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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화물노동자 등골 빼먹는 '번호판 장사' 이번엔 바뀔까

"번호판 값 2,000만 원"…갑질에 시름하는 화물기사

약 2년 전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방송국에서 함께 일한 바 있었던 촬영 보조 직원이었습니다. 방송 일을 관두고 화물운송 일을 하고 있는데, 화물운송 회사의 '번호판 장사'를 취재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화 한 통이 계기가 돼 화물운송 사업 시장 내 만연한 '번호판 장사'가 무엇인지 알게 됐고, 기사를 쓰게 됐습니다.

▶ "번호판값 2,000만 원"…갑질에 시름하는 화물기사
 

번호판 장사, 불로소득


번호판 장사는 화물운송 사업이 '허가제'인 점에서 비롯됩니다. 정부는 지난 2004년부터 화물차 시장이 포화 상태라고 보고 신규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신규 화물기사는 억대의 화물차를 구입한다고 해도 자기 화물차에 달 번호판을 구하지 못하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결국 기존에 번호판을 여러 개 가진 운송업체를 찾아가 위‧수탁 계약을 맺습니다.

박찬범 취재파일1

운송업체는 이때 번호판을 빌려주는 대가로 월 사용료를 받습니다. 여기까지는 사업권을 빌려주는 만큼 용인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제는 일부 운송업체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화물기사에게 계약금과도 같은 '번호판 값'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번호판 값은 시장 상황에 따라 값이 바뀌지만, 약 2천만 원 선에서 거래된다고 합니다. 번호판을 대신 등록해주고 기사 교육을 한다는 명목입니다. 모든 화물 운송업체가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일부 업체에는 명의만 빌려주고 '불로소득'을 올리는 것입니다.

박찬범 취재파일2

대포통장이랑 뭐가 다르나?


일부 악덕 업체는 이러한 번호판 값을 한 번 받아내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화물 기사가 화물차를 바꾼다거나 할 때 다시 또 수천만 원을 요구합니다. 화물 기사가 거부하면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이들의 번호판 계약이 영구적으로 유효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번호판을 쥐고 있는 운송 업체와 화물기사 사이에 갑을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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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기사는 내 돈 주고 내가 산 화물차를 자기 명의로 운행하지 못하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보험료를 비롯한 부대비용을 온전히 감당하면서도 운송업체가 언제 번호판을 회수할까 노심초사하기도 합니다. 당시 인터뷰에 응했던 한 화물기사는 대포통장이랑 뭐가 다르냐고 하소연했습니다.

박찬범 취재파일4

일하지 않는 운송회사 퇴출


화물운송 업체의 '번호판 장사' 문제를 뿌리 뽑는 건 정부와 화물연대의 숙원 사업 중 하나입니다. 지난해부터 안전운임제 일몰을 두고 현 정부와 화물연대가 갈등을 빚고 있지만, 적어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양측 모두 개혁 의지가 분명해 보입니다.

2월 6일 국회에서 화물운송 산업 정상화 방안 당정협의회가 열렸습니다. 이날 발표된 <화물운송사업 정상화 방안>에도 첫 번째 핵심 과제로 내세운 게 일하지 않는 운송회사 퇴출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한 '일하지 않은 운송회사'란 화물 운송 일을 직접 하지 않고, 번호판만 화물 기사들에게 빌려주는 '지입전문업체'를 일컫습니다. 앞에서 말한 '번호판 장사' 하면서 불로소득만 올리는 운송업체들입니다. 이들 업체를 어떻게 손볼지에 대해선 3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개혁안을 만들기 위해 국토교통부와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이 막판까지 여러 논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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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화물운송업체 세무조사

세무조사는 당정의 개혁 의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세무조사 카드는 당정이 개혁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성일종 정책위의장이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화물 운송업체가 화물기사로부터 번호판 값을 받아낼 때 소득 신고를 했는지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암암리에 요구하는 번호판 값이 운송회사 소득으로 잡히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일종 정책위의장은 지난 2월 6일 당정 때 "지입회사가 차주에게 받은 번호판 대여료와 차량 교체 비용이 회계상 장부에 어떻게 기록되고 수익이 어디로 귀속됐느냐는 굉장히 중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쉽게 말해 운송업체 수익으로 기록 안 했다면 탈세라는 것입니다. 국세청이 세무조사를 한다면 어느 운송업체가 일하지 않고 '번호판 장사'만 하는지 더욱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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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화물운송업체 최소 운행실적

