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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멀티버스에 대한 환상은 어떻게 내 삶을 망가뜨렸나

By S.I. 로젠바움 (뉴욕타임스 칼럼)

뉴욕타임스
*S.I. 로젠바움은 언론인이자 예술가다.

여기 나이가 들어 혼자 사는 환자가 있다. 우울증 증세가 보였지만, 문제는 그 이상이라는 점이 분명했다. 환자는 자기가 잘못된 타임라인에 갇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사에게 자신이 입원한 병동이 시간을 비켜가고 있다고 말했다. 병동 밖에는 이미 미래가 와 있고, 그 미래는 좋은 미래가 아니라고 했다. 2019년 학술지 " 신경학과 신경외과학(Neurology and Neurosurgery)"에 이 사례를 보고한 영국 엑서터의 의사들은 이렇게 전한다.

"환자는 병동 밖의 세상이 파괴됐다고 묘사했다."

이 여성 환자에게 내려진 진단명은 '카그라스 증후군'의 일종이었다. 보통 배우자나 자녀처럼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착각하는 증상을 일컫는 카그라스 증후군의 병명은 약 100년 전에 붙었다. 환자는 세상 전체, 그러니까 자신이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복제됐거나 가짜라고 믿었다.

나는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 알고 있다.

아마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러 개의 현실이 존재하는데, 자신은 그중에 원치 않는 현실 속에 발이 묶여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 어떤 이들은 2016년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고 그런 감각을 갖게 됐다. 영국의 유명 TV 프로그램 '닥터 후'로 유명한 배우 아서 다빌은 2016년 11월 9일에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가 잘못된 타임라인에 착륙한 것 같다."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일어난 인종차별 반대 시위와 버지니아주 샬롯츠빌에서 벌어진 맞불시위 국면에 적극 참여했던 목사 겸 민권 운동가 트레이시 블랙먼 역시 2018년 비슷한 심경을 트위터에 토로했다.

"대안 우주에 갇혀버린 것 같다."

당시 나는 블랙먼에게 이 트윗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자신이 목도한 인종주의가 지금까지 역사가 펼쳐지리라 생각한 방향과 완전히 엇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회적 평등이나 인간 대우 같은 면에서 우리가 일궈낸 성과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성과가 있었으니, 이제는 진짜 다른 세상이 올 줄 알았죠."

5년이라는 세월과 한 차례 팬데믹이 지나간 후, 한 사람의 여러 버전을 담은 멀티버스를 묘사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오스카상을 휩쓸었다. 이 영화는 여러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배우 키 호이 콴이 연기한 극 중 인물 웨이먼드 왕의 대사("뭔가 잘못 됐어")에 많은 이들이 공감한 것일까.

멀티버스, 그리고 은유로서의 멀티버스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이유는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평행우주에 존재하는 여러 자아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중 어떤 자아는 내가 갇혀있는 타임라인보다 더 나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많은 사람이 무기력과 갑갑함을 호소한 팬데믹과 기후변화, 정치적 혼란의 시대에 이런 아이디어가 큰 인기를 끈 것은 우연이 아니다. 누군들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른 우주를 상상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카그라스 증후군 환자처럼 내가 실제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세상으로부터 유리될 위험이 있어서 그렇다. 우리가 멀티버스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를 떠나서, 그런 생각이 지금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일을 오히려 그르칠 수 있다. 지금 이 타임라인이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타임라인이며, 그것으로 충분해야만 한다.

인간이라는 종은 오랫동안 영혼의 영역이나 귀신의 세상이라는 아이디어에 집착해 왔다. 플라톤은 우리가 만질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실제적인 형상의 세계를 그려냈다. 플루타르크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 세계도 다 정복하지 못했는데 무한한 숫자의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에 울음을 터뜨렸다고 전한다.

C.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를 통해 초기 멀티버스를 그려낸 개척자다. 나니아 시리즈에서 아이들은 현실의 평행 우주로 존재하는 벽장 너머 마법의 세계에서 왕과 여왕으로 존재한다. 루이스는 양자물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에도 관심을 보였다. 나니아 시리즈의 마지막 책을 내고 1년 후인 1957년, 프린스턴대학의 박사과정생 휴 에버렛 3세는 여러 우주가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한다는 고전적인 아이디어를 현대 과학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논문을 발표했다.

