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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운빨' 믿고 사업, 10년 만에 재벌 됐지만…IMF 일으킨 주범 정태수 회장

꼬꼬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30일 방송된 '흙과 철의 사나이-정 회장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웹툰 작가 주호민, 그룹 에이핑크 멤버 보미, 개그맨 김용명이 출연했습니다. (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부자'가 보이는 관상

1960년대 서울, 종로5가 뒷골목이야. 오전 9시만 되면 사람들이 줄을 쫙 서는 곳이 있어. 오래된 여관인데, 사람들이 늘어선 긴 줄이 여관의 정문을 지나 안채로 이어져. 그 안에는 영롱한 빛깔의 한복을 입은 남자가 책상 앞에 정좌하고 있어. 사람들은 그를 '백 선생'이라 불러. 바로 이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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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의 역술인, 백운학. 특히 관상을 기가 막히게 잘 봐서 명성이 자자했대. 얼굴만 척 보면 탁이야. 백 선생이 관상 쪽에서 정말 레전드로 불리는 일화가 있어. 대한민국을 뒤흔들 어떤 사건을 미리 예견한 적이 있거든.

1961년 4월, 어떤 한 남자가 백 선생을 만나러 왔어. 마루에 이 남자가 앉아 대기 중이었는데, 방문이 잠깐 열린 사이 백 선생이 이 남자를 발견한 거야. 그러더니 백 선생은 다짜고짜 "그거 됩니다! 계획대로 진행해요! 당신이 준비하는 그거, 분명히 된다고!"라고 말했어. 그때 백 선생을 만난 그 손님의 이야기를 들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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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학이 얘기했던가? 이 사람이 큰 소리로 '그거 됩니다!' 하길래 '뭐가 된다는 거야?' 했지. '지금 혁명 준비하고 있잖아요' 하는 거야. '그거 말리는 사람 없고, 탓할 사람 없습니다'라고 백운학이 그랬어."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자 최연소 국무총리를 지낸 JP,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생전 증언이야. 그가 백 선생에게 '혁명은 성공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거야. 그 혁명이 뭐냐, 5·16군사정변이야. 육사 출신 예비역 중령 김종필은 육군 소장 박정희와 함께 군사쿠테타를 준비하고 있었어. 성공하면 권력을 손에 넣겠지만, 실패하면 사형이야. 극소수의 사람들끼리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었는데, 백 선생은 김종필의 얼굴만 보고 그 계획을 알아차린 거야. 그리고 백 선생의 예언대로 이 거사는 성공했어.

이 용한 백 선생에게 문제의 남자가 찾아온 건 1969년 어느 날이었어. 허름한 행색의 40대 남자가 여관에 들어왔어. 바로 47세의 정태수 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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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수 씨는 세무서에서 일하는 말단 공무원이야. 경남 진주의 가난한 시골 마을 출신으로, 초등학교만 겨우 나오고 엄청 힘들게 살았어. 이 무렵 태수 씨는 공무원 박봉에 아들 공부나 제대로 시킬 수 있겠나, 걱정이 많았어. 드디어 태수 씨 차례가 왔고, 백 선생 앞에 인사를 하고 앉았어. 그런데 백 선생이 다짜고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냐"고 물었어. 세무서에 다니는 공무원이라고 대답했더니 백 선생은 "당신 사업할 운이야. 공무원 당장 때려치워"라고 말했어. 그러면서 이렇게 말해.

"당신, 대한민국 첫째 둘째 가는 부자가 될 상이야."

태수 씨는 깜짝 놀랐어. 공무원으로 거의 20년을 살았는데, 갑자기 때려치우고 사업을 하라니까. 사업은 무슨 사업, 태수 씨는 백 선생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세무서를 다녔어. 근데 그날 이후로 백 선생의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아. 태수 씨는 신년 운세를 본다는 핑계로 다시 백 선생을 찾아갔어. 그랬더니 백 선생이 또 일을 그만두래. 백 선생은 3년 동안 찾아온 태수 씨에게 계속 똑같은 말을 했어. 그러자 태수 씨도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해. 이때까지만 해도 태수 씨는 몰랐어. 자신의 엄청난 운명을.

태수 씨는 대한민국 경제사에 길이길이 남을 인물이 돼. 40대 후반 말단 공무원에서 재벌 총수로, 맨주먹의 신화를 쓰는 거야. 이 태수 씨, 혹시 누군지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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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정태수. 그룹 계열사 22개. 매출 5조 4천억 원. 재계 랭킹 14위까지 올랐던 전설의 기업인. 바로,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야. 한보그룹, MZ세대에겐 생소한 기업일 거야.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정태수 회장이 사업을 시작할 과거로 돌아가볼게.