번호판 장사하는 업체를 퇴출하기 위해 최소 운행실적을 의무화하는 안이 있습니다. 운송업체가 직영차량을 운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직영차량 운행 비율을 단계적으로 올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운송업체가 20% 정도 직접 운영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최소 운행 실적을 내도록 하면 그만큼 화물기사에게 착취하는 번호판 값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③ 소유권 보호, 번호판 실명제

중장기적으로는 번호판 실명제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내 돈 주고 내가 샀다는 의미에서 '내돈내산' 이란 줄임말이 있습니다. '내돈내산' 화물차가 많아지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화물기사들의 차량 소유권을 보호해 준다는 뜻입니다. 현재 지입 계약 시 차량을 운송사 명의로 등록하던 것을 차량의 실소유자인 차주 명의로 등록하게끔 하고, 이를 위반하면 운송사에 감차 처분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운송 업체가 화물기사를 상대로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하는 등 갑질 행위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중산층으로 끌어올리자"


당정의 <화물운송산업 정상화 방안> 발표가 있고난 뒤 몇 가지 후일담을 들었습니다. 일 하지 않은 운송업체, 즉 '번호판 장사'하는 업체가 화물운송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그 영향력이 세다고 합니다. 이들 업체가 운송 시장에서 주류이면 주류이지, 비주류가 아니라고 합니다. 국회에서도 어떠한 형태로든 로비(?)가 암암리에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정부의 개혁 의지가 중요한 대목입니다.

박찬범 취재파일7

성일종 정책위의장에게 운송 업체 세무조사 등 개혁안이 나오게 된 배경을 물어봤습니다. 성 의장은 화물기사가 운송업체에 휘둘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중산층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마련한 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화물기사가 국가 물류 시스템 정중앙에 놓여야 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넘어야 할 산, 안전운임제


화물운송 업체의 번호판 장사 문제를 개혁하는 건 화물연대의 오랜 바람이기도 합니다. 정부와 노동계가 모처럼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화물연대는 이번 <화물운송산업 정상화 방안>에 대해 반대 입장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안전운임제 폐지 내용이 포함돼 있기 때문입니다.

화주(화물의 임자)에 대한 처벌 조항을 없앤 것에 대한 반발도 큽니다. 정부는 안전운임제를 표준운임제를 바꾸는 과정에서 화주와 운송사 사이 표준운송운임을 마련했지만, 과태료 대상에서 제외해 강제성을 없앴습니다. 화물연대는 이처럼 처벌 조항이 없어지면 화주 자본과 운송업체 사이 불공정한 계약이 늘어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이럴 경우 운송업체가 떠안게 되는 부담이 화물기사에게 전가될 수 있다고 전망합니다. 정부는 운송업체와 화물기사 간 계약에는 강제성이 있는 표준위탁운임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노동계의 공감을 받아내지는 못했습니다.

박찬범 취재파일8

안전운임제로 불거진 갈등이 다른 좋은 개혁안마저 집어삼키는 게 아닐지 걱정됩니다. 당정은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토대로 <화물운송 개혁 법안>을 이달 중에 발의하고, 3월 국회에서 처리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민주당이 과반 이상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협조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민주당은 안전운임제 일몰에 반대 입장을 그동안 밝혀왔습니다. 결국 정부와 여당이 화물운송시장에서 60년 묵은 화물차 '번호판 장사' 악습을 타파하려면, 안전운임제에 대한 합의점 마련도 함께 수반돼야 합니다.

내가 산 차량의 명의를 운송업체에 넘기고 화물 운송 일을 하는 노동자는 20만 명이 넘습니다. 이들이 억울하게 번호판 값 명목으로 수천만 원을 상납하는 일이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여야의 올해 첫 협치, '일하지 않은 운송회사 퇴출'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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