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정순신 사태에 "안타깝다"는 경찰청장의 리더십

[취재파일] 정순신 사태에 "안타깝다"는 경찰청장의 리더십

"제가 추천권자로서 일련의 상황에 대해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정순신 사태'가 벌어진 후, 정순신 변호사를 3만 수사 경찰의 수장인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추천했던 윤희근 경찰청장이 내어 놓은 입장은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윤 청장의 이 발언이 무책임하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추천권자'라는 자격과 '안타깝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자격을 앞세울 때는 관찰자가 아닌 주로 관계자(관련자) 일 때다. 관찰자 일 때는 상황에 대한 평가나 감정을 이야기하지만, 관계자 일 때는 상황에 대한 책임을 이야기한다. '추천권자' 임에도 남의 일 말하는 듯한 '안타깝다'는 윤 청장의 발언이 어색하고 무책임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런데 한편으로 '안타깝다'는 윤 청장의 발언은 현재 자신의 상황에 대한 솔직한 반응일 수도 있다. 정순신 변호사에 대한 추천과 검증, 임명과 일명 철회까지의 일련의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과 입지를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 '안타깝다'이었을 수 있다는 의미다. 추천권자이지만 진정한 추천권자는 아닌, 관계자이어야 하지만 주변인에 머물렀던 곤궁한 상황이 '안타깝다'는 말로 대표되는 현재의 윤 청장 입지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형식적인 제청권과 추천권…정부 고위직 인사의 관행


현행법에 따르면 총경 이상의 경찰공무원은 '경찰청장의 추천을 받아 행정안전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이 임용한다'. 치안정감인 국가수사본부장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인사 과정에서 경찰청장은 추천권, 행정안전부 장관은 제청권, 대통령은 임용권(최종 인사권)으로 권한이 명확히 구분되는 듯하지만, 현실은 물론 그렇지 않다. 대통령(실)이 임명대상자를 미리 선정하고, 행정안전부 장관과 경찰청장은 이에 맞춰서 형식적인 제청과 추천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경우 대통령(실) 마음속에 있는 정답을 제청·추천권자가 찾아가는 형태로 이뤄진다.

때문에 국가수사본부장 추천 과정에서 "대통령실과 사전 의견 교환이 있었다"는 윤희근 경찰청장의 국회 정보위원회 발언에 일부 언론과 사람들이 크게 주목하고 있는 건 현실에 무지하거나 솔직하지 못한 반응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 못지않게 대통령실로 권한이 집중되고 있는 윤석열 정부다. 가장 가까이서 일하는 국무조정실장, 특히 최측근 참모인 국무총리 비서실장에 대한 인사권을 국무총리에게 보장한다는 불문율도 지켜지지 않고 있는 현 정부 아닌가. 하물며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그 어느 때보다 강화된 경찰 수사권 행사 책임자 임명에 대통령(실)이 추천과 제청만 기다리며 손을 놓고 있었을까.
 

이태원 참사 등으로 더욱 곤궁해진 경찰청장의 입지

윤희근 경찰청장 (사진=연합뉴스)

이런 관행과 환경 속에서도 제청·추천권이 실질적으로 행사될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는 대통령이 그 권한을 보장할 줄 때지만, 제청·추천권자의 내·외부 입지 등을 감안할 때 그 권한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다. 소위 말발이 먹히는 경우인데, 윤 청장의 경우는 어떨까. 서울 시내 한 복판에서 15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 발생을 대통령보다 늦게 인지한 게 윤 청장이다. 행정안전부 내 경찰국 신설 과정에서 손상된 내·외부 리더십에다 두고두고 정권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이태원 참사까지 더해지면서 내각에서의 입지가 그 어느 때보다 좁아진 게 윤 청장의 현장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윤 청장이 인사와 관련해 적극적으로 의견 개진을 할 수 있었을까. 답하기 어렵지 않은 질문이다.

하지만, 발언권은 저절로 커지지 않는다. 인사권자와 개인적 친분이 있어 개별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발언권은 스스로 키워서 쟁취해야 한다. 건설노조에 대한 집중 수사로 정부 시책에 부응하는 것 만으로는 입지가 단단해지지 않는다. 특히 잘해야 본전인 치안의 총책임자의 경우, 업무를 통해 성과를 내는 것 못지않게 내부에서의 단단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외부에 대한 발언권을 키우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정순신 사태에 대해 "안타깝다"는 윤 청장의 발언은 경찰 내부에서의 자신의 리더십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됐을까.
 