▲ 말단 공무원에서 대기업의 총수가 된 정태수

백 선생은 태수 씨에게 "토(土)의 기운을 태어났어. 흙을 만지면 큰 부자가 될 거야"라며 사업 방향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줬어. 흙이 좋다는 말을 듣고, 정 회장은 돌을 주우러 등산을 다녔어. 첫 번째 사업 아이템이 '광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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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일요일 되면 배낭 메고 산으로 돌아다니고 말이야. 돌멩이 주워가지고 광산 분석하고 말이지."
-정태수 회장, 한보그룹

어디 싸게 나온 광산이 있나 물색하다가 일제 때 폐광된 광산 하나를 단돈 2만 원에 샀어. 당시 태수 씨의 한 달 치 월급 정도였대.

두 번째 사업 아이템은 흙과 관련된 또 다른 사업, 흙으로 가장 큰돈을 벌 수 있는 '부동산'이었어. 태수 씨는 전 재산이었던 9평짜리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친구들을 설득해서 300만 원씩 투자를 받고, 아내가 모은 곗돈 200만 원도 보탰어. 그렇게 1천만 원 조금 넘게 모은 돈으로, 서울 구로동에 땅 1천200평을 샀어. 완전 올인이지. 그리고 다니던 세무서에 사표를 던졌어. 그때 나이가 52세야.

태수 씨는 1천200평 땅에 아파트를 짓기로 했어. 허가가 필요하니 관공서를 찾아간 태수 씨는 지방 세무서 출신이면서 자신이 국세청에서 23년 근무했다고 과장해 말하며 건설 허가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어. 그리고 땅에 180세대 저층 아파트를 지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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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대성공. 아파트는 완판됐어. 은행 대출금, 친구들 투자금을 다 갚고도 수천만 원이 남았어. 그 뒤로도 태수 씨는 아파트를 짓는 족족 완판시켰어. 그중에 1977년 신림동에 지은 '미도아파트'가 초대박이 나. 분양 경쟁률이 무려 10대 1이었대. 정 회장이 미도아파트로 번 돈은, 순이익만 20억 원이야. 지금으로 따지면 180억 원 정도 되는 거야. 퇴사한 지 4년 만에 그 돈을 번 거야.

"공무원 생활하며 아무 돈도 없는 사람이 20억 원을 벌어놨더니 이제 그만하고 싶더라고. '백 선생, 관상 잘 봐줘서 나 돈 벌었는데 그만두고 싶다 사업' 그랬지. 이 사람이 펄쩍 뛰는 거야. '이제 시작인데 뭔 소리냐'고 말이야. '끝까지 해라. 무슨 소리냐, 늙어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고."
-정태수 회장, 한보그룹

정 회장의 '운빨'은 그 이후에도 이어졌어. 앞서 2만 원에 사들였던 광산은, 몰리브덴이란 광물이 나오는 광산이야. 철이랑 합금하면 강도가 아주 세져. 탱크, 미사일 등 군수품 제조에 쓰이는 광물인데, 정 회장이 처음에 광산을 인수할 때만 하더라도 국제적으로 철강 경기가 안 좋아서 몰리브덴 수요가 감소했어. 그런데, 해외 광산 몇 곳이 문을 닫으면서, 이 몰리브덴이 엄청 귀해진 거야. 그리고 70년대 말부터 갑자기 수요가 늘어나. 그래서 가격이 10배가 뛰었어. 단돈 2만 원짜리 폐광산이 황금알을 낳기 시작한 거야. 정 회장의 사업 운은 하늘이 돕고 신이 거드는 거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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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회장의 다음 계획은 여기야. 이 동네, 어디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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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압구정 현대아파트야. 과수원, 논, 밭뿐이었던 이 강남 땅에, 1970년대부터 아파트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돼. 정 회장은 이 강남에 주목했어. 강남 땅에 인생 한 번 걸어보자 했고, 강남 중에서도 정태수 회장이 선택한 곳은 바로 대치동이었어. 백 선생이 말한 강한 흙의 기운을 느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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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 앞에 초가집이 있는 이곳. 바로 '은마아파트'야. 재건축 시장의 뜨거운 감자, 대치동 은마아파트. 강남 집값의 바로미터, 한 채에 수십억씩 하는 곳. 이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세운 사람이,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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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만 해도 대치동은 그리 주목받는 동네가 아니었어. 비만 오면 잠기던 곳이야. 그런데도 정 회장은 거기에 과감하게 투자했어. 정 회장이 사들이 부지가 무려 7만 2천 평. 그 땅에 4천 세대가 넘는 대단지를 지을 원대한 계획을 시작한 거야. 그때 아파트는 12평, 15평 같은 소형 평수의 서민 아파트가 대부분이었어. 은마의 전략은 고급 아파트였어. 30평대 넓은 평수에, 엘리베이터를 갖춘 14층짜리 프리미엄 고층 아파트를 지은 거야.

