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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독서는 쓸모 없어요"…중국 청년세대의 무력감 '공을기 문학'

"남들 눈에는 쓸모없는 지식, 부끄러운 생활환경"…자조적 문구 유행하는 이유는

정영태 취재파일
"학력은 디딤돌일 뿐 아니라, 내가 내려올 수 없는 높은 발판이자 벗을 수 없는 긴 장삼이다. (学历不仅是敲门砖,也是我下不来的高台和脱不去的长衫)"
"독서는 당신을 현 상황에 불만족하게 만들지만 현 상황을 바꿀 수는 없다. (读书让你不满足于现状,但又无力改变现状)"

최근 중국 청년세대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는 문구들입니다. 고등 교육과 독서의 소용없음을 자조적으로 풍자하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대학 교육을 비롯한 높은 학력을 과거에는 흔히 신분상승 계단을 올라가는 디딤돌로 비유했지만 지금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교육과 학습에 많은 비용과 시간, 노력을 들였지만 오히려 족쇄나 다름없다는 무력감이 반영돼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지식은 운명을 바꾼다(知识改变命运)"는 말을 들으며 독서의 중요성을 배워왔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쓸모없지 않냐는 '독서무용론'이기도 합니다.
 

중국 청년 세대 무력감 반영한 '공을기 문학'


중국에서는 위와 같은 청년들의 문구에 '공을기 문학(孔乙己 文学)'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공을기(콩이지, kŏngyĭjĭ)는 아Q정전, 광인일기 같은 작품을 쓴 중국의 문학가 루쉰의 단편소설 제목입니다.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에 중국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소설이자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공을기는 유학에 기반한 관료 선발 제도인 과거제에 갇혀 있는 지식인으로 사서삼경 같은 고전 읽기와 쓰기 외에는 다른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일반 백성과 선비를 구분 짓는 상징과도 같은 옷인 '긴 소매의 장삼' 입기를 고집하는 인물입니다. 공을기의 긴 가운과도 같은 옷은 육체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반팔 차림과 대비됩니다. 공을기는 가끔 대필을 해주고 받는 푼돈 외에는 수입이 없어 가난하지만, 자존심 놓지 못해 육체노동에는 종사하지 못합니다. 주점에서 자리를 잡고 탁자에 앉을 돈조차 없어서 '늘 서서 술을 마시는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정영태 취재파일

"사람들은 모두 공을기를 보고 웃지만 모두가 공을기다"


이른바 '공을기 문학'은 중국의 청년 세대가 소설 속 공을기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높은 학력이 좋은 직장, 경제적 성공을 보장해 준다는 말에 치열한 경쟁을 거치고 많은 돈도 써가며 졸업했지만 정작 취직하기 어려운 청년 세대의 현실이 공을기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겁니다. 소설 속에서 경제적 능력은 없어도 지식인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공을기를 주변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이 소설을 교과서에서 배운 청년 세대도 어린 시절엔 '봉건적 폐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시대의 상징'으로 공을기를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니 그때 비웃었던 공을기가 어느새 나 자신의 모습이 돼 있다는 걸 자각하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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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디딤돌일 뿐 아니라, 내가 내려올 수 없는 높은 발판이자 벗을 수 없는 긴 장삼이다"

대표적인 '공을기 문학'의 하나인 이 문구에 나오는 '벗을 수 없는 긴 장삼'이 바로 공을기가 입고 있는 옷을 뜻합니다. 무기력, 무능력한 지식인의 상징으로 쓰고 있는 건데, 청년 세대들은 자신들이 어렵게 따낸 고학력 졸업장이 공을기의 긴 장삼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자조적인 문구가 유행하는 배경엔 구조적 원인이 있습니다. 대학 졸업자는 늘어나는데, 경제성장의 속도가 둔화하면서 신규 일자리 창출 여력 역시 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 졸업생 1,158만 명 시대…가중되는 취업난


올해 중국의 대학 졸업 예정자는 무려 1,158만 명으로, 지난해보다 82만 명이나 늘어나 역대 가장 많은 규모입니다. 더구나 해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중국 내에서 일자리 찾기에 나서는 유학생 규모도 1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됩니다. 중국 당국이 밝힌 올해 도시 일자리 창출 목표는 약 1,200만 개인데 취업해야 할 도시 구직 인력은 1,662만 명에 달합니다. 일자리 창출 목표를 달성한다고 해도 400만 명 넘는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중국의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 계기 기자회견에 나선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대변인도 "올해 취업 대기자 수가 많아서 고용 안정에 적지 않은 어려움과 도전에 직면해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정영태 취재파일

과거 초고속 성장을 구가했던 중국의 성장 속도가 느려지면서 대학 졸업생을 비롯한 청년들의 구직난은 가중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말까지 제로 코로나 목표 달성을 이유로 고강도 봉쇄형 방역 정책을 장기간 지속한 것이 직격탄이 됐습니다. 지난해 대학 졸업생 규모는 1,076만 명이었는데 최대 취업 시즌이었던 3∼4월 취업률이 46.7%에 그쳤습니다. 한해 전 취업률 62.8%보다 무려 16.1%p가 떨어진 수치라 큰 충격을 줬습니다. 당시 상하이 화둥정법대 졸업생의 취업률이 20% 아래로 떨어지고, 대부분 대학의 취업률도 30%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국 최고 명문대라고 하는 칭화대학조차 지난해 10월 기준 졸업생 8천여 명 가운데 62.6%만 취업했고, 이 중 정규직 취업자는 52.5%에 그쳤습니다. 유명 대학을 졸업한 석사, 박사 출신 학생들이 멀리 농촌지역 공무원 시험에 대거 응시하거나 음식 배달원이나 식당 종업원으로 취업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식 무용론' 확산하자 관영 매체까지 나서 "직업에 귀천 없다. 기대치를 낮추라"


취업난을 배경으로 하는 '공을기 문학'은 교육이 쓸모없다는 '지식·독서무용론'으로까지 번졌습니다.
 
