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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록키, 올리 마키, 카운트의 인생 경기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65

[씨네멘터리] 록키, 올리 마키, 카운트의 인생 경기
   20년 훌쩍 넘게 사회인 야구를 하고 있는 내 인생의 스포츠는 아무래도 야구지만, 소년기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스포츠는 뭐니 뭐니 해도 권투다. 글자 그대로 맨주먹과 몸뚱이 하나로 부와 명예를 향해 돌진하는 세계. 조인식에서 이글거리는 눈빛을 교환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저울에 올라 계체량을 통과한 뒤, 사각의 링에 오른 두 선수의 비장한 표정에는 다른 스포츠가 넘보기 힘든 아우라가 있었다.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말고 세계권투평의회)나 WBA 타이틀 매치가 미국의 사막 도시에서 열릴 때면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여기는 라스베이거스 특설링입니다”라는 권투 캐스터 특유의 리드멘트가 TV에서 흘러나왔고, 이 말을 들을 때면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나 지금이나 화끈한 하드펀처가 인기가 높지만 나는 테크니션을 더 깊이 좋아했다. 

공이 울리면 가슴을 졸이면서 김태식, 김성준, 김철호, 김상현, 박찬희, 장정구, 유명우, 김득구, 황충재, 박종팔 등의 경기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당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인 슈거레이 레너드, 마빈 해글러, 로베르토 듀란, 토머스 헌즈, 일명 F4의 경기도 TV 생중계로 지켜볼 수 있었다. 프로 권투가 당대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관중과 시청자가 지켜보는 앞에서 맨주먹으로 싸우는 그 투명한 승부의 세계에도 부당 거래와 부정 판정, 협잡이 없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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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베스터 스탤론은 위대한 배우일까? 각자 판단하기 나름일 테다. 하지만 “록키(1976)”는 위대한 권투 영화임에 틀림없다. 영화 역사를 대표할만한 달리기 씬과 최초로 스테디캠을 사용한 필라델피아 미술관 계단씬, 무명의 작곡가 빌 콘티를 일약 스타 작곡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주제가 ‘Gonna fly now’는 “록키”를 불멸의 영화로 만든다. 

실베스터 스탤론은 그래서 이 한 편 만으로도 충분히 영화사에 남을만한 배우다. 그는 “록키”의 주인공 록키 발보아가 그랬듯이 하류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본을 쓰고 천신만고 끝에 주연을 맡아 인생 역전을 이뤘다. “록키”는 49회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편집상을 받았다. “록키”가 지금 봐도 감동적인 건 안면 신경마비로 발성조차 제대로 못하던 무명의 배우였던 실베스터 스탤론, 바로 자신의 이야기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무적의 헤비급 세계 챔피언 아폴로와 경기를 앞둔 무명의 복서 록키는 여자 친구인 아드리안에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아드리안, 나는 이 경기를 져도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건 끝까지 가는 거야. 
아폴로 크리드와 싸워서 끝까지 가본 선수는 없어. 
마지막 공이 울릴 때까지 내가 링 위에 서 있을 수 있다면, 
나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가 그저 그런 건달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록키는 그리 된다. 록키 발보아는 끝내 패배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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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헌은 끝내 이겼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었다. 

대한민국의 올림픽 권투 종목 마지막 금메달리스트. 박시헌은 88년 서울 올림픽 대회 마지막 날 복싱 라이트 미들급 결승에서 미국의 로이 존스 주니어를 판정으로 꺾고 금메달을 땄다. 이로써 한국은 서독을 제치고 종합 4위라는 믿기 힘든 성적으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로이 존스 주니어는 나중에 프로로 전향해 4체급을 석권하는 강타자였다. 경기는 한 차례 스탠딩 다운까지 뺏은 로이 존스 주니어의 승리로 보였다. 하지만 부심들의 판정을 집계한 주심은 박시헌의 손을 들어 올렸다. 박시헌 본인조차 맘 놓고 환희의 순간을 만끽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금메달이 확정된 순간 박시헌 선수의 표정 /올림픽채널 '다시보는 서울올림픽'
당시의 ‘국뽕’은 요즘 정도는 저리 가라 할만한 분위기였지만, 이 판정에 대한 국민의 비난만큼은 거셌다. ‘나라 망신’, ‘창피하다’는 비난이 대부분이었다. 편파 판정의 배경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말이 많지만, 로이 존스 주니어의 제소에 1997년 IOC가 ‘심판 매수는 없었다’라고 발표한 것이 공식적인 최종 결론이다. 

하지만 결론이야 어떻든 간에 당시의 비난 여론은 겨우 23살의 박시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박시헌은 그 충격으로 프로 전향은커녕 결국 은퇴하면서 사람들의 시야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바로 거기서 영화 “카운트”가 시작한다.
 