그런데 뜻밖의 위기가 찾아와. 1978년 8·8 부동산 투기 억제 정책. 정부에서 부동산 투기를 잡겠다고 선포한 거야. '복부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때문이었어. 개발붐과 함께 투기붐도 일어서, 복부인들이 활개를 칠 때였거든. 투기 때문에 부동산 값이 너무 오르니까, 정부는 토지나 부동산 거래를 더 까다롭게 하고 세금도 올리겠다는 거지. 은마아파트도 그 여파로 안 팔렸어. 분양하우스엔 파리만 날렸어. 사업을 너무 크게 벌인 정 회장. 자금난이 시작되더니, 부도 위기까지 오게 됐어.

"은마아파트가 분양되지 않았을 때 자살할 생각도 했어요. 4천500가구를 지어놨는데 모델하우스에는 정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어요. 밤 12시에 한강 다리를 건너면서 빠져 죽으려는 생각도 했지요."
-정태수 회장, 한보그룹

하지만 백 선생이 장담한 정태수 회장의 운명은 이대로 쓰러지지 않았어. '제2차 오일쇼크'라고 들어봈어? 1970년대 말, 중동 산유국의 석유 수출 중단 조치로 인한 유가 폭등과 세계 경제의 혼란 사태. 당연히 우리나라도 피해를 엄청 봤어. 2022년 대한민국 물가 상승률이 5.1%인데, 1980년 물가 상승률은 무려 30%였어. 그런데 이 글로벌 위기가 정태수 회장에겐 절호의 기회가 돼. 물가가 오르고 화폐 가치가 떨어지니까 믿을 건 땅밖에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안전 자산인 부동산으로 눈을 돌린 거야.

그런데 신기한 건, 부동산 중에서도 대치동이 대박이 나. 대치동 하면 '강남 8학군'이 떠오르잖아? 이전에는 강북에 몰려있던 명문고들이 대치동 주변으로 하나둘 이사를 오기 시작했어. 그 덕에 미분양 상태였던 은마아파트가 불티나게 팔리는 거야. 대한민국은 교육열이 오일 쇼크를 이기는 나라였어. 그렇게 한강 다리까지 갔던 정 회장은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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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돈 20억 원 남은 것 가지고 1천350억 원 공사를 했어. 수익금이 1천350억 원이야. 천문학적인 숫자야 그게."
-정태수 회장, 은마아파트 건축

1천350억 원, 지금 가치로 6천900억 원에 달해. 정 회장은 사업 시작 6년 만에 1천억 원대 거부가 된 거야. 이 정도면, 정말 정태수 회장은 하늘이 점지해준 사람 같아. 정 회장은 그 후로도 손대는 것마다 기막히게 운이 따라왔어. 1984년, 부산에 있던 금호철강이란 회사를 인수했는데 그때만 해도 창고에 재고만 쌓인 회사였어. 그냥 공사 부지를 싹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지을까 했는데, 회사를 인수하자마자 국내외 건설 경기가 엄청 좋아졌어. 중국 수출길이 열리고,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 국제 이벤트 특수를 누리며, 애물단지로 쌓여있던 철강 재고 60만 톤이 2개월 만에 싹 팔렸어.

손대는 것마다 승승장구하던 한보. 작은 건설회사였던 한보는, 제철소, 골프장, 대학교까지 거느린 한보그룹으로 변신해. 정 회장은 사업 시작 불과 10년 만에, 말단 공무원에서 대기업의 총수가 된 거야.

