햇볕이 따사롭고 온화했던 이번주의 어느 오후, 엄마와 함께 국립중앙박물관 산책에 나섰습니다. 박물관 산책길에 형형색색 핀 꽃들 사진을 열심히 찍는 엄마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일흔이 된 우리 엄마의 주름이야말로 꽃잎 표면의 그 자잘한 결들을 닮았구나. 꽃과 봄을 알아보는 깊은 눈과 주름을 갖게 되는, 최선을 다해 살아온 노년에 오히려 진짜 꽃을 담은 아름다움이 있구나. 

내 노년도 꽃이 될 수 있도록, 진짜 꽃들을, 봄을 제대로 알아보면서 오늘을 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북적북적 가족 여러분들 덕분에 이렇게 함께 책 읽는 날은 꼭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수오서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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