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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무기력증에 '쿠팡 치료'가 장땡이라고?

신체 노동의 기쁨과 슬픔

어쩌다 썸네일 쿠팡치료편 수정
현대인의 씁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등장한 여러 '치료'들이 있지요. 매너리즘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을 위한 이른바 '월급 치료', 비타민 주사보다 활력 개선에 도움이 된다는 '소비 치료', 친구든 연인이든 속상한 마음을 신속하게 풀어주는 덴 역시라는 '금융 치료' 등.

그렇다면 '쿠팡 치료'라는 말도 들어보셨나요. 혹시 택배를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현상이냐고요? 그럴싸했지만 틀렸습니다. 하루 9시간 정도의 짤막한 단기 아르바이트가 가능해, 장기적으로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이른바 '국민 알바'로 자리 잡은 '쿠팡 단기 아르바이트'와 관련된 말입니다.

돈이 필요할 때 당장 구하기 쉬운 일이라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겠지만, 쿠팡 아르바이트가 요즘 부업 대세가 된 데엔 꼭 돈만 이유가 된 건 아닙니다. 단기간의 고단한 노동과 그에 대한 보상이 바로 따르는 구조가, 누군가의 무기력한 일상을 회복하고 자기 효능감을 일깨우기에 좋다는 겁니다. 그래서 치료라는 논리입니다. '인생 노잼'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처방하는 '노동 치료' 말이지요.
 

'쿠팡 알바'는 어쩌다 국민 알바가 되었나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불가피한 목적 외에도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또는 무기력한 삶을 탈출하고 싶어서, 친구들과 돈도 벌면서 추억을 쌓고 싶어서 삼삼오오 모여 주변의 적당한 '물류센터'를 검색합니다. 공고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구인구직 플랫폼에 '쿠팡'만 검색하면 수천 건의 인력 모집 안내가 나옵니다.

웹상에서도 대중교통이 끊긴 새벽 시간 일꾼들을 나르는 셔틀버스를 타는 법부터 친절하게 설명한 각종 '후기'들이 많고,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아르바이트 갤러리 등지에선 개별 물류센터마다 일의 형태, 관리자들의 분위기나 노동 강도 등에 대한 평가가 마치 맛집 리뷰처럼 올라와 있습니다.

'쿠팡 알바 후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업무별 평점
2023년 1월부터 변경된 최저시급 9,620원을 기준으로, 지게차 운행 등의 특수한 직역이 아닌 일반 공정의 경우 일당은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의 주간 근무자는 7만 6,960원, 저녁 7시부터 새벽 4시까지 야간반의 경우 10만 1,010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급 차이가 크기 때문에 웬만해선 야간반의 인기가 높은 편입니다.

24살 대학생 김예랑 씨는 새벽을 꼬박 새우는 야간 쿠팡 알바를 연속해서 20일 동안이나 해본 적이 있습니다. 친구와 2주간 여행을 가기 위해 필요한 경비를 모으려는 생각으로 처음 방문했습니다. 저녁 6시에 거주지 근처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물건을 집어들어 분류한 바구니에 넣고, 레일 위에 올려두는 작업을 맡았습니다.

내부 전자기기 반입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7시간 내내 휴대전화도 확인하지 못하고 단순 노동에만 몰두했습니다. 동터올 무렵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했지만 그날 바로 수고한 일당 9만 원 정도를 받았습니다. 봉투를 받아 드니 생각보다 보람이 컸습니다. "집에 가서 침대에 누웠는데, 되게 기분이 좋은 거예요. 아 이거 또 할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다음 날도 하고, 그다음 날도 해서 연속해서 거의 20일 동안 일했던 것 같아요."

몸은 피곤했지만 노동의 결과가 바로 눈에 보이는 '효능감'이 가장 짜릿했다고 합니다. 가끔은 같은 물류창고에서 대학교 친구를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카페나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는데 당일에 바로 일당이 나오는 게 너무 기분이 좋았고 자칫 중독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지금은 자제 중이에요."

대학생 김진수(가명) 씨도 군 전역 후 친구들과 베트남 여행을 가기 위한 경비를 마련하려고 3일 연속 물류센터 일에 지원했습니다. 역시 시급이 더 높은 야간반에 지원했는데, 셔틀버스 타기가 여의치 않아 대중교통으로 이동한 근처 카페에서 새벽 2시까지 버틴 뒤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그간 과외나 학원 알바만 해오다가 택배 물품을 정해진 기준대로 차에 싣는 노동을 반복했습니다.