▲'역술 경영' 한보, 재계 순위 14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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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이 발표한 83년, 귀속종합소득세 신고 상황에 따르면 작년 돈을 가장 많이 번 사람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으로 16억 2천700만 원 소득을 신고했다.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82년 100위에도 들지 못했다가 이번에 11위에 들었고,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은 26위에서 59위로 처졌으며 이건희는 51위에 머물렀다."
-당시 기사 中

정 회장은 삼성 이병철 회장보다 더 많이 벌었어. 그렇게 재계 순위 100위권 밖에 있던 한보는 단숨에 랭킹 43위로 올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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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은마아파트 상가 건물이야. 여기 옥상에 한문으로 써 있는 '한보'. 놀랍게도, 이 상가 건물이, 한보그룹의 본사야. 정태수 회장은 대성공을 거두고도 그룹 분사를 은마아파트 상가에 두는 걸 고집했대. 돈도 많이 벌었는데 왜? 은마 터가 명당 중에 명당이라고, 돈 벌었다고 으리으리한 사옥 짓고 사무실 옮겼다가는 좋은 기운이 다 빠져나간다고 생각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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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집도 풍수지리를 깐깐하게 따졌대. 방배동에 큰 저택을 지었는데, 본채에는 아들들만 살게 하고 자신은 대문 앞에 문간방에서 생활했대. 그쪽 터가 노인의 기를 보양하는 데 더 좋다는 거야.

이 정도니까, 재계에는 '정 회장이 역술 경영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어. 백 선생 말고도, 정 회장이 신봉하는 역술인이 한 명 더 있었어. 일명 '부산 박도사'라 불린, 박재현이라는 역술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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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서는 '도사'라고 불렸죠. 명리를 연구하면서 '도사' 소리를 들은 분은 우리 선생님밖에 없어요. 정·재계 박재현 선생님을 안 거쳐간 사람이 없어요. 삼성의 이병철 회장님이 올 정도 됐으니까, 다른 데서는 안 왔겠습니까? 박태준 회장(포항제철 창립자)님이 박재현 선생님 보고 '살아있는 토정 선생'이라고 사석에서 말씀하신 적도 있어요. 그냥 본인들이 알고 있는 그런 분들이 실제 다 다녀갔습니다. 한보그룹에도 고문을 하셨죠 선생님이. 약 3년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투자하는 것, 땅 사는 것부터 큰일들이 있잖아요. 그런 거를 물어보려 고문을 모시는 거죠."
-역술인 노상진, 박재현의 제자

종로 백 선생이 관상 전문가였다면, 부산 박 도사는 사주, 명리의 대가였대. 정태수 회장은 부산 박 도사를 그룹의 고문 자리에 앉혔어. 역술인한테 실제 직책을 내어준 거야. 회사에 큰일이 있으면 역술가부터 찾아. "이 회사 인수하려는데 기운이 어떻습니까", "이 사람 임원으로 앉혀도 괜찮을까요, 배신 안 할 사주입니까"라며.

그런데 정태수 회장은, 그렇게 믿고 따르던 이 박 도사와 결별하게 돼. 왜? 박 도사가 정 회장의 끝을 예언했거든.

"'60세 전후로 해서 운이 다할 거다. 그러니 무리하게 하지 마라' 조언을 했단 말입니다."
-노상진, 박 도사의 제자

너무 잘 나가던 정 회장은 박 도사의 경고를 무시했어. 정 회장이 환갑을 넘겼을 때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어. 몇 년 후에는 재계순위 30위까지 올라가. 대한하키협회 회장에, 여당 재정위원까지 맡으면서, 정 회장은 돈, 명예, 권력 다 가지게 됐어.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는, 한보그룹의 명성이 정점을 찍어. 부동산, 건설뿐만 아니라 정보통신, 제약, 관광, 신용금고, 손 안 대는 분야가 없어. 계열사는 어느덧 22개까지 늘어나.

60대 중반이 훌쩍 넘었는데도 승승장구한 정 회장. 그의 나이 73세였던 1996년, 마침내 한보는 재계 랭킹 14위까지 올라. 정말 타고난 팔자 때문에 이렇게 잘 나갔을까? 모든 게 운명이고 운일까? 세상사를 이렇게 순진하게 바라보면 안 되겠지. 이제 정 회장의 추락과 그로 인해 대한민국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려줄게.

▲알고 보니 운보다 강했던 '로비'의 힘

드라마에서 로비할 때 사과 상자에 현찰을 가득 담아 넘기는 장면들 봤지? 로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그 사과 상자. 바로 사과 상자를 로비 수단으로 대중화한 사람이 정태수 회장이야. 정 회장은 이거 때문에 박 도사의 경고를 무시할 수 있었어.