"안타깝다"는 경찰청장의 입장 발표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됐을까


어떤 회사 내부에서 직원의 부주의 내지 일탈로 인한 문제가 생겼다고 가정해 보자. 이와 관련해 국민들의 분노와 비판이 큰 상황이다. 이럴 경우 대표는 국민들께 사과해야 한다. 내부 직원의 부주의나 일탈을 통제해야 할 책임이 대표에게 있다는 논리적 이유뿐만 아니라 그래야만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문제를 빨리 해결할 수 있다는 현실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대표가 "특정 직원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입장을 냈다면 국민들의 분노는 더 커지고 책임 전가한다는 비판만 더 커지지 않을까.

정순신 변호사의 낙마 이후 대통령실은 검증 실패의 책임을 사실상 정 변호사와 경찰에 돌리고 있다. 정 변호사 '가족 관련 행정 소송이 있냐'는 사전 질문서에 솔직하게 답해서 자녀의 학교 폭력 관련 소송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고, 소위 세평 조사를 한 경찰 정보국도 관련 사실을 걸러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종 인사권과 검증권이 대통령(실)에 있지만, 대통령실 대변인은 남의 일 이야기하듯 "아쉬운 점이 많다"고 밝히기도 했다.

대통령실의 입장 표명은 이것대로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와 별개로 대통령실이 사실상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안타깝다"는 윤희근 경찰청장의 입장 표명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됐을까. 향후 자신과 조직의 입지를 다지는데 플러스가 됐을까 마이너스가 됐을까. 대통령실이 사실상 경찰의 세평 조사에 정순신 사태의 책임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 3인칭 관찰자적 시점으로 "안타깝다"고 말하면, 경찰 정보국으로 책임이 전가되지 않을까. "안타깝다"는 윤 청장의 입장이 경찰의 세평 조사를 향해 있는 것이라면, 내부적으로 말했으면 되었을 일이다.
 

"후임은 재공모하게 될 것"…다시 시험대에 선 경찰청장의 리더십

경찰 국가수사본부 (사진=연합뉴스)

향후 윤 청장이 경찰 내부에서 리더십을 다시 회복하느냐, 그걸 통해 외부에 대한 발언권을 다질 수 있느냐는 역설적으로 향후 국가수사본부장 인선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정순신 변호사 낙마 직후부터 대통령실을 중심으로 "후임은 재공모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지만, 윤 청장은 오늘(6일) 기자 간담회에서 재공모 여부에 대해서도 말을 아끼며 "조만간 말씀드릴 수 있지 않겠나"고만 답했다. 후임 국가수사본부장 인선 역시 윤 청장의 추천권은 형식화되고 대통령실이 주도하는 듯 한 분위기다.

인사권이 대통령에게 있는 이상 제약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합당하고 분명한 제시를 주저하면서 대통령 의중에 있는 정답 맞추기에 집중한다면 '추천권'은 법률상 장식품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 결과는 윤 청장의 리더십 손상과 경찰 내 혼란, 이로 인한 국민의 피해다.

'경찰청장은 치안 사무의 총괄 책임자로, 인사권은 책임감 있는 역할 수행 및 구성원 지휘·통솔을 위한 필수적 권한이라 생각한다', '경찰이 흔들림 없이 본연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오직 국민만을 위해 공정하고 당당하게 법을 집행할 수 있게 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것이 경창철장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윤희근 경찰청장이 국회 인사청문회 서면 답변서를 통해 밝힌 입장이다. 윤 청장은 후임 국가수사본부장 인선 과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추천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을까. 오직 국민만을 위한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외관으로나마 추천권이 형해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인사권이 없다고 해도 법률상 주어진 '추천권'이나마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윤 청장이 서면 답변에서 밝힌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방법이 아닐까. 인사와 관련한 경찰 내·외부의 불필요한 잡음으로 가뜩이나 힘들고 바쁜 국민들의 에너지가 다시 소모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사진=연합뉴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