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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일본 영화 관객점유율 30% 시대에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67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K-콘텐츠 전성시대라는데, 넷플릭스에서 K-콘텐츠가 맨날 글로벌 1위인데, 한국 시장에서 일본 영화 점유율이 30%에 육박한다는 게 말이 되나? 이게 뭐 WBC도 아니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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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일본 영화의 관객 점유율이 어제 30.3%를 기록했다. 아마도 전무후무한 수치일 것이다. 1위인 미국(33.8%)과 3%, 2위인 한국(31.9%)과도 2% 차이도 나지 않는다.
씨네멘터리_일본 영화
지난 5년 동안 일본 영화의 점유율이 가장 높았던 때는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일본 시장 역대 박스오피스 1위 영화)이 215만 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7위에 올랐던 2021년이다. 그해 일본 영화 관객 점유율 6.2%도 예년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였다. 일본 영화의 관객 점유율은 2018~2020년엔 1%대, 지난해 3.9%에 그쳤는데, 올해는 아직 1/4도 안 지나긴 했지만 30%에 육박하고 있으니 가히 폭발적이라 할만한 성장세다. 

지난주, 역대 일본 영화로는 처음으로 관객 400만 명을 돌파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기세는 “스즈메의 문단속”이 그대로 이어받았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개봉일부터 어제까지 11일째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다.  어제 박스오피스 5위 안에는 “스즈메의 문단속”“더 퍼스트 슬램덩크”(2위) 외에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 마을로”(5위)까지 모두 3편이 올랐다. 지난주에는 예매율 1,2,3위를 일본 영화가 휩쓸기도 했다. 

올들어 일본 영화가 1위를 한 날 수는 모두 33일. 한국 영화는 “교섭”“대외비”를 합쳐 14일에 그친다. 물론 한계도 있다. 일본 영화 세 편 모두 ‘저패니메이션’이라 불리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현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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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김대중 정부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선언했다. 이듬해인 1999년 9월에는 2차 대중문화개방으로 개방의 범위가 ‘공인된 국제 영화제 수상작’과 ‘전체관람가 영화’로 확대됐다. 애니메이션은 제외됐다. 이때 들어 온 일본 영화가 바로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1995)다. 
“하나비" (1997. 기타노 다케시 감독,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카게무샤" (1980.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우나기" (1997.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에 이어 4번째로 수입된 일본 영화였다.

아직도 해마다 겨울이면 이 영화를 다시 본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러브레터”는 당시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개방 이전 이미 불법 비디오로 본 사람들이 많았고, ‘밈’이라는 말조차 없었을 당시에도 이미 “오겡끼데스까?”는 밈이었다. “러브 레터”는 관객 수 100만 명을 훌쩍 넘겨 아직까지도 일본 ‘실사 영화’ 흥행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말 개봉한 일본 실사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해도”가 관객수 110만 명을 넘겼다. 일본의 아이돌 스타 미치에다 슌스케 주연의 로맨스 영화로 10대와 20대 여성 관객의 큰 지지를 받았다. 그동안의 흥행 성적으로 판단할 때 한국에서 일본 실사 영화가 100만을 넘어서면 초대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21년 만에 “주온"(2002)의 흥행을 넘어선 “오세이사(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해도)”의 흥행은 뜻밖이었다. 

“저희 ‘오세이사’가 100만 관객을 넘었다고 하지만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영화는 ‘러브레터’입니다. 115만 명 동원한 걸로 돼 있지만 당시는 통합전산망이 없을 때였으니까요.” (영화진흥위원회의 통합전산망 시스템이 갖춰지기 전까지 통계는 정확성이 많이 떨어진다. 실제로 “러브레터”는 개봉 당시 전국에서 4-500만 명을 동원했을 거라고 추정된다)

“오세이사”의 수입사인 미디어캐슬의 강상욱 대표의 얘기다. 

미디어캐슬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2017) 같은 실사 영화와 “너의 이름은"(2017), “날씨의 아이"(2019), “스즈메의 문단속” 같은 애니메이션 등 일본 영화를 전문적으로 수입해왔다. 특히 “초속 5센티미터"(2007)에 투자를 하면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친분을 쌓아 “너의 이름은”을 한국 시장에서 대히트시켰다.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던 강 대표는 왕가위 영화와  “라붐”같은 프랑스 영화도 수입하다가 일본 영화로 방향을 잡았다.

“국가별 점유율 통계를 보니까 1등은 한국, 2등은 미국, 이건 정해져 있어요. 둘이 서로 바뀔 수는 있지만요. 그런데 한참 떨어지지만 3등은 늘 일본인 거죠. 저는 이걸 어떻게 해석했냐면 ‘일본 영화를 들여오면 큰 흥행은 되지 않겠지만 일본 영화의 감성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겠구나. 한국과 일본 관계가 정치적으로 위험성도 있긴 하지만 문화라는 것은 편식이 불가능하고 막을 수도 없는 문제니까 이쪽으로 특화해 보자’라고 생각한 거죠.”