정 회장은 서울의 한 유명 호텔, CCTV가 없는 19층 객실을 장기로 빌려놓고, 그곳을 로비 장소로 이용했어. 정 회장의 뇌물 컬렉션에는 나름대로의 룰과 등급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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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찻잔 세트는 3천만 원, 적당한 인사치레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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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007 가방에는 5천만 원 정도 들어가. 이건 비중 있는 인물이나 입막음이 필요한 대상한테 전달됐어. 특히 국회의원들한테. 일단 식사자리를 마련해 밥부터 먹어. 그리고 헤어질 때, "왜 가방을 두고 가시냐"며 건네. 이 007 가방은 워낙 자주 써서, 똑같은 걸 대량으로 주문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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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음부터는 단위가 뛰어. 골프 옷가방은 1억 원이야. 억 단위는, 고위 공직자들한테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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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의 사과 박스. 무게만 26kg이야. 2억 원 이상 전달할 때 사용돼. 꽉 채우면 2억 4천만 원까지 들어가. 정 회장의 사과 맛을 본 사람은, 실세 중에 실세야. 장관급이나, 최고 권력자의 핵심 관계자, 그리고 은행장들에게 돌아갔어.

정 회장은 이렇게 거액의 뇌물을 건네고도, 입을 꾹 다무는 걸로 유명했어. 소문을 전혀 안 내. 그래서 '정 회장의 돈은 먹어도 소화가 잘 된다'는 말도 돌았대. 그야말로 뇌물계의 모범 답안이야. 알고 보니 운을 믿은 게 아니라, 돈의 힘을 믿은 거야.

한보가 그린벨트를 사면, 개발 제한이 풀리고, 주변에 고속도로가 뚫려. 이게 가능한 건? 뇌물 먹은 공무원들이 허가를 내주고 개발 정보를 미리 알려줘서야. 로비에 공을 들이니, 애초에 다른 기업들과 출발점부터 달라. 그러니 하는 사업마다 수익이 보장되지.

▲ 부도 맞은 '꿈의 제철소'

한보가 철강기업을 인수했잖아? 정 회장한테는 '철강 재벌'이 되고자 하는 꿈이 있었어. 세계적인 규모의 제철소를 만들어서, 재계 톱 10에 들어가려는 야망을 품었어. 그런데 문제는 땅이 없어. 제철소를 지으려면 엄청난 부지가 필요하잖아. 그럼 어떻게? 바다를 메우는 간척사업, 충남 당진 앞바다를 메워서 지도에 없던 땅을 만들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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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갖고 싶다고 너도나도 바다를 메우면 안 되니, 바다 매립 허가는 하늘의 별 따기야. 하지만 '로비의 귀재' 정 회장은 쉬워. 갑자기 경제장관 회의가 열리더니, 무려 100만 평이나 매립 허가를 받았어. 여의도만 한 면적이야. 당진 앞바다에 흙과 자갈을 쏟아부으며, 정 회장은 '여기는 꿈의 제철소'가 될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이 꿈의 제철소가,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들의 운명을 바꾸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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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도에 부산에 있는 금호산호철강이라는 데에 입사를 했습니다. 1984년도에 한보철강으로 인수가 됐어요. 정태수 회장님이 '꿈의 제철소'라 해서, 당진 제철소를 건설하는 현장에 투입이 됐죠…. 원대한 계획이라면 원대한 계획인데, 이런 것들이 실행되는 것을 직접 체감할 수 있었으니까. 기대는 조금 있었던 거 같아요."
-손일만, 당시 한보철강 직원

한보가 당진에 새 제철소를 만든다고 해서 가족들을 두고 홀로 당진으로 올라왔어. 3천 명이 넘는 직원들이 황무지 같은 땅에서 열심히 일했어. '우리 회사 잘됐으면', '우리 가족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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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부터 시작한 이 대공사가 끝나고 1995년 6월 23일, 당진제철소 준공식이 열렸어. 시설 일부가 완공되자 화려하게 문을 열고 생산에 들어갔어. 그런데, 제철소가 가동되고 채 2년도 되지 않은 1997년 1월 23일. 손일만 씨는 아침 신문을 보고 경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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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철강 부도 처리"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난 거야. 아무것도 몰랐던 직원들은 신문을 보고 회사의 부도를 알게 됐고 큰 충격을 받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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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제철소가 갑자기 부도가 난 이유는 뭘까. 한마디로 '모래성'이었어. 제철소가 온통 빚으로 지어진 거야. 대규모 사업에 은행 대출이 따르긴 마련인데, 이 대출은 좀 이상해. 한보철강의 자기자본은 900억 원인데, 이런 회사가 은행에서 무려 5조 7천억 원을 빌렸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대출을 받았을까? 정 회장의 '뇌물 컬렉션' 때문이야. 은행장들이 정 회장으로부터 2억 원의 현금이 꽉꽉 찬 사과 상자를 받았던 거야. 그 후 정 회장이 은행장에 거는 전화 한 통으로, 수백억에서 수천억 원의 대출이 뚝딱 이뤄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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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은행이 (한보의) 주거래 은행이 되다 보니까 저희 은행에 와서 계속 자금 요청을 하고. 제일은행의 채권만 1조 원이 넘어간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때부터 조짐이 불안했어요."
-정암수, 당시 제일은행 직원.