"몸이 많이 힘들어서 돈이 정말 부족해지는 순간이 아니면 다시 할 생각은 없지만 일하는 동안은 머릿속이 정말 비워지는 느낌이 들어서 스트레스가 덜하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과외나 학원 일이 시급은 더 높아도 평소 일상에서도 계속 진도 관리나 수업 내용을 떠올려야 했는데, 잡다한 생각과 고민에서 해방된 느낌? 또 그 뒤로는 '이게 몇 시간짜리 시급인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들이 술 먹자고 불러도 잘 안 나가요."
 

연진아 넌 모르잖아, 신체 노동의 효능감

'돈벌이' 그 자체가 주는 보람과 더불어 자신의 노동이 정확히 어디에 쓰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자기 효능감'에 크게 기여합니다. 온라인상 각종 커뮤니티와 블로그 등지에선 쿠팡 치료를 통해 우울증 개선에 도움이 됐다는 간증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은정 정신의학과 전문의는 "몸의 활동이 정신적 힐링을 돕는다"면서 "정신노동으로 피로해진 많은 현대인들이 이제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는 경험을 통해 정신적 스트레스와 피로감을 해소하기 시작했다"고 전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연구에 따르면 신체 활동과 우울증 사이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기도 합니다. 국민건강영양조사자료를 토대로 한 박세윤(2014)에 따르면, 우울증 유병율은 근력운동 또는 유연성 운동이 일주일에 1회 이하인 집단에서 높은 경향을 띠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유연성 운동보다는 근력운동이 우울증에 보다 더 유익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스트레칭도, 웨이트 트레이닝도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겠죠?

신체를 활용한 단순 반복 노동 작업을 통해 심리적 위안을 느낀다는 다소 역행적(?) 행태는 '쿠팡 치료'에만 한정되는 건 아닙니다. 상시 단기 고용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여러 플랫폼 업체들의 등장으로 투잡, 쓰리잡 등 본업 외에 할 수 있는 부업의 종류가 늘어났고, 배달, 심부름, 청소, 건설, 도배 등 아직까지 사람의 신체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할 기회가 커졌습니다.

블로거 '청소요정' 비용 안내문
집 정리, 짐 분류와 정리정돈, 청소 등의 신체 노동을 통해 자기 효능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다 이 취미 생활 부업이 아예 본업이 되기도 하죠. 소위 '쓰레기집'만 골라 청소 예약을 받는 인기 블로거 '청소 요정'은 직장생활을 거치며 극심한 무기력증에 시달리던 중 자신이 좋아하는 '청소, 설거지, 빨래'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우연한 기회에 전문 청소업자로 전업하게 된 사례입니다. 쓰레기가 가득 쌓여있는 집을 깨끗하게 비워내면서 얻는 카타르시스 탓에 '안 더러운데 서비스 신청하면 돈 더 내는' 규정도 마련했습니다.

이렇듯 '화이트칼라'로 불리며 책상에 앉아 사무 활동을 수행하는 업무가 아니라, '블루칼라', 기술직 신체 노동에서 본업을 찾으려는 인식 전환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재작년 취업 포털 사람인이 2030 2천81명을 대상으로 기술직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79.1%는 "수입 등의 조건만 맞출 수 있다면 기술직도 의향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부가가치가 높은 대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시스템'에 대한 무력감과, 자신의 노동이 실제로 어떻게 쓰이는지 확인되지 않는 사무직 환경에 이른바 '현타'와 '번아웃 신드롬'을 동시에 느끼는 근로자들은 생계를 꾸릴 수 있는 확실한 수입만 보장된다면 손으로 하는 전문적인 일에 자신을 투신하기도 합니다.

워싱턴 싱크탱크 소장 출신으로, 어느 날 홀연히 높은 연봉과 사회적 지위를 뿌리치고 모터사이클 정비사로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매튜 크로퍼드는 저서 <손으로 생각하기>(2017)에서, 신체 노동이 사무실에서의 노동과 달리 '생각과 행동을 함께 요구한다'는 점 때문에 "직업적 공황감"을 달래주는 위안을 얻었다고 밝힙니다.
 

'쿠팡 치료'와 '존버 씨의 죽음' 사이

한편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디지털 시대의 '인간소외'가 점차 신체 노동을 통해 자기 효능감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쿠팡 치료' 유행을 이끌고 있다면, 아예 완전히 반대급부에선 동시에 장시간 신체 노동에 의한 과로 희생과 열악한 노동환경 속 참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노동의 가치' 인식에 대한 이런 상반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W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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