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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주진우 법률비서관의 딜레마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 그리고 낙하산과 알박기

[취재파일] 주진우 법률비서관의 딜레마
아버지는 공기업에 다녔다. 정권이 바뀌면 사장도 따라 바뀐다고 했다. 군인이니 교수니 하는 사람들이 철마다 점령군처럼 내려왔다. 어린 마음에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회사를 오래 다닌 사람이 사장도 하고 임원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세상이 그렇지 않다며 웃었다.

몇 년 전 야당 출입기자를 하다 여당 출입기자가 됐다. 정권이 바뀌자 맨날 보던 사람들이 어디 이사장도 되고 감사도 되고 협회장도 됐다. 집권하면 나눠줄 수 있는 자리가 그토록 많은 줄 미처 몰랐다. 이래서 그렇게 악착같이 정권을 잡으려고 하는구나 싶었다. 이른바 '낙하산 인사'는 단순한 관행 수준을 넘어 정치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김은경 전 장관 (사진=연합뉴스)
▲ 김은경 전 환경부장관

이런 관행에 경종을 울린 게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이다. 문재인 정부 초기 환경부가 산하 공공기관 임원을 물갈이하기 위해 위법을 저질렀단 게 사건의 골자다. 3년에 걸친 수사와 재판 끝에 김은경 당시 환경부장관에게 직권남용 등 혐의로 징역 2년의 실형이 최종 확정됐다. 김 전 장관 측은 이전 정부에서도 이뤄진 관행이라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이전 정부에서도 같은 행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는 명백히 법령에 위반되고 그 폐해도 매우 심하여 타파되어야 할 불법적인 관행"이라고 못 박았다. 언론은 정권마다 반복되던 낙하산 인사 관행에 쐐기를 박은 기념비적인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적어도 다음 정권에서는 비슷한 일이 반복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주진우 법률비서관 (사진=연합뉴스)
▲ 주진우 법률비서관

이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를 처음 시작했던 사람이 주진우 당시 서울동부지검 형사6부장이다. 청와대고 환경부고 할 것 없이 전방위 수사가 이어졌다. 김 전 장관과 청와대 인사비서관이 재판에 넘겨졌다. 아직 정권이 서슬 퍼럴 무렵이었다. 주진우 부장검사는 다음 검찰 인사에서 대구지검 안동지청장으로 발령 났다. 좌천이었다. 주 부장검사는 "정도를 걷고 원칙에 충실하면 진정성을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과 자신의 공직관이 흔들렸다며 검찰을 떠났다. 정권이 바뀌었고 주 부장검사는 대통령실 법률비서관이 됐다. 옛날 민정수석 역할이니 대통령의 핵심 참모다.

역사는 얄궂다고 했나. 지금 대통령실이 가장 고민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공공기관 인사 문제라고 한다. 정권을 잡았으니 자리를 나눠줘야 하는데 통 쉽지가 않아서다. 올해 1월 기준 350개 공공기관 기관장과 임원 3,080명 중 문재인 정부 당시 임명된 인사가 2,655명이라고 한다. 전체의 86%에 달하는 수치다. 알박기 인사 논란이 있지만 예전처럼 나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환경부 블랙리스트'라는 선례 때문이다. 대통령의 핵심 참모로 꼽히는 주진우 비서관이 이런 고민을 공유하지 않을 리 없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본인이 한 수사가 이정표가 돼 본인이 몸담은 정부의 인사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 (사진=연합뉴스)
▲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그제(30일) 기각됐다. 전 정부에서 임명된 한 위원장은 여권이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과 함께 대표적 '알박기 인사'로 꼽는 인물이다. 한 위원장은 TV조선 재승인 심사과정에서 점수 조작을 지시했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알박기 인사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인사 문제와 무관치 않다고 보는 시각도 분명 존재한다. 전 정부에서도 비슷한 일이 계속 있었기 때문이다. 야당은 '한상혁 찍어내기'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정권의 철학을 공유해야 할 방통위원장을 자신들 쪽 사람으로 앉히기 위해 임기가 남은 한 위원장을 표적 수사한다는 논리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와 판결은 의미 있는 역사의 진전이었다. 불법적인 관행에 경종을 울리고 법적 경계를 분명하게 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늘 복잡하다. 여야가 알박기 인사 방지법을 논의하자고 나섰지만 몇 달째 평행선만 달린다. 서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입법 논의가 표류하는 가운데 마주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방통위원장 수사다. 알박기와 낙하산 논란 사이 어딘가에서 여야 정치인들과 주진우 법률비서관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알박기와 낙하산이라는 관행을, 우리 정치는 끊어낼 수 있을까.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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