“그기 그냥 은메달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노…”

영화 “카운트”에서는 진선규 배우가 박시헌 선수를 모델로 한 체육 교사 시헌 역을 맡았다. 진해 출신 배우 진선규의 첫 단독 주연작인 이 영화는 은퇴한 박시헌 선수가 모교인 진해중앙고 체육교사로 부임한 뒤의 이야기다. 

말썽쟁이 학생들을 복싱부로 데려와 이들과 함께 권투라는 승부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는 시헌의 이야기를 그렸다. 올림픽 트라우마 때문에 자기가 가르치는 선수가 편파 판정으로 지더라도 제대로 항의도 못하는 처지의 시헌은 주변의 비아냥을 이겨내고 학생들과 함께 끝내 정신적 상처를 극복해 낸다. 그가 학생들에게 해주는 말은 사실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다. 
 
복싱이라는 게 다운됐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다시 일어나라고 카운트를 10초씩이나 주거든. 
네가 너무 고되고 힘들면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있어라. 
숨이 좀 돌아오면 그때 다시 일어나 싸우면 된다. 

실제로 박시헌 선수는 2001년 복싱 대표팀 코치가 됐고 2016년 리우올림픽 복싱팀 총감독을 지낸 뒤 지금은 서귀포시청 감독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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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한국에서 뒤늦게 개봉했던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2016년 작. 69회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대상)”은 “록키”와도 다르고 “카운트”와도 결이 다른 독특한 이야기의 권투 영화다. 

핀란드의 복싱 선수 ‘코콜라의 제빵사’ 올리 마키는 미국의 강력한 페더급 챔피언인 데이빗 무어와 핀란드 역사상 첫 세계 타이틀 매치를 앞두고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동네 친구 라이야와 사랑에 빠진다. 게다가 연습까지 따라다니는 매스미디어의 지나친 관심도 영 부담스럽기만 하다. 

애가 타는 코치에게 올리는 상대 선수에 대해 “지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상대”라고 말하는가 하면 “싸워보면 결과가 나오겠죠”하고 뜨뜻미지근하게 나온다. 올리는 숲을 달리며 연습하다가 나무에 걸린 연을 발견하고는 이를 빼내 날리며 즐거워하는 소년 같은 심성의 복서다. 그렇다고 그가 연습이나 시합 준비를 게을리하는 것도 아니다.

계체량에 나서는 올리 마키 / 디오시네마
권투 영화는 보통 주인공이 끝까지 싸워 이기거나, 록키처럼 얻어터지더라도 버티기라도 하는데 올리는 겨우 2회전에서 형편없이 나가 떨어진다. 하지만 올리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경기를 마친 뒤 툴툴 털고 일어나 자신의 연인과 함께 행복하고 소박한 산책길에 나서 물수제비를 뜬다. 한치의 실망이나 아쉬움도 없다. 그는 적어도 핀란드에서는 뛰어난 복서였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라이야의 사랑으로 족하다. 라이야도 올리에게 말한다. 
 
올리: 지면 어떡해? 사람들이 실망하고 너도 실망하면?
라이야: 기대한 것도 없는데 뭘 실망하겠어? 실망했다는 사람은 헛된 기대 때문이니까 올리, 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어.

우리는 자신의 일에 매진하고 최선의 결과를 기대한다. 그런데 사실 그뿐이다. 진정한 프로는 직업과 자신을 동일시 하지 않는다. 올리 마키야말로 진정한 프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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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키”, ”올리 마키...”, “카운트” 세 편 모두 결국 인생 이야기다. 인생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묻고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록키 프랜차이즈의 6번째 영화이자 마지막 편인 “록키 발보아(2006)”에서 록키는 아들에게 말한다. 인생만큼 강한 펀치는 없다고. 얼마나 세게 때리느냐가 아니라, 세게 맞고도 계속 전진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라고. "카운트"는 나락으로 떨어진 인간이 어떻게 다시 일어서느냐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은 인생은 그렇게 대단한 것 만은 아니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살고 사랑하라는 이야기다.

영화 "카운트" 메인포스터 / CJENM

실화를 바탕으로 한 로그라인은 그 어느 이야기보다 극적인데 “카운트”의 영화적 만듦새는 다소 아쉽다. 드라마와 코미디 사이에서 종종 길을 잃는 느낌이다. 그런 난감함이 포스터와 제목에서도 느껴진다. 이 포스터는 종종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길을 잘못 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관계자들의 고뇌가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지만, 경기 중에 느닷없이 세컨드에서 날아온 흰 타월 같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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