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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권리의식 이전에 권리가 없다

1990년생으로, 수도권 일반 인문계 남자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한 뒤 운 좋게 취직해 8년째 기자 일을 하고 있는 저는 위로부터는 'MZ세대'로, 아래로부터는 '젊은 꼰대'로, 뭇사람들로부터는 '삼대남' 등으로 호명되는 인구통계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엔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MZ 삼대남 동창 여럿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술기운에 기억이 흐릿해져가는 와중 비슷한 인구통계학적 특성의 한 친구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다들 그래도 나름 열심히 살았는데, 장가 가서 한 직장 다니는 놈이 한 놈뿐이네?"

"아, 그렇네"라는 말로 별 생각 없이 다음 대화를 이어갔던 것으로, 그때 이후의 장면은 기억 뒤편으로 사라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주 뒤, 월요병을 안고 출근해 바라보던 기자실 모니터의 한 뉴스가 그때의 기억을 문득 되살아나게 했습니다.
 
이정식/고용노동부 장관 (지난 6일)
요새 MZ세대들은 '부회장 나와라, 회장 나와라. 성과급이 무슨 근거로 이렇게 됐냐'라고 (할 정도로) 권리의식이 굉장히 뛰어나다. 적극적인 그 권리의식이 법을 실효성 있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MZ세대의 정신세계를 간명하게 정의한 뒤 정책 효과에 대한 밝은 전망을 내놓는 장관의 말. 문득 원망도, 아쉬움도, '회장 나오라'는 객기는 물론 권리의식도 그다지 없어 보이던 그 친구의 무덤덤한 표정이 기억 저편에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근데, 내 친구들은 52시간, 69시간에 해당이 되나?'
 

7,878,928과 3,356,727…더 이상 '사각지대'가 아니다

어떤 통계 수치의 무덤덤한 숫자들 사이에는 무덤덤하지 않은 현실이 내포돼 있습니다. SBS가 민주당 박용진 의원실을 통해 받은 통계청의 비임금 노동자 세부 통계자료가 그렇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어느 회사에도 소속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노동 제공을 대가로 임금을 받는, 이른바 '비임금 노동자'의 숫자가 2021년 기준 787만 8,928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대부분 프리랜서 혹은 특수고용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인데, 5년 동안 50% 폭증해 전체 경제생활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된 겁니다. 지난 주말 보도에서 저는 이들에 대해 '사각지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제는 '사각지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집단이 된 것 같습니다.
▶ '비임금 노동자' 800만 명 시대…사각지대 늘었다 (2023.03.12 8뉴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들이 영위하는 직종의 소득은 대부분 최저 소득에도 미치지 못하다는 겁니다. 때문에 먹고살 걱정이 없는 자산가이거나 많은 상속 재산이 있지 않는 이상, 이들 대부분은 여러 직업을 뛰어야 하는 이른바 'N잡러' 생활을 해야 하는 걸로 추정됩니다.

문제는 정치인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른바 MZ세대, 30대 이하 층에서도 비임금 노동자 숫자가 300만 명을 돌파했다는 겁니다. 직종당 소득이 최저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비임금 노동자 비율이 높아진 것은 어느 세대에서나 문제지만, 이제 막 경제생활의 첫발을 내딛은 미래 세대도 같은 처지라는 건 좀 다르게 느껴집니다. '시드 머니' 정도의 자산을 형성할 시간과 기회도 없었고, 국민연금 등 사회보장제도에 포섭돼 티끌만 한 노후 자금이라도 모을 기회가 없었던 세대들이기 때문입니다.

박용진 민주당 의원
박용진/민주당 의원
되게 소수일 거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번 통계로 우리가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이들이 인구적으로 매우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두 번째로 이 중에서도 어떤 분류에도 속하지 않는 자영업자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기존의 노동 체계, 기존의 직업군, 이렇게 해서 분류되지 않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이 '비임금 노동자'라고 통칭되는 프리랜서 자영업자 안에서도 절반에 육박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전에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고요. 이전의 법들, 특히나 70년 된 노동법 그리고 수십 년 된 사회보장제도로는 더 이상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나갈 수 없을 거라는, 아주 그냥 엄중한 현실을 이번 통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거죠.
 

권리의식 이전에 권리가 없다

나현우 청년유니온 사무처장
나현우/청년유니온 사무처장
저희 조합원인데 프리랜서인데 임금을 체불당했어요. 100만 원이 좀 안 되는 돈이었는데 얼마 안 되는 돈이죠. 근데 당장 생활하는 이 사람 입장에서는 한 달 월급이 한 100만 원 정도 안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엄청 큰일이잖아요.

근데 노동자는 노동청에 신고를 해서 진정을 넣어서 조치를 받을 수 있는데 이 사람은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그 보호를 못 받는 거예요. 할 수 있는 건 소송을 해야 되는데 100만 원도 안 되는 돈 받자고 소송을 해야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거죠.

