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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미래를 내다보는 고용노동부의 보도자료

시작도 안한 간담회 참석자 발언 적어

[취재파일] 미래를 내다보는 고용노동부의 보도자료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요즘 단연 가장 바쁜 장관일 것입니다.

지난 6일 고용노동부는 근로시간 개편안 발표 이후 압축 노동과 휴식권 보장을 우려하는 반대 여론에 직면해 있습니다. 여기에 대통령실의 정책 '보완' 요구가 나오면서 고용부 역시 서둘러 입법예고 기간까지 최대한 많은 소통을 통해 정책을 설득하고 보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발맞춰 이 장관은 최근 다양한 사업장과 젊은 세대들의 목소리를 듣겠다며 각종 간담회를 개최하는 현장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장관의 일정을 기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간담회 보도자료가 미리 배포되고 있는데 요즘 희한한 장면이 보이고 있습니다. 보도자료가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①보도자료
: 이정식 장관, 근로시간 개편 관련 근로시간 기록·관리 우수사업장의 청년 근로자, 인사담당자 의견 청취

정준호 취재파일_사진 1(수정)
정준호 취재파일_사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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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담회 일시 : 3월 15일 14~15시
보도자료 배포 : 3월 14일 20시 43분
엠바고 : 3월 15일 14시


이정식 장관은 지난 15일 근로시간 기록 관리가 잘 돼 다양한 자율출퇴근제 등 근로시간 선택권이 강화된 한 사업장을 찾았습니다. 보도자료는 전날(14일) 20시 43분. 간담회 개최 약 17시간 전에 배포됐습니다.

그런데 시작까지 한참 남은 간담회 자료에는 마치 할 말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간담회 참석자들의 발언이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근로자 ㄱ씨는 "근로시간 기록이 잘 돼 자율출퇴근이 가능하고 일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받는 기분을 느낀다"라고 말합니다. 인사담당자 ㄴ 씨는 "근로시간 기록 프로그램을 업무가 줄어들었다"로 말하고 또 다른 인사담당자 ㄷ 씨는 "다양한 근로시간제도를 개인 상황에 맞게 잘 운용할 수 있게 됐다"고 사업장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②보도자료
: 이정식 장관, 근로시간 개편 방향에 대한 청년세대 의견수렴을 위해 2030자문단 간담회 개최 2030자문단 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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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담회 : 3월 16일 18시 30분~20시
보도자료 배포 : 3월 16일 13시 42분
엠바고 : 3월 16일 18시 30분

바로 다음 날에도 보도자료는 미래를 훤히 내다보고 있습니다. 지난 16일에는 고용노동부가 뽑은 20~30대로 구성된 자문단을 통해 근로시간 개편안에 대한 의견을 듣는 자리가 마련됐습니다. 그리고 간담회 개최 약 4시간 전에 보도자료가 배포됐습니다.

여기서도 고용노동부는 '참석자 목소리'라며 근로시간 개편안 관련한 구체적인 7개의 의견을 적어 놓았습니다. 인용을 위한 큰따옴표까지 적어놓은 목소리에는 "국민의 믿음을 얻어내야 한다." "연차 휴가 활성화가 필요하다." "근로자 대표 제도를 실효성 있게 정비해야 한다"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책의 방향과 세간의 표현에 오해가 생겼다", "정확한 홍보 방안이 필요하다" 같은 정부를 옹호하는 내용도 함께 있었습니다. 근로시간 개편안 발표 이후 언론의 뭇매를 맞는 고용노동부가 오해를 풀어 달라며 이야기하고 있는 주장이 참석자의 목소리를 빌어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③보도자료 : '유연한 근무시간 운영이 연차휴가 사용에 도움'

간담회 : 3월 20일 15~16시
보도자료 배포 : 3월 20일 15시 13분
엠바고 : 배포 즉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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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호 취재파일_사진 10

이뿐만이 아닙니다. 지난 20일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연차 휴가를 100% 사용한 사업장을 찾았습니다. 앞서 보도자료와 달리 이 날은 간담회가 한창 진행 중인 15시 13분에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이 자료에 등장하는 근로자들은 "자유로운 휴가사용으로 개인에게 투자할 시간이 늘어나 삶의 질이 좋아졌다"라는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여기에 이정식 장관은 "근로시간 제도 개편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우리가 바라는 회사의 모습"이라고 화답하는 워딩이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날 간담회 시작은 15시였습니다. 예정된 스케줄대로 간담회가 진행된다면 최소 15시 16분부터 근로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현장 의견 청취 및 제도 개선사항 등 논의'가 진행돼야 합니다. 어찌 된 일인지 근로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담았다는 보도자료는 15시 13분에 배포된 것입니다. 이 날 저희 취재진이 촬영한 영상을 다시 봐도 행사 시작 후 최소 15분가량 고용부 장관과 사업장 대표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취재진 몰래 현장 의견이라도 들은 것이었을까요.

보도자료가 그리는 '우아한 미래'


정부의 보도자료는 정책 홍보와 취재 편의를 위해 제공됩니다. 정부가 알려주고 강조하고 싶은 정책과 일정을 담기에 보도자료에는 그 의도와 방향성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기자들도 액면 그대로 보지 않고 이를 분석해 기사를 작성하려고 노력합니다.

근로시간 기록 관리가 잘되고(보도자료 ①), 연차 휴가가 자유로운 사업장(보도자료 ③). 게다가 2030의 지지(보도자료 ②)까지 얻는 것은 정부가 추진하는 근로시간 유연화가 실현 됐을 때 이상적으로 그려질 '우아한 미래'일 것입니다. 이런 고용부의 바람이 과하게 들어가서인지 최근 고용부의 보도자료는 정부가 그리는 이상적인 근로자들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예상하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용부의 상상이 현실이 됐는지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행사는 모두발언을 마치고 비공개로 전환됩니다.

근로시간 개편안 발표 이후 고용노동부와 대통령실은 '주 69시간, 주 60시간' 이상이냐 아니냐를 놓고 최근 엇박자 소통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혼선이 가중되면서 제도를 바라보는 불신의 시각은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우려를 잠재우려면 연차 휴가를 다 가기 어렵고 포괄임금제에 시달리는 노동자, 젊은 세대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제도 악용에 시달릴 다양한 노동자들을 하루빨리 만나 설득해야 할 것입니다.

간담회 대상 선정부터 예상되는 발언까지 담은 보도자료를 보면 과연 지금 진정성 있는 현장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다음 달 입법예고까지 남은 시간 동안 고용노동부의 다음 보도자료가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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