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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한국 대표팀 역사상 유일한 '몰수 무승부'가 벌어진 이유는

[별별스포츠+] 희대의 축구 경기 최루탄 소동

한국 축구대표팀 역사에서 경기가 정상적으로 치러지지 않은 이른바 ‘몰수 경기’는 총 3차례 있었습니다. 몰수승과 몰수패, 몰수 무승부가 한 차례씩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몰수 무승부’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경기장 외부에서 발생한 시위 때문에 경기가 중단됐던 것입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도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건이었는데 바로 1987년 6월 항쟁입니다. 2017년 개봉했던 영화 <1987>에 당시 시대상이 잘 드러났죠. 당시 국민들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를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전두환 대통령의 제5 공화국 정권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이렇게 전국적인 시위로 들끓었던 1987년 6월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배 축구대회가 열렸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지 오래된 대회이지만 당시에는 국내에서 개최하는 가장 큰 국제 축구 대회였습니다. 외국의 축구 국가대표팀 또는 프로팀, 지역 선발팀들을 초청해서 경기를 했습니다.
 

역사적인 1987년 6월 10일 벌어진 축구 경기 최루탄 소동

1987년 6월 10일은 전국적으로 시위가 가장 크고 격렬하게 일어난 날이었습니다. 그 전날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었던 데다,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대표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돼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로 결정된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6.10 민주 항쟁’ 바로 그날, 마산 공설운동장에서는 우리나라와 이집트의 대통령배 축구대회 조별리그 경기가 열렸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이 대회에 A대표팀을 파견해 우리 국가대표팀과 이집트의 이 경기가 우승후보 간의 대결로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우리 대표팀 감독은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선수권 4강 신화를 이끌었던 박종환 감독이었고, 선수로는 최순호, 김주성, 정용환, 조병득, 정해원, 박경훈 등이 활약했습니다.

당시 신문기사 <최루가스 퍼져 축구 중단> 1987년 6월 11일 조선일보 
오후 6시 20분 킥오프한 이 경기는 지상파 TV에서 생중계했습니다. 그런데 0대 0으로 팽팽히 맞서던 전반 29분 사달이 일어났습니다. 그라운드 위의 이집트 선수들이 갑자기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한 겁니다. 바닥에 나뒹굴며 소리를 지르고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알고 보니 마산 공설운동장 인근에서 ‘6월 항쟁’에 나선 시위대를 향해 경찰 병력이 최루탄을 발사했고, 최루탄 가스가 바람을 타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 시대를 겪어보신 분들은 아실 텐데 최루탄 가스를 맞았을 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매캐해서 눈을 뜨기가 어렵고, 가스가 눈 속에 들어갈 경우에는 너무나 따갑고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됩니다. 이때 절대로 손으로 눈을 비비면 안 되고, 물로 씻어내야 하죠.

당시 경기 진행 요원이 그라운드에 들어와 이집트 선수들에게 얼굴에 손을 대지 말라고 제지했습니다. 선수들은 연신 재채기를 했습니다. 당시에 우리나라에서는 워낙 시위가 일상이어서 우리 선수들은 최루탄에 어느 정도 익숙했지만, 이집트 선수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생전 처음 맞아보는 최루탄 가스에 너무나 괴로워했습니다. 결국 주심은 더 이상 경기를 진행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중단시켰습니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거센 후폭풍...시청자 항의, 관중들 난동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이 경기는 지상파 방송사에서 생중계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 선수들이 쓰러지고 경기가 중단됐는데도 중계방송 캐스터는 이 상황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안 했습니다. “운동장 사정으로 경기가 중단되고 있습니다”라고만 짤막하게 언급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방송 음향이 끊기고, 경기장 모습만 멀리서 영상으로 보여주다가 방송을 중단하고, 다른 프로그램으로 대체했습니다. 별다른 설명 없이 방송을 중단하자 방송국에는 시청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이렇게 방송국에 전화로 항의했습니다. 해당 방송사에서는 뒤늦게 다른 프로그램 방송 도중 자막으로 “경기장 밖에서 학생 시위가 격렬해져 경찰이 쏜 최루탄 가스가 운동장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경기가 중단되어 중계방송이 중단됐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해당 방송사 측은 “중계현장과 연결이 되지 않아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느라 시청자들에게 해명이 늦어졌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방송사에서 자세한 설명은 안 했어도 당시 중계방송을 보던 많은 시청자들은 영상을 보고 최루탄 가스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직감했습니다. 워낙 시위와 최루탄 가스가 일상화됐고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죠.

<수라장 된 마산구장> 1987년 6월 11일 동아일보 
경기장에서는 관중들의 항의 소동도 벌어졌습니다. 당시 마산 공설운동장에는 2만 3천 관중이 들어왔는데, 경기가 중단되자 3천여 명의 관중이 본부석에 몰려가 “표값을 환불하라”고 요구하며 본부석의 의자, 탁자 등 집기를 부쉈습니다. 30여 분간 농성을 벌였는데, 결국 경찰병력 500여 명이 출동해 이들을 해산시켰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경기는 ‘몰수 무승부’ 처리

<한국A팀-이집트전 무승부 처리> 1987년 6월 11일 동아일보
<최루탄 소동에 축구협회 임원들 줄행랑> 1987년 6월 12일 조선일보
당시 대한축구협회의 미숙한 대처도 도마 위에 올라 언론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현장에 있던 축구협회 임원들은 경기 중단으로 일부 관중들이 병을 던지고 그라운드로 뛰어들자 황급히 대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이 경기를 어떻게 처리할지 여부가 결정되기도 전에 이집트 대표팀은 숙소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30여 분간 이어진 관중들의 소란이 수습된 뒤에야 협회 임원들은 다음날(6월 11일) 오전 11시에 재경기를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한국과 이집트 양 팀 관계자들과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입니다. 결국 뒤늦게 이를 안 이집트 측이 “FIFA 규정에 없는 재경기를 할 수 없다”고 거세게 항의하자, 4시간이 지난 6월 10일 밤 자정쯤에 앞서 결정을 번복하고, 0대 0 무승부로 처리하기로 하는 촌극을 빚었습니다. 이렇게 한국 축구 역사상 유일한 ‘몰수 무승부’가 된 겁니다.
 

재경기 결정에 강하게 반발한 이집트 “차라리 기권패를 시켜라”

대회 조직위는 경기 당일이었던 6월 10일 밤늦게까지 이집트 측에 다음날 재경기를 하자고 종용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 대표팀 감독은 “선수들이 구토를 하고 병원에 입원하는 등 컨디션이 엉망인데 11일에 재경기를 하고 12일에 부산에서 3차전을 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또 “대회 주최 측에서 관중들의 소동을 제대로 제지하지 못한 것 때문에 선수들이 마산에서의 재경기에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기권패를 시키든지 마음대로 하라. 하루빨리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불안해하는 외국팀 달래기에 나선 최순영 당시 대한축구협회장

<최루탄 소동에 축구협회 각국팀 위로파티> 1987년 6월 12일 동아일보
이렇게 한바탕 대소동을 겪자 이집트뿐만 아니라 대회에 출전한 다른 나라 선수단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격렬하게 시위하는 나라에서 안전하게 경기를 할 수 있을지 불안하다는 겁니다. 그러자 최순영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신동아그룹 회장)이 참가국 선수단을 위한 위로 파티를 열고 달래기에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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