에버렛의 연구는 양자이론의 역설로 여겨진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그것은 광자나 전자 같은 기본 입자들이 수학적으로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다가도 이를 측정할 경우 하나의 특정한 위치로 관찰되는 문제였다.

에버렛은 입자를 감지하는 행위가 다양한 우주를 만들어낸다고, 곧 관찰자와 그 관찰자가 속한 우주가 입자가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위치에 대한 각각의 타임라인으로 나뉜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이후 '다세계 해석'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당시 동료 물리학자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에버렛의 아이디어가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침투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일단 대중문화의 경계를 넘자, 펄프픽션 작가들은 즉시 이 개념을 사랑하게 됐다. 1961년, DC 코믹스는 "두 세계의 플래시!"라는 작품에서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슈퍼히어로 플래시가 다른 세계로 넘어가 또 다른 플래시를 만난다는 이야기를 선보였다. 최근에는 마블 스튜디오 같은 슈퍼히어로 제작사가 끊임없는 리부트 시리즈를 만들어내기 위한 틀로 멀티버스를 적극 도입했다. (A.O. 스캇은 뉴욕타임스 지면을 통해 이런 현상이 "독창성과 풍부한 서사를 약속하는 장치지만, 오히려 클리셰의 무한한 재조합을 가져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스파이더맨은 '스파이더-버스'로 들어가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길을 잃는 식이다.

나는 어렸을 때 만화영화 '우주의 전사 쉬라'를 보면서 평행우주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다. 아도라 공주는 태어나자마자 오빠인 아담과 분리되어 '3차원의 포털' 반대쪽에서 성장하게 된다.

외동이던 나는 늘 외로웠기 때문에 다른 우주에서 아담 왕자 같은 숨겨진 형제, 자매를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에 곧장 매료되고 말았다.

내가 12살 때 어머니에게 애인이 생겼고, 내 상상 속에서 존재하던 가족은 현실이 됐다. 말장난을 좋아하는 형제와 시를 쓰는 자매가 생긴 것이다.

새아버지는 내가 19살 되던 해 흑색종으로 돌아가셨는데, 이후 몇 년간 가족 내부에서 분쟁이 이어진 끝에 새로 만들어졌던 가족은 결국 다시 분리되고 말았다.

나는 상실감 속에서 성년의 첫걸음을 잘못 떼고 말았다. 내가 기대하던 삶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며 끔찍한 현기증을 느끼곤 했다. 가족이 깨진 후에 새로 생긴 타임라인에서 내 의붓형제자매는 더 이상 형제자매가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잠깐 알고 지낸 사람들에 불과했다.

이 모든 것이 햇살의 광자가 새아버지의 DNA와 잘못 충돌한 탓이었다.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사소한 재앙에서 시작된 슬픔의 유니버스라는 양자 사건 그 자체였다.

나는 한동안 다른 타임라인, 그러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다른 타임라인에 집착하며 세월을 보냈다. 새아버지가 살아계시고,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하는 유니버스. 이런 상상은 내 삶에 빠진 게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내가 잃은 것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멀티버스의 위험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비현실적인 존재가 되는 것, 새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것. 나니아 시리즈가 절정에 달했을 때 루이스는 자신이 사랑한 판타지 세계가 더 새롭고, 더 실제적인 나니아의 '그림자 복사본'에 불과하다고 선언했다.

"새로운 나니아는 더 깊은 세상이었다. 바위, 꽃, 풀포기 하나하나가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림자 복사본이라니, 내 심정도 딱 그랬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조이를 연기한 배우 스테파니 수는 모든 타임라인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조이는 허무주의적 절망에 굴복하고 만다.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다면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물리학자 에버렛의 딸 엘리자베스의 운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엘리자베스는 자신과 아버지가 모두 살아있는 '옳은 유니버스'로 가고 싶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근에 나는 대안우주에 대한 트윗을 올렸던 블랙먼에게 다시 연락을 취해 2023년의 타임라인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그리고 대변인으로부터 "여전히 갇혀있기 때문에 업데이트는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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