"대학에 가지 않은 그들을 나는 비웃지 않았지만, 그들은 내가 대학에 가고도 좋은 직장을 찾지 못했다고 나를 비웃었다."
"남들 눈에는 쓸모없는 지식, 손이 닿지 않는 이상, 부끄러운 생활환경"
"만일 책을 읽지 않았다면 기꺼이 공장에 가서 나사를 조였을 텐데 '만일'이란 없죠."
"독서는 더 큰 세상을 보게 해 주지만, 세상이 내 손에는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깊은 무력감을 느낍니다."

정영태 취재파일
이런 자조적인 문구가 인기를 끌자 '직업에 귀천을 따지지 말고 기대치를 낮추라'거나 '직장을 선택하려 하기 전에 일단 어디든 취업부터 하라'는 기성세대들의 질타도 나왔습니다. 오죽하면 관영 매체들까지 나섰습니다. '공을기 문학' 현상 유행에 주목하면서 "자기 조롱은 감정 분출을 위한 것일 뿐"이라며 부정적 감정은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교육의 본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앞서 나갈 수 있고 역경에 직면해 극복할 수 있다"며 "독서와 교육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청년 조직인 공산주의 청년단(공청단)도 SNS계정을 통해 "젊은이들의 지혜와 땀을 통해 더 나은 삶을 만들 수 있다" 면서 "출근만 하면 무슨 일을 해도 높고 낮음의 구분이 없다"라고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정영태 취재파일

"개인의 문제로 돌리지 말라. 계층 이동 막힌 구조가 문제" 청년 세대의 반발


관영 매체들의 이런 비판에 청년 세대들은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있다"며 오히려 반발하는 양상입니다. "중앙 언론과 일반 대중의 인식 사이에 간극이 커지고 있다"라고 비판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문제를 제기한 사람을 해결해 버리는 것이 오랜 전통이냐?"고 반문합니다. "수많은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독서와 지식이 운명을 바꿀 거라는 아름다운 환상을 안겨준 것이 바로 관영 매체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습니다."사회 계층 간 이동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사람들이 계급과 계급으로 나뉘는 것이 공을기 문학 출현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며 "불공평한 분배 구조가 근본 원인"이라는 문제 제기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초 취업난에서 비롯된 '공을기 문학'이 경제 사회 구조의 문제점에 대한 근본적 비판으로까지 연결되는 모양새입니다.
 

"노력이 문제가 아냐…높은 교육비, 비싼 집값 같은 현실이 무기력할 뿐"


논란이 가열되는 와중에 중국 SNS 웨이보에 4백만 팬이 있는 유명 교육 콘텐츠 제작자 겅샹쑨이 청년 세대를 변호하고 나섰습니다. "공을기 문학이 인기를 얻은 근본적인 이유는 대학생들의 기대나 요구가 너무 많다거나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높은 교육비와 주택 가격 때문에 필요한 생활비 수준이 너무 높기 때문에 원하는 직업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것이 정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기성세대는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과 의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성세대의 성공 요인에는 가파른 경제 성장과 부동산 가격의 상승 같은 국가와 사회의 급속한 발전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소득 걱정, 집 걱정이 없는 기성세대는 요즘 젊은이들도 열심히 일하고 고난을 견디면 충분히 그들 세대와 같은 수확을 거둘 것이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일부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요즘 젊은이들이 정말 "까다롭고", "거만한" 것인가? 다만 현실이 너무 무기력할 뿐이다. 대졸자는 많아도 사회에 양질의 일자리가 적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비용은 갈수록 높아지고 압박감은 커지고 있다. 지금 청년 세대는 사회 전체와 그전 세대가 남긴 짐을 짊어지고 삶의 수렁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어떻게 기성세대가 그들에게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정영태 취재파일
"월급 5,000위안(한화 약 94만 원)+주말 휴일+노동법 준수+정상적인 노동 환경+ 35살 이전 퇴직 요구 없는 직장, 이런 요구 사항이 과연 지나친 것인가?"

겅 씨는 "지난 몇 년간 코로나19와 국내외 경제 환경, 경제 성장 둔화로 일자리가 줄었다. 대학의 커리큘럼과 교육 시스템이 시장 수요와 동떨어져 있고 직업 교육을 표방하는 중·고등직업학교도 교육의 질이 낮고 졸업 후 취업 여건이 좋지 않다. 무엇보다 국가는 경제발전을 우선시하면서 각 가정이 부담해야 하는 교육비를 낮춰 줘야 한다"라고 강조합니다.

한때 중국 청년 세대를 대표하던 1990년대 생들은 초고속 경제 성장기의 과실을 향유하며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 때론 지나친 국수주의로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세대인 200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가 겪고 있는 현실은 훨씬 더 팍팍합니다. 14억 대국의 인구 감소와 빨라지는 고령화, 경제성장 둔화는 물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진영의 대중국 압박과 탈 중국화 현상이 이들 앞에 놓인 새로운 환경입니다. '공을기 문학'이 상징하는 중국 청년 세대의 좌절과 무력감이 어떤 사회적 영향을 미치게 될 지 앞으로도 주의깊게 지켜보려고 합니다.

(사진 : 웨이보, 바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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