은행은 고객에게 받은 예금으로 금융사업을 하는 곳이야. 은행이 대출로 내어주는 그 돈 모두, 우리 국민들에게서 나온 돈이야. 근데 은행이 무책임하게 그 돈을 막 대출해주고, 한보는 그 돈을 대책 없이 막 쓰다가 부도를 맞은 거야.

1997년 1월 27일, 정 회장이 머무는 서울의 한 호텔에 방송사 카메라가 들이닥쳤어. 취재진이 "한보철강 어떻게 할 거냐" 물으니 정 회장은 이렇게 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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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이 6조 원이나 투자한 한국 기간산업을 갖다가 이 부도를 냈다는 건. 난 누구한테 책임이 있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황당한 말이지. 부도가 누구 책임인지 경영자가 모른다니.

▲ 사적 용도와 뇌물로 쓴 엄청난 돈

1997년 1월 30일, 한보철강이 부도나고 1주일 뒤, 정태수 회장이 구속돼. 혐의는 공금 횡령 및 뇌물 수수. 충격적인 소식 때문에 민심이 들끓는데, 정 회장은 이런 희한한 모습으로 등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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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전만 해도 노익장을 과시하던 정 회장이, 검찰 수사가 시작되니까 여기저기 아프다며 입원하고 난리야. 회장님들의 '휠체어 투혼', 이 원조가 바로 정태수 회장이야.

1997년 4월 7일 정 회장이 수감 중인 서울구치소에서 부도의 책임을 묻고 뇌물을 어디까지 줬는지 밝히는 청문회가 열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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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은 OOO호텔 객실을 2년간 장기 예약하고 끼니마다 1인당 20만 원짜리 최고급 식사를 했다는데 사실입니까?" (이규정 의원)
"쓰기는 썼습니다. 같이 밥 먹은 사람을 어떻게 일일이 기억을 하겠습니까?" (정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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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약 300명의 명단이 있는 이른바 '한보 리스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추석 때라든지 명절 같은 때 선물을 돌리거나 또는 정치 자금을 전달하고 그런 적이 없습니까?" (맹형규 의원)
"전혀 없습니다." (정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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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울 때 국회 관계 일을 상의했던 사람은 없느냐 이겁니다." (이신범 의원)
"기억이 안 납니다." (정태수)

"여기를 쳐다보고 눈을 뜨세요. 왜 눈을 감고 답변을 합니까? 떳떳치 못하니까 눈을 감고 있는 거 아니에요?" (이상만 의원)
"내가 시력이 약해서 그랬습니다." (정태수)

정 회장은 청문회 도중 주섬주섬 약을 꺼내 먹기도 했어. 그리고 왜 대출을 끊어 멀쩡한 회사 부도를 내게 하냐며, 적반하장식 답변들도 늘어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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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어린애가 크는데 젖을 주다가 젖을 떼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래서 부도가 났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런 표현도 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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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억 원을 빌려줬으면 부도가 안 난다'라고 얘기하는데, 증인의 직원은 말입니다. '3천억 원이 나와봤자 두 달을 버틸 수 있는 돈입니다' 얘기했어요." (이상수 의원)
"자금이라는 건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이 어떻게 압니까!" (정태수)

'머슴' 발언보다 더 충격적인 건, 대출금의 행방이야. 한보가 빌린 5조 7천억 원 중, 당진제철소에 투입된 건 2조 4천억 원이었어. 그럼 나머지는 어디로 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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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배기 손자한테 15억 원짜리 집을 줬죠?" (이상수 의원)
"손자한테는 증여한 겁니다…. 내 돈으로 했습니다." (정태수)

"금융 자금을 빌려서 부인하고 이혼하는 위자료 40억 원도 냈죠?" (이상만 의원)
"네." (정태수)

나머지 돈은 사적인 용도로 쓰고, 뇌물로 쓰고 그런 거야. 빚이 너무 많으니까, 1년에 이자만 5천억 원씩 나갔어. 회삿돈을 그렇게 쓰는 건 배임이고 횡령이야. 검찰은 또 하나의 단서를 발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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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 김영삼 대통령의 둘째 아들 김현철 씨가 쓴 자서전이야. 근데 이 책이 한보그룹의 창고에서 1만 권 넘게 발견됐어.

