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 참담한 현실…마운드에 올릴 투수가 없다

전통적으로 한일전에서 '일본 킬러'로 명성을 떨친 건 왼손 투수였습니다.

좌타자가 다수 포진한 일본 타선을 상대하는 데는 왼손 투수가 효과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구대성, 봉중근, 김광현 등 일본전에 강한 '일본 킬러' 임무는 왼손 투수들이 맡아왔습니다.

그러나 한국 야구가 운명을 걸고 임한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일본전 승부처에서 왼손 투수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일본 좌타자들에게 줄줄이 두들겨 맞는데도 바꿔 줄 투수가 없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참담한 한국 야구의 현주소를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한국은 오늘(10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WBC 일본전에서 4대 13으로 졌습니다.

전날 호주전에 믿었던 투수들이 줄줄이 장타를 헌납하고 7대 8, 쓰디쓴 패배의 잔을 들이켰던 한국 야구는 이틀 연속 마운드가 무너져 내리는 걸 지켜봐야 했습니다.

선발로 나선 김광현(SSG 랜더스)은 1회와 2회 혼신의 힘을 다해 일본 타선을 틀어막았습니다.

1회 오타니 쇼헤이를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2회에는 3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습니다.

그러나 3대 0으로 앞서던 3회 일본 8, 9번 타자인 겐다 소스케와 나카무라 유헤이에게 연달아 볼넷을 내주며 힘이 빠진 모습이 역력해도 한국 벤치는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김광현보다 힘 있는 투수가 불펜에 아무도 없어서였습니다.

한국 벤치는 김광현과 1번 타자 라스 눗바의 대결을 지켜봤지만, 김광현은 눗바에게 1타점 적시타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곤도 겐스케에게까지 1타점 2루타를 허용하고 2대 3으로 점수 차가 좁혀진 뒤에야 무사 2, 3루에서 김광현을 내리고 원태인(삼성 라이온즈)을 넣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투수 교체 타이밍이 늦었지만, 마운드 사정을 고려하면 무턱대고 투수를 바꿀 수 없는 고충도 있습니다.

결국 원태인은 김광현이 남긴 주자를 모두 홈에 들여보내 3대 4로 역전을 허용하고서야 3회를 마쳤습니다.

원태인은 4회까지 무실점으로 버텼고, 덕분에 한국은 1점 차를 유지한 채 경기 중반에 접어들었습니다.

원태인이 혼신의 힘을 다해 2이닝을 막았으면 빠르게 투수를 바꿔야 하는 게 정석적인 포석입니다.

하지만 원태인은 5회에도 그대로 마운드에 올랐고, 곤도에게 솔로포를 내준 뒤에야 우완 곽빈에게 배턴을 넘겼습니다.

곽빈은 오타니에게 2루타, 요시다에게 희생 플라이를 맞고 3대 6으로 점수가 벌어진 뒤 마운드를 내려갔습니다.

이번에도 한국 마운드에 올라온 건 왼손잡이가 아닌 오른손 투수 정철원이었습니다.

이강철호는 이번 대표팀에 김광현과 양현종, 이의리(이상 KIA 타이거즈), 김윤식(LG 트윈스), 구창모(NC 다이노스)까지 5명의 좌완 투수를 선발했습니다.

문제는 애리조나 투손 캠프에서 이상 기후로 추운 날씨가 이어져 전반적으로 투수들의 컨디션이 정상적으로 올라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특히 대표팀 좌완 자원인 구창모와 이의리, 김윤식의 컨디션이 더디게 올라온 게 치명타가 됐습니다.

마운드가 무너지던 와중에도 김원중(롯데 자이언츠)과 정우영(LG) 등 오른손 투수만 올리던 대표팀은 점수가 4대 11로 크게 벌어진 7회에야 좌완 구창모와 이의리를 줄줄이 투입했습니다.

구창모는 아웃 카운트 하나만 잡고 안타 2개를 맞았고, 이의리도 제구 난조를 그대로 노출하며 볼넷 3개를 헌납했습니다.

안 그래도 부족한 마운드 전력에 믿었던 소방수 고우석(LG)이 대회 개막 직전 부상으로 이탈한 것도 이강철호에는 악재로 돌아갔습니다.

6일 오릭스 버펄로스와 평가전 경기 도중 마운드를 내려갔던 고우석은 처음엔 목덜미에 가벼운 근육통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호주와 일본전 모두 경기 명단에서 빠졌습니다.

고우석이 있었다면 마운드를 운용할 때 9회를 계산에서 지웠겠지만, 그럴 수 없는 처지라 투수 교체가 한 박자씩 늦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대회부터 적용한 투수의 '최소 3타자 상대' 규정에 맞춰 선발 투수를 대거 발탁한 것도 독이 됐습니다.

대표팀 15명의 투수 가운데 전문 불펜 투수는 고우석과 김원중, 이용찬(NC), 정우영(LG), 정철원(두산)까지 5명뿐이고, 특히 좌완 투수 5명은 모두 선발 요원입니다.

불펜에서 대기하다가 마운드에 오르는 게 어색한 선발 투수들은 WBC 마운드의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모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