한참 떨어진 3위였던 일본 영화가 최근 초강세를 보이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강 대표에게 물어봤다. 강 대표는 일본 영화의 핵심 관객층이라 할 20대 이야기를 했다. 

“윗세대들은 일본 영화 감성을 선호하더라도 뭔가 약간 멈칫하게 되는 허들이 있었는데 세대가 바뀌면서 젊은 관객들에게는 그런 허들이 낮아진 것 같아요. 또 ‘오세이사’ 내용만 보더라도 자고 나면 기억이 사라진다는 설정이 ‘500일의 썸머’도 있고 ‘첫 키스만 50번째’ 같은 영화도 있어서 우리 세대에는 구태의연한데 젊은 세대에게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라는 소재 자체가 너무 신선하고 절절한 거예요.”

강 대표는 또 한국 영화에 비해 뒷심이 부족하고, 한동안 침체기에 있었던 일본 영화가 최근 하지 않던 시도도 하면서 절치부심하는 게 느껴진다고도 했다. 

“그리고 솔직히 2D 애니메이션은 일본이 그냥 글로벌 넘버 원이잖아요.”

강 대표 말대로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서브컬쳐에서 작품성이나 대중성에서 늘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지금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있는 “스즈메의 문단속”도 독립영화나 정치색 짙은 영화를 선호해온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지난달 경쟁 부문에 초청돼 신카이 마토코 감독과 주연 여배우(성우)가 베를린에서 레드카펫 행사를 치렀다. 각종 순위를 매기는 걸로 잘 알려진 “US NEWS & WORLD REPORT”지의 국가별 문화적 영향력 순위에서 일본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미국에 이은 4위다.(한국 순위도 높은 편이다. 7위)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제작진 / 베를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최근 내한했던 신카이 마코토 감독도 일본 영화가 최근 한국에서 인기 있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일본에 살면 ‘한국 콘텐츠가 정말 강하구나’라고 느끼는 경우가 더 많고 일상 생활에서도 K-콘텐츠를 날마다 접하게 된다는 신카이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 기자회견장에 차를 타고 오는데 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에서 왠지 그리운 감정도 들고 약간은 미래의 풍경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굉장히 가까운데 조금은 다른 듯한 나라, 그리고 시간이 조금 어긋난 것 같은 착각이 드는 나라라는 생각도 들고요. 도시의 풍경은 사람이 만드는 것입니다. 양국 사람들의 마음의 형태가 어딘가 닮아 있는 면이 있어서 한국인들이 저의 작품을 좋아해주시지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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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영화의 '초강세'는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것이다. 다음 달에는 닌텐도와 유니버설픽처스가 합작한 3D 애니메이션 “슈퍼마리오 브라더스”가 개봉해 “스즈메의 문단속”의 인기를 이어갈 테지만 그렇다고 해도 연말이면 일본 영화의 관객 점유율 10% 안팎으로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한다. (그래도 사상 최대의 수치일 것 같긴 하다)

사실 일본 영화가 잘 되는 게 걱정이 아니라 한국 영화의 부진이 걱정이다. 아무리 연초라 해도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 중 박스오피스 10위 안에 있는 건 4위 “교섭”, 8위 “대외비”, 9위 “유령” 3편뿐이다. 그나마 100만 관객 이상은 172만 명의 “교섭” 한 편뿐이다. 

더 큰 문제는 이 영화들이 언젠가 봤던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한국 영화는 언제부턴가 비슷 비슷한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 매니아”(요즘 영화 제목들은 왜 이렇게 다 긴가)가 관객 154만 명에 그치며 마블이 죽을 쑤고 있는 상황이라 연초 한국 영화의 부진은 더 안타깝다. 

넷플릭스에서 한국 드라마 시리즈는 여전히 위세를 보이고는 있지만, K-콘텐츠는 이제 정점을 지난 걸까. 하이브 방시혁 의장은 얼마 전 관훈 포럼에 나와 K팝의 성장세가 둔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 사태로 개봉이 밀렸던 한국 영화는 아직도 창고에 쌓여있다. 그동안 한국 영화에 제대로 투자하지 못한 후유증이 이제 나타나기 시작한 걸지도 모른다.

큰 성공 속에 큰 실패가 있고, 큰 실패 속에 큰 성공이 숨어있다. 달도 차면 기울고,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듯, 사람은 결국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으로 망한다. 문화 또한, 같은 것이 반복되면 물리게 돼 있다. 한국 영화가 지금까지 가장 잘해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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