"김현철 씨 책이 장지동 창고에서 1만 권가량 발견이 됐는데?" (맹형규 의원)
"비서실장 신OO 실장이라고 있습니다. '적당히 네가 사서 처리하라', 이 지시한 것 밖에 없습니다." (정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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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김현철 씨의 별명은 작은 대통령, '소통령'이었어. 공직자 인사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 기업들에게 뇌물을 받아왔다는 의혹이 불거졌어. 특히 정태수 회장의 둘째 아들이 '소통령' 김현철 씨와 굉장히 가깝게 지냈대. 한보의 특혜 대출이 집중된 시기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이후야.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나서서 대국민 사과를 하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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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전체가 한보 사건으로 인한 충격에 휩싸여 있습니다…. 저를 더욱 괴롭고 민망하게 하는 것은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제 자식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1997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 담화 발표

한보철강의 부채가 5조 7천억 원. 그런데 한보그룹 전체가 빌린 자금은, 거의 10조 원에 달해. 이건 갚을래야 갚을 수가 없는 빚이야. 이 시한폭탄이 터지며, 한보그룹은 와르르 무너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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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재판에서, 정태수 회장은 징역 15년 형을 받았어. 정 회장의 몰락, 이른바 '한보 사태'라 불리는 이 사건은, 우리나라 경제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돼.

▲한보 사태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고통으로

1997년 하면 '외환 위기'가 떠오르지? IMF, 국제통화기금을 우리나라로 불러들인 게 사실상 이 한보야. 8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경제는 호황이었어.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기고, 경제 개발이 한창이었어. 우리나라는 좋은 투자처라, 해외로부터 대규모 자본을 투자받곤 했어. 하지만 90년대 중반부터는 수출이 감소하고, 세계적으로 경기도 불황이야. 그런데도 우리나라 기업들은 무리하게 빚을 내서, 문어발처럼 사업을 확장했어. 외국의 투자자들은 가장 먼저 무너진 한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대. 1997년 말, 외국의 한 증권사가 자기네 투자자들한테 이런 메시지를 보내.

"Get out of Korea, right now(한국을 탈출하라, 지금 즉시)."
-홍콩 페레그린증권 보고서 中

한국은 안심하고 투자할 나라가 아니니, 빨리 투자금을 회수해서 탈출하라.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 일명 '뱅크런'이야. 해외 자본이 급작스럽게 빠져나가기 시작해. 나라 전체가 빌린 돈은 막대한데, 갚을 돈이 없는 국가 부도 사태. 이 국가 부도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IMF 자금 지원을 요청하게 되는 거야.

돈을 빌리는 대신, IMF는 부실한 금융권, 기업들을 구조조정 하고 직원들을 정리해고 하라고 요구했어. 한보철강의 부도는 정리해고로 이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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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100여 명에 대한 정리해고를 통지하며 대대적인 감원에 나섰습니다. 주인을 잘못 만나 머슴들이 고생하게 됐습니다."
-1997년 10월 13일 뉴스 中

"허망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 사표를 썼으니까. 유곡리에 사원 아파트가 5동 있었어요. 퇴사하니까 1동만 남았습니다…. 새벽 2시 되면 쨍그랑하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납니다. 돌을 던진 거죠. 퇴직 통보받은 사람이 술 한 잔 먹고. 무슨 기분이겠습니까."
-손일만, 당시 한보철강 직원

수차례에 걸친 해고 끝에, 3천 명의 직원이 580명으로 줄었어. 대부분이 어린 자녀들 키우는 가장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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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팀원) 2명이 자살했어요. '꿈의 제철소'라고 해서 당진에 안 올라왔으면 평범하게 잘 살았을 분들이. 스스로 선택을 그렇게 한 게 너무 가슴 아프죠."
-손일만, 당시 한보철강 직원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재계 서열 26일 삼미그룹, 재계 순위 8위 기아그룹, 12위 한라그룹 등 굴지의 대기업들, 중소기업, 협력업체까지 연쇄 도산이 이어졌어. 그 수가 1만 개를 넘어. 작은 식당을 하는 자영업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건설 노동자들, 사무직 노동자들도 너나없이 실업자가 됐어. 1998년 1월 19일, 제일은행에서는 1천849명이 희망퇴직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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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2월에 명예퇴직을 했죠. 그 당시에, 절대 안 망한다,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 그랬죠. 한보 사태 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절대 안 했습니다. 준비도 안 했고 아무도. 인생을 바꾼 거죠 완전히."
-정암수, 제일은행 퇴직