전체 787만 8,928명, 30대 이하 청년층에서 335만 6,727명으로 나타나는 이들에게는 노동자로서의 권리의식 이전에 권리 자체가 없습니다. 노동시간 제한은 물론, 임금 체불 등의 일을 당해도 소송을 통해 자력 구제해야 합니다. 이들은 또한 잘 보이지 않습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이 감동받았다는 노동자 평균 연령 28살의 노조 없는 공장에도, 대통령이 "정치 운동에 이용당하지 말라"고 격려한 산업 현장에도, 그리고 이들을 비판하는 야당 정치인이 장시간 노동을 막아내겠다며 방문한 오피스에도 이들은 없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화면에 남겨야 할 '현장' 자체가 없는 데다, 이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조직화되지도 않아 목소리도 그리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전국대의원대회준비위원회 장철민 대변인 (사진=연합뉴스)

정치가 아예 논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국회에는 민주당 장철민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일하는 사람의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이 제출되어 있습니다. 법안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뿐만 아니라, 고용 관계 없이 사업자에게 노무를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비임금 노동자'까지 '일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법안은 또 서면 계약의 체결 및 교부, 부당 해지 제한, 육아휴직과 임산부 보호, 성희롱·직장 내 괴롭힘 금지, 직업 능력 개발 등 교육훈련 실시 등을 명시하는 한편, 일하는 사람 보호 지침 제정, 표준계약서 보급, 감독기관의 행정지도와 시정명령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들 노동계층을 법망 안으로 포섭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정쟁 속에서 이 법안도 여전히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1야당 민주당은 줄곧 '정부 여당은 노동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를 대지만, '검사독재 규탄' 발언 일색인 지도부의 공개 회의 발언에서 이 법안이 비중 있게 다뤄진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에어팟 낀 어떤 맑눈광의 우울한 미래

A 씨/20대 비임금 노동자
주말에 축가를 부르러 결혼식에 가고, 그리고 평일에는 디자인 작업을 하다가 아니면 사진을 찍으러 나가고. 요즘에 N잡 할 수 있는 플랫폼들이 많잖아요. 언제는 모델을 했다가 쇼호스트를 하기도 했다가 이런 상황이라서 사실 고용 형태라고 말할 수도 없이 생활 일상이 좀 불안한 상황이기는 하죠.

저같이 프리랜서로 거의 한 10년 정도 일을 하신 선배가 있어요. 근데 그분이 최근에 너무 심각한 질병을 발견하셔서 고생을 많이 하고 계시는데, '그동안 건강검진을 언제 했었냐'라고 물어보니까 '프리랜서로 활동하기 이전에 직장에 있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이렇게 말씀하신 거 보고 좀 많이 놀랐고, 제 미래도 비슷하게 흘러갈까라는 고민이 듭니다. 아무리 프리랜서라고 해도 돈을 100만 원 내고 건강검진을 매년 하기에는 힘들잖아요.

미디어는 현실을 표상합니다. 때로는 본질을 잘 잡아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가끔은 어떤 측면을 과대 표상하기도 합니다. 주중에는 즐거운 표정으로 N잡을 뛰다 일요일엔 즉석 짜장 요리사가 되어 즉석 짜장을 먹는 발랄한 MZ. 알바 면접 때 되레 사장을 면접 보다시피 하고, 중소기업에 들어와 일할 땐 "업무 능률이 올라가거든요"라며 에어팟을 끼는 맑은 눈의 MZ. 이들에 대한 패러디 컨텐츠가 인기를 끄는 건 분명 그 콘텐츠가 본질의 한 측면을 잘 잡아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유튜브에서 접한 이들을 수십 년의 세월을 한데 퉁쳐 MZ로 정의한 뒤, '회장님 나와라, 사장님 나와라' 하는 존재로 가공해 정책 결정의 근거로 써서는 곤란합니다.

노동 개혁과 미래 세대를 이야기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는 분들을 비꼬고자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제 MZ세대의 여론을 경청했다며, 이른바 '69시간 노동정책'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어찌 됐든 여론을 듣고 정책 추진에 반영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노조에 가입할 수 있는 청년은 극소수고, 비임금 노동자는 폭증해 제도 밖 노동은 이제 '예외'가 아니게 된 상황 속, 정규 임금 노동자와 노조 개혁을 중심에 두는 노동정책은 자칫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듭니다.

MZ세대의 맑은 눈을 보며 '알다가도 모를 것들'이라는 자리를 물려준 X세대처럼, 저를 포함한 주변의 '맑은 (혹은 탁한) 눈의 광인'들도 20년쯤 뒤에는 퇴물 취급을 받고 혀를 끌끌 차며 요즘 것들을 탓하게 될 겁니다. 고대 점토판에도 "요즘 것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취지의 말들이 새겨져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다만, 과거와는 달리 국민연금제도에서도, 건강보험제도에서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채 청춘을 보낸 수백만의 이들이 중장년이 되어 세대 갈등의 당사자가 된다면 그 양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살벌한 사회 갈등을 치러내며, 세대 갈등이 회사 흡연장 뒷담화나 예능 패러디 정도에서 멈췄던 오늘을 그리워할 날이 오지 않기를. MZ세대로 불리는 30대 남성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봅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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