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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국보 첨성대 앞 땅주인이 '일본인'? 추적해봤더니

일본식 이름 땅주인이 가진 5만 필지

스프 마부작침 이미지 수정
武本如云 '무본여운'

제 이름인 '배여운'을 일제강점기 당시처럼 창씨(創氏), 즉 성을 바꾸면 위의 네 글자 한자어로 표현될 겁니다. "다케모토(たけもと) 상"으로 불렸겠고요.

아마도 일제강점기를 거친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는 실제로 '무본(武本)'이라고 창씨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일제가 패망하고 다음 해인 1946년부터 미 군정이 내린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을 통해서 창씨 전의 성과 이름을 되찾을 수 있게 됐습니다.

다행히 대다수 조선인들이 본인의 성과 이름을 되찾았죠. 하지만 한 가지 놓친 게 있었습니다. 바로 토지대장에 적힌 일본식 잔재, 일본식 이름 일부는 바꾸지 못한 거죠.

그 결과 아직도 수만 건의 토지대장에는 일본식 이름, 네 글자 한자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당시 제가 땅을 가졌었다면 토지대장에는 한글 이름인 '배여운'이 아닌 '무본여운(武本如云)'으로 남았겠죠.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전국 3,946만 7,980필지의 토지대장을 전수 분석했습니다. 분석 결과, 해방 이후(1945. 8.15.) 소유권 이전이 없는 일본인 혹은 일본식 이름을 가진 조선인 필지 5만 2,787건을 확인했습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8년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정부의 공식 문서인 토지대장에는 창씨개명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요? 이런 일제의 잔재를 못 지우는 걸까요? 안 지우는 걸까요? 또다른 문제는 뭐가 있을까요?

그 궁금증을 해결해 보기 위해서 먼저, 국보 제31호 첨성대가 있는 경주를 찾았습니다.
 

국보 첨성대 주변을 둘러싼 땅의 주인은

 
스프 마부작침 이미지 (사진=연합뉴스) 
첨성대를 둘러싸고 있는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819번지 일대는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대 토지대장을 분석해 보니 인왕동 819-2, 819-4, 819-5, 819-9, 819-12번지 등 5필지 소유자는 정부도 경주시도 아니었습니다.
 
스프 마부작침 이미지 (사진=연합뉴스) 
놀랍게도 토지대장상 땅 주인은 창씨개명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인 '복천실건(福川實巾)'입니다. 이 땅은 1941년 2월 11일 이후로 소유권 거래가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복천실건 소유의 땅들이 첨성대를 둘러싼 관람로 한가운데 박혀있다 보니 관람객들은 이 땅을 밟고 국보를 감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 이 사실을 모른 채 우리 문화재를 일본식 이름 명의의 땅에서 관람하고 있었던 거죠.

충남 천안에서 온 이병권 씨는 "오늘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됐는데 알고 보니까 조금 억울한 것도 있고 다시 꼭 우리나라가 되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데이터로 보니 문화재, 학교, 절 등등에…'일본식 이름' 흔적들

 
스프 마부작침 이미지 (사진=연합뉴스) 
인천의 한 공립 고등학교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 638-1번지는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본관과 운동장 일부를 포함하는 넓은 부지입니다.

공립학교로 설립됐기 때문에 토지대장상 땅 소유자는 당연히 인천광역시와 교육감이겠죠? 하지만 놀랍게도 땅 주인이 한 명 더 토지대장에 남아 있습니다. 창씨개명한 조선인으로 추정되는 '출정영칠(出井多七)' 입니다. (토지대장에는 출정영칠이라고 나오지만 전문가들은 출정다칠이 맞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스프 마부작침 이미지 (사진=연합뉴스) 
이런 땅들이 전국에 얼마나 많은 걸까요? 토지대장 데이터를 전수 분석해 보니 토지 소유자가 일본식 이름으로 된 땅은 전국에 5만 2787필지로 나타났습니다.

이 땅들 가운데 83.4%의 소유권 변동일은 조선총독부가 창씨개명을 강요한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집중돼 있었습니다. 5만 건이 넘는 땅 상당수의 소유자가 창씨개명한 조선인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마부작침 창씨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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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시도별로 일본식 이름 명의 토지 비율을 보면 전남이 14.9%로 가장 많고 경북 14.8%, 경기 13% 순이었습니다. 주로 지방에 이런 땅들이 많죠? 서울을 비롯한 광역시는 도심이 개발되면서 이런 토지 대부분의 정리가 적극적으로 됐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런 땅들이 왜 문제일까?

문제는 아직도 국유화 가능한 땅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정부는 해방 이후 일본인 명의 토지 조사를 완벽하게 끝내지 못했습니다. 일본인 소유로 확인되면 적산으로 간주해 그 땅을 정부에서 환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네 글자 일본식 이름의 소유자가 일본인인지 아니면 창씨개명한 조선인인지 구분이 돼야 하는데 그걸 못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아직도 환수 가능한 땅이 남아있다는 뜻이죠.
 
스프 마부작침 이미지 (사진=연합뉴스) 
홍경선 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전문위원은 "전국에 남은 일본인 명의 땅 가운데 실제로 창씨개명한 조선인 땅이 아니라 일본인이 땅 주인이면 적산(敵産) 재산으로 간주해 국가가 귀속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즉, 국가의 재산이 될 수 있는데 이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란 거죠. 실제로 과거에 이런 땅들을 20년 넘게 점유해 개인 재산으로 소유권을 이전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이런 땅들은 제대로 되찾지 못하면 해당 토지에 대해 세금 부과부터 개발 등 토지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합니다. 지자체는 토지 소유자에게 세금을 부과하게 되는데 이 같은 땅들은 소유자가 없으니 세금 부과를 못하게 됩니다. 현재 이이 땅 5만여 필지의 공시지가를 합치면 3천억 원이 넘습니다. 지금이라도 일본인 명의 토지를 조사해서 제대로 세금을 부과해야 토지 행정이 올바르게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조미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제로부터 해방한 지 78년이 흘렀지만 독립된 국가로서 토지 주권을 확립하지 못했다는 점 자체가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라고 지적했습니다.
 

아무도 관심 없는 '창씨개명' 토지, 환수의 사각지대

과거 정부는 창씨개명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조상땅 찾기'와 네 차례 부동산특별조치법을 시행했습니다. 이를 통해 후손들이 조상의 땅을 되찾고 소유권 이전 및 회복을 통해 토지대장에서 일본식 이름을 없앨 수가 있었습니다.

조달청은 현재 국토부 등 관계 부처와 합동으로 창씨개명 등 일본식 이름이 공적지적장부에 기재된 재산 10만여 건에 대해 합동으로 정비 사업을 추진하고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창씨개명의 흔적을 남김없이 지울 수 있을까요? 여기 한 가지 사각지대가 존재합니다.

첨성대 앞 5필지로 예를 들어보면요. 땅 주인인 복천실건 혹은 후손이 복천실건의 후손이란 걸 증명하면 조상땅찾기 행정 서비스를 통해 땅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주인이 나타나지 않다면요? 앞으로 계속 토지대장과 등기부에는 일본식 이름이 청산되지 못하고 계속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창씨개명 조선인이 소유자로 추정되는 땅을 정부에 귀속하면 안 되냐고요? 불가능합니다. 현행법상 이 같은 땅은 사유재산입니다. 일본인 땅으로 판명 나면 '적의 재산'을 의미하는 적산(敵産) 토지로 분류해 환수가 가능하지만 소유자가 창씨개명한 조선인의 경우는 국적이 조선(현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정부가 사유재산을 마음대로 뺏을 수 없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대로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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