수백만 실업자와 가족들은, 꽤 오랫동안 처절하고 혹독한 시련을 겪었어. 그때의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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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일거리를 찾아 길거리에 나선 사람들. 일거리를 가진 차량이 들어서면 너도나도 달려가서 차량 창문에 매달렸어.

부도가 난 기아 직원들의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 한 학생은 이런 일기를 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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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부도가 난 뒤 말씀은 적어지시고 뉴스와 신문만 보셨다. 가끔씩 속이 상하시다면서 약주를 하시면서 우리에게 '기아는 좋은 회사다. 기아는 꼭 정상화되어서 좋은 차를 만들 것이다'라고 절망에 빠진 우리 가족을 우리보다 더 힘든 아빠가 위로해주셨다…. 하루빨리 기아가 정상화되어서 절망에 빠졌던 우리 아빠가 다시 희망을 되찾아오셨으면 좋겠다."

아동 보호소나 보육원에는 아이들이 넘쳐났어. 주로 5세 미만의 어린아이들이 많았던 이곳에 초등학생 아이들도 들어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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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풀리면요. 아빠가 같이 살자고 했어요."

'부도'라는 단어의 뜻도 제대로 모를, 한 어린아이는 "아빠가 부도 나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했어. 부도에 대해 묻자 "갚을 거 안 갚아서 경찰서에 있대요"라고 설명해. 그리고 "여기서 아빠를 계속 기다릴 거예요"라고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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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를 겪었던 그 시기, 직장을 잃은 가장들에게는 가혹한 겨울이었고, 가장을 잃은 아이들에겐 긴 겨울밤이었어.

시간이 흘러, 7년을 표류해왔던 한보철강의 매각 작업이 드디어 완료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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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길지는 생각을 못했어요. 7년의 세월이 갈 줄은 정말로…. 재입사 권유를 받았을 거 아닙니까? 우선적으로 (해고된) 그분들을 초청해야죠 당연히. 7년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고혈압도 있고 다른 지병들이 생겨서, 우선순위를 줬는데도 신체검사에서 많이 못 들어온 거 보고 너무 마음이 미어졌죠. 정말 안타깝더라고요."
-손일만, 당시 한보철강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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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환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우리 국민들은 '금 모으기 운동'을 펼쳤어. 나라에 달러가 부족하니까, 애기 돌반지, 어머니 금비녀, 목걸이 등 집 안의 모든 금붙이는 다 들고 나왔어. 힘든 상황에서도 그렇게 다 같이 힘을 모은 국민들. IMF에서 빌린 돈을 우리나라는 단 3년 8개월 만에 다 갚았어. IMF 조기 졸업,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야.

이렇게 국민들이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정태수 회장은 어떤 시간을 지나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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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정 회장은 특별사면돼. 고령에 건강이 안 좋다는 이유로. 그 15년 징역 중에 5년도 채 살지 않은 거야. 빈털터리라던 정 회장은 또 한 번 법정에 서게 됐어.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대학에서 72억 원을 빼돌려 개인적인 용도에 쓰다가 검찰에 적발된 거야. 그중 4억 8천만 원은 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살던 가회동 저택을 2년간 빌리는 데 사용됐어.

이번에도 감옥에 갈 거 같으니 정 회장은 어떻게 했을까? 이번엔 휠체어도 아니야. 해외로 도망을 가버렸어. 몸이 아파서 일본에서 치료를 받겠다고 출국했는데, 그때부터 12년 동안 행방이 묘연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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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2019년 6월 22일, 함께 도피 중이던 막내아들이 체포되면서, 정 회장이 드디어 한국 땅으로 돌아왔어. 이런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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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회장의 사망 진단서야. 2018년 12월 1일. 남미 에콰도르에 살다가,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대. 12년간 중앙아시아, 남미,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았는데, 해외에서도 꽤 호화롭게 생활했대.

대한민국 경제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도망자로 생을 마감한 재벌, 정태수 회장. 마지막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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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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