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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다른 사람이 대신 주면 나는 뭐가 되겠나" 일본만 쏙 빠진 피해 배상, 쟁점은?

[취재파일] "다른 사람이 대신 주면 나는 뭐가 되겠나" 일본만 쏙 빠진 피해 배상, 쟁점은?
"그때는 근로정신대가 뭔지도 몰랐다. 결혼해서도 하루도 편한 날이 없이 남편의 구박을 들었고, 시장에 나가면 사람들이 몇 놈이나 상대했냐고 놀렸다. 그동안 흘린 눈물이 배 한 척 띄우고도 남았을텐데 돈 때문이라면 진작 포기했다. 일본에서 사죄 받기 전에는 죽어도 죽지 못하겠다. 다른 사람이 대신 주면 나는 무엇이 되겠는가. 나를 얼마나 무시하겠는가" (양금덕 할머니,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 지난해 9월 자신을 찾아온 박진 외교부 장관에게 전달한 편지 내용입니다. 양금덕 할머니가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에 끌려간 건 1944년, 불과 13살 때였습니다. 교사가 꿈이었던 소녀는 일본에 가면 중학교도 보내주고 공부도 시켜준다는 일본인 교장 말에 속아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중학교가 아닌 나고야의 미쓰비시 공장. 매일 하루 10시간 넘게 비행기 부품을 녹을 닦고 페인트 칠하는 중노동을 하다 오른쪽 눈과 후각까지 잃었습니다. 해방 뒤 가까스로 고향 나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임금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고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일본에 다녀온 여자'라는 말이 양금덕 할머니를 옭아맸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로 오인 받아 조롱 당하기 일쑤였고, 결혼하고 나서도 가정 불화에 시달려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일본의 사죄 한마디 듣겠다며 31년을 싸워온 양금덕 할머니. 그제(6일) 정부의 강제동원 피해 배상 해법 발표를 담담한 표정으로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일본 기업 대신 한국 기업이 조성한 재원으로 배상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공식 발표되자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습니다. "잘못한 사람한테 받아야지 동냥해서는 안 받겠다"고 말입니다. 정부 발표 직후 양 할머니를 비롯한 일부 피해자들은 가해자인 일본 전범 기업이 아닌 우리 기업과 정부의 돈을 받는 건 동의할 수 없다며 추가 소송을 예고한 상태입니다. 지난 2018년 일본 전범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명확한 대법원 판단으로 일단락된 줄 알았던 문제였는데 말이죠. 정부 발표가 오히려 새로운 법적 다툼의 불씨가 된 셈입니다.
 

잘못한 사람한테 받아야겠다는데 제3자가 변제?"

 
강제동원 피해자 반발

우선 정부와 피해자 대리인 측은 '피해자 동의 없이 과연 제3자인 국내 재단이 일본 전범 기업의 채무를 대신 변제해줄 수 있느냐'를 두고 의견을 완전히 달리하고 있습니다. 민법 496조에 따르면 당사자의 '의사표시'가 없으면 제3자가 채무를 대신 갚아줄 수 없고, '제3자'는 채무자와 '법률상 이해관계'에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기존 판례들을 살펴보면, 배상하지 않고 버티는 채무자 때문에 자신까지 법적 문제가 생기게 된 사람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같은 민법 조항을 근거로 피해자 대리인단 측은 정부의 '제3자 변제' 해법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우리 기업은 애초에 대신 채무를 변제해줘야 할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고, 피해자들도 '가해 기업이 주지 않는다면 내 채권에 대한 변제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는 마당에 왜 자꾸 대리 변제를 운운하냐는 겁니다.

반면 외교부는 "법률적 가능성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국내 유수의 전문가들의 검토와 자문을 다 거쳤다"면서 '제3자 변제'가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다는 입장입니다. 공식적으로 법적 근거를 밝히진 않았는데요. 판결에 따른 배상금은 '법정 채권'에 해당돼 사인 간의 '약정 채권'과는 성격이 달라 민법에 구애 받지 않고 제3자 변제를 할 수 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채무자인 일본 전범 기업이 돈을 출연한다면 재단을 '제3자'로 볼 여지가 생길 수 있다는 해석도 있긴 합니다. 재단이 채무자인 일본 전범 기업과 병존적으로 채무를 부담하는 내용으로 채무를 인수한 뒤 변제하는 '병존적 채무인수' 방식도 각종 토론회 등에서 거론된 적 있는데요. 강제동원 피해 배상 채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전범 기업이 그 채무를 전제로 한 채무 인수에 동의할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결국 법원이 재단과 재단이 준 돈의 성격이 무엇인지와 같은 양측의 논리도 새롭게 따져봐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 피해자들이 제3자인 재단 돈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 의사를 밝힌 이상 추가 소송이 불거질 가능성은 커졌습니다. 재단 측에서 소송을 마무리하기 위해 일본 전범 기업이 내야 할 배상금을 법원에 일방적으로 맡기는, 이른바 '공탁'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탁'이란 채권자가 돈을 받길 거부할 때 법원 공탁소에 돈을 맡겨 빚을 처리하는 절차를 의미합니다. 외교부 고위관계자는 "피해자들이 끝까지 판결금을 수령하지 않는 경우 공탁이 가능한 걸로 안다"고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피해자 대리인단 측은 정부와 재단이 공탁 절차를 강행할 경우 '무효 소송'으로 맞서겠다는 입장입니다. 이럴 경우 강제동원 배상 문제에서 일본 전범 기업은 쏙 빠지고, 우리끼리의 지난한 소송전